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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땅, 험악한 세월2020년 한국기독교 부활절맞이 묵상 고난주일 세족목요일(4월 9일)

바로가 야곱에게 말하였다. “노인께서는, 연세가 어떻게 되시오?” 야곱이 바로에게 대답하였다. “이 세상을 떠돌아다닌 햇수가 백 년 하고도 삼십 년입니다. 저의 조상들이 세상을 떠돌던 햇수에 비하면, 제가 누린 햇수는 얼마 되지 않지만, 험악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야곱이 다시 바로에게 축복하고, 그 앞에서 물러났다. 요셉은 자기 아버지와 형제들을 이집트 땅에서 살게 하고, 바로가 지시한 대로, 그 땅에서 가장 좋은 곳, 라암세스 지역을 그들의 소유지로 주었다.(창세기 47:8-11)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 우리 안에 늘 계셔서 매일매일 주님의 숨결을 느끼며, 주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축복과 은혜를 누리며 살아갑니다.

늘 평탄하지만은 않은 우리의 삶을 늘 감싸고 보호하시는 하나님 우리를 바른 길로, 하나님의 공의의 길로 인도하여 주옵소서. 외국인 노동자라는 이유로 차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고용주로부터 합당한 임금을 받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때로는 인간으로서 존엄하지 못한 대가를 받고, 밤늦게까지 무임금 노동을 할 때도 많습니다.

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우리를 하나님의 길로 인도하여 주옵소서. 하나님께서는 늘 우리에게 평화의 마음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믿으며 오늘도 하루를 내딛습니다. 우리 외국인 노동자들이 다시 사랑하는 가족들의 품으로, 그리운 고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우리의 가족들을 지켜주시고, 우리 모두가 절망이 아니라 희망하는 삶을 꿈꾸게 하옵소서.

한국 땅에서 노동하며 몸이 아픈 자들, 마음이 강팍해지는 이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새 힘을 주셔서 우리를 아픔 속에서, 소외된 삶 속에서 회복하게 하옵소서. 우리가 직면하는 많은 어려움 속에서 한 줄기 빛으로 주님을 보게 하옵소서.

우리에게 평화와 희망으로 오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Heart of god full of love and mercy, thank you for the everyday life that you have given to us, for all the blessings that we receive everyday, through our ups and downs you're always behind us, guiding us to do right things even some of us are mistreated from our employers because we are foreigners; lord always give us peace of mind so we can do things better to everyone around us, thank you for taking care of our families until we return home, not with broken hearts but with hope; i pray also to you oh lord that we are always in good health and cure those who are in pain and to overcome also all the trials we encounter; and most of all world peace for all of us in Jesus name, Amen.

필리핀 외국인 노동자 | 루이스 엔젤로 알폰소(Luis Angelo Alfonso)

 

차디찬 바닥에서의 탄식

묵상 고난주일 수요일(4월 8일)

“나의 종을 보아라.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사람이다. 내가 택한 사람, 내가 마음으로 기뻐하는 사람이다. 내가 그에게 나의 영을 주었으니, 그가 뭇 민족에게 공의를 베풀 것이다. 그는 소리 치거나 목소리를 높이지 않으며, 거리에서는 그 소리가 들리지 않게 하실 것이다. 그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며,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며,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다. 그는 쇠하지 않으며, 낙담하지 않으며, 끝내 세상에 공의를 세울 것 이니, 먼 나라에서도 그의 가르침을 받기를 간절히 기다릴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늘을 창조하여 펴시고, 땅을 만드시고, 거기에 사는 온갖 것을 만드셨다. 땅 위에 사는 백성에게 생명을 주시고, 땅 위에 걸어다니는 사람들에게 목숨을 주셨다. 주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 주가 의를 이루려고 너를 불렀다. 내가 너의 손을 붙들어 주고, 너를 지켜 주어서, 너를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할 것이니, 네가 눈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하고, 감옥에 갇힌 사람을 이끌어 내고, 어두운 영창에 갇힌 이를 풀어 줄 것이다.”(이사야서 42:1-7)

 

예수님!

힘없고 가련한 이들 곁에 계시고자 슬픔에 지치고 억압과 착취에 억눌린 이들 곁에 머무시고자 저희 죄인들을 위해 당신의 목숨마저 외면하신 주님!

도로공사 대리석 바닥에서 광화문 차디찬 거리 바닥에서 꽁꽁 언 몸 서로 어루만져 보듬으며 따뜻한 안방에서 이 한 몸 뉘여 쉴 수 있는 날을 간절히 소망하는 저희 톨게이트 동지들에게 끊임없는 당신 사랑을 보여주시며

“너희가 옳다. 힘을 내어라. 너희가 승리하는 날까지 내가 항상 곁에 있어 주마”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 저들은 또다시 15년 이후 입사자를 갈라치기하는 비열한 공격으로 저희를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습니다. 곁에 있는 동지의 손을 놓고서는 직접 고용도, 6개월의 쓰라린 시간의 투쟁도, 동지의 어깨 안으며 서로 ‘고생했다, 고맙다, 함께여서 이 길을 올 수 있었다’ 하고 서로 위로하며 보듬어 줄 수도 없고 웃으며 동지의 눈을 바라볼 수도 없습니다.

주님! 도로공사의 비열함에 걸려 넘어지지 않게 하시며 저들의 마음을 움직여 주시어 우리 모두 직접 고용이 되어 저희가 옳았음이 증명되게 해 주십시오.

사랑의 손길로 연대의 끈을 이어주신 주님! 그 사랑으로 저희가 오늘도 희망으로 서로를 위로하고 또 위로받으며 힘찬 용기를 가슴 깊은 곳에서 끌어 올릴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십시오. 동지들 모두 건강한 모습으로 제자리로 돌아가는 그 날까지 항상 지켜주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청하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한국도로공사 톨게이트 수난노동자 | 김정희

 

억울한 죽음 그리고 위선

부활절맞이 묵상 고난주일 화요일(4월 7일)

서로 한 마음이 되고, 교만한 마음을 품지 말고, 비천한 사람들과 함께 사귀고, 스스로 지혜가 있는 체하지 마십시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이 보기에 선한 일을 하려고 애쓰십시오. 여러분 쪽에서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게 지내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스스로 원수를 갚지 말고, 그 일은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십시오. 성경에도 기록되기를 “‘원수 갚는 것은 내가 할 일이니, 내가 갚겠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하였습니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그가 목말라 하거든 마실 것을 주어라. 그렇게 하는 것은, 네가 그의 머리 위에다가, 숯불을 쌓는 것이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십시오.(로마서 12:16-21)

 

6년 전 그날.

저는 믿을 수 없는 아이의 억울한 죽음 앞에서 절규했습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이 악에 눈 감는 것이라 착각한 저를 저주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평화는 상처받는 자들을 소외시킨 평화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저를 둘러싸온 온갖 편견과

개교회주의라는 단단한 벽을 부숴 버렸습니다.

부숴 버린 벽 뒤에는 이제까지 보지 못한,

아니 보지 않으려 했던 이 땅의 아픈 모습들이 있었습니다.

주님을 눈물 흘리게 한 이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이 스스로를 종으로 생각하고 있을 때,

그래서 소망도 없이 살아가고 있을 때,

주님은 너희는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주님이 천하보다 귀하게 여긴 생명들이

종이 아닌 하나님의 자녀로 살기 위해 몸부림을 치고 있습니다.

그들의 몸부림이 절규와 증오로 끝나지 않고

이 땅과 평화할 수 있게 하는 일은,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들의 손을 잡아 줄 수 있는

이 시대의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일임을 고백합니다.

주님의 교회와 교인들이 대립을 부추기는 자리에 가기보다

이 땅의 억울한 자들의 편에 서서

그들이 생명을 이어갈 수 있도록 함께 하게 하옵소서.

6년 전 그날.

아이의 억울한 죽음 뒤에 수많은 악이 있었음을 보았습니다.

그 거대한 악을 보며 기성세대, 정치인, 경제인, 언론인, 학자, 교육자, 교회와

그리스도인, 시민운동가 등 이 사회 모든 구성원의 회개를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모두 지혜 있는 체만 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낮은 자의 절규 가운데서 함께 절규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모두 겸손해지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심판을 기다리되

하나님의 선과 공의를 함께 이루어 나가게 하옵소서.

태어나면서부터 결정되어진 것들로 인해 차별받지 않게 하시고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고통 받고 죽임 당하는 자들을 보며

주님의 대속을 기억하게 하옵소서.

창조 전 혼돈이 여전히 있듯

하나님의 창조도 여전히 진행 중임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에 저희 모두가 동참하여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세상을 만들도록,

주님이 오셨고 고난 받으셨고 죽으셨고 부활하셨음을 믿습니다.

주님 닮아가는 사순절 하루하루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단원고 예은이 엄마 | 박은희

 

암울한 미래

고난주일 월요일(4월6일)

나는 또 세상에서 벌어지는 온갖 억압을 보았다. 억눌리는 사람들이 눈물을 흘려도, 그들을 위로하는 사람이 없다. 억누르는 사람들은 폭력을 휘두르는데, 억눌리는 사람들을 위로하는 사람이 없다. 그래서 나는, 아직 살아 숨쉬는 사람보다는, 이미 숨이 넘어가 죽은 사람이 더 복되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이 둘보다는, 아직 태어나지 않아서 세상에서 저질러지는 온갖 못된 일을 못 본 사람이 더 낫다고 하였다. 온갖 노력과 성취는 바로 사람끼리 갖는 경쟁심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나는 깨달았다. … 혼자보다는 둘이 더 낫다. 두 사람이 함께 일할 때에,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하나가 넘어지면, 다른 한 사람이 자기의 동무를 일으켜 줄 수 있다. 그러나 혼자 가다가 넘어지면, 딱하게도, 일으켜 줄 사람이 없다. 또, 둘이 누우면 따뜻하지만, 혼자라면 어찌 따뜻하겠는가? 혼자 싸우면 지지만, 둘이 힘을 합하면 적에게 맞설 수 있다.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잠언 4:1-4,9-12)

사랑하는 하나님! 우리의 미래이고 희망인 사랑하는 우리 아이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대한민국 교육이 우리 아이들과 학부모, 그리고 선생님 모두를 행복하게 만드는 일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아이들은 지나친 경쟁과 너무 많은 공부로 고통 받고 있습니다. 친구들과 더불어 따뜻한 정을 나누고 밝은 미래만 꿈꾸기에도 모자란 나이에 친구를 이겨야 하는 비정한 경쟁과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배우고 있습니다.

학부모들은 자식들의 장래에 대한 걱정으로 아이들을 사교육으로 몰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경쟁 교육과 낡은 교육으로 아이들과 학부모들이 진 멍에는 이 시대가 안고 있는 고난입니다.

많은 이들이 아이들의 짐을 덜어 주기 위해 열정을 바쳤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리하셨듯이 희생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보살핌과 헌신으로 교육 혁신의 물꼬가 트였습니다. 학교가 미래를 이끄는 민주 시민이 탄생하는 곳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육개혁 앞에는 대학입시라는 거대한 벽이 가로 놓여 있습니다. 이제는 그 벽을 넘어서야 합니다. 우리 아이들과 함께, 선생님들과 함께, 학부모와 함께 그 벽을 넘어 미래로 나아가야 합니다.

사랑과 긍휼의 하나님! 고난 속에 있는 우리 아이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모두가 손잡고 교육을 바꾸는 길을 함께 가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세종시 교육감 | 최교진

 

평화의 임금님 예수

부활절맞이 묵상 종려주일(4월 5일 주일)

그들이 새끼 나귀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위에 걸쳐 놓고서, 예수를 올라타시게 하였다. 예수께서 나아가시는데, 제자들이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다가 폈다. 예수께서 어느덧 올리브 산의 내리막길에 이르셨을 때에, 제자의 온 무리가 기뻐하며, 자기들이 본 모든 기적에 대하여 큰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말하였다. “복되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임금님! 하늘에는 평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누가복음서 19:35-38)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신 예수님은 평화의 왕이라고 불립니다. 평화의 왕 예수님은 겸손하게 모양새 없이 사람들 사이로 들어갑니다. 평화도 이와 같이 우리 가운데 들어옵니다. 그러나 평화는 그렇게 다가와 살해되고 파괴됩니다.

평화는 부서지기 쉬운 것이라 힘써 보살펴야 하고 지켜야 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영은 전투의 영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나의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전해주신 평화는 사람의 덕목이나 인격 수양으로 드러내는 무엇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한다는 믿음에서 오는 평화입니다. 이 믿음이 있는 자는 평화를 뺏기지 않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평화를 사는 자는 평화를 발견하고 보살피며 평화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정체성과 포용력

묵상 44일째(4월 4일 토요일)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으니, 우리는 그곳으로부터 구주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분은 만물을 복종시킬 수 있는 능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변화시키셔서, 그분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빌립보서 3:20-21)

기독교인의 정체성을 이야기할 때 흔히 하는 말이 빌립보서의 ‘하늘에 있는 시민권’이 아닌가 싶습니다. 정체성은 인간의 삶에서 중요한 기반입니다. 정체성을 어떻게 정하느냐에 따라 삶의 방향과 내용도 완전히 달라집니다. 인도 철학자 아마르티아 센(Amartya Sen)은 “정체성은 또한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 그것도 닥치는 대로 죽일 수 있다. 한 집안에 대한 강한, 그리고 배타적인 소속감은 다른 집단과의 거리감과 분리됨의 느낌을 주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한국전쟁과 한국민주화운동사에서 볼 수 있는 소위 ‘빨갱이’와 ‘빨갱이가 아닌 이’의 형태를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한국 사회를 기형적으로 만들며 음모와 분열을 조장하고 죽음과 삶을 가르게 했던 정체성이었습니다. 그러한 정체성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인간성이라는 보편적 공통점과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일방적인 폭력일 뿐입니다.

구별 기준을 모두 가려버리는 단일한 기준의 정체성으로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사랑으로 세상 모두를 품고 계심을 우리는 의심하지 않습니다. 포용의 하나님이 아니라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동정, 공감, 존중, 친절, 이해와 용서. ‘하늘의 시민권’을 갖고 있는 이들이 갖추어야 할 포용적 품성입니다.

 

주권자 시민의 기도

묵상 33일째 (4월 3일 금요일)

하나님, 왕에게 주의 판단력을 주시고 왕의 아들에게 주의 의를 내려 주셔서, 왕이 주의 백성을 의로 판결할 수 있게 하시고, 불쌍한 백성을 공의로 판결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시편 72:1-2)

어릴 적 교회 다닐 때부터 교회 어른들이 나라의 ‘위정자’를 위해 기도하는 것을 많이 들었습니다. 위정자라는 말이 생소했지만 우리도 그렇게 기도해야 하는 거라고 생각했고, 시편 72편 또한 그렇게 읽었습니다.

지금은 시민이 주권자라고 각성한 시대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국민이 대통령이라고 했지요. 그러니 정치지도자들에게만 맡기고 기댈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인식에 맞춰 시편 72편을 다르게 읽어 보았습니다. “하나님, 우리(나)에게 주의 판단력을 주시고, 우리(나)의 아들에게 주의 의를 내려 주셔서, 우리(내)가 주의 자녀를 공의로 판결할 수 있게 하시고, 불쌍한 이웃을 공의로 대접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일반 시민이 스스로의 힘으로 사회를 세우며 이끌어가는 주인공임이 더 확실해집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자부심과 책임감을 갖고 공동체를 돌보기를 바라십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시민 주권 시대에 크게 빛납니다.

 

공평과 정의의 1법칙

묵상 32일째 (4월 2일 목요일)

“꼴찌들이 첫째가 되고, 첫째들이 꼴찌가 될 것이다.”(마태복음서 20:16)

성서에는 곳곳에 기존 질서를 뒤집는 전복과 반전의 메시지가 숨겨져 있습니다. 포도원의 품꾼 비유도 예외는 아닙니다. 아침 일찍부터 일을 시작한 일꾼들은 마지막 한 시간을 남겨두고 투입된 일꾼들도 똑같은 품삯을 받게 되자, 주인에게 불공평하다고 불평합니다. 예수께서는 주인의 입을 빌려 이들의 ‘자비 잃은 공평’을 날카롭게 꼬집으십니다.

“나는 그대를 부당하게 대한 것이 아니요. 그대에게 주는 것과 꼭 같이 이 마지막 사람에게 주는 것이 내 뜻이요. 내가 후하기 때문에 그대 눈에 거슬리오?”(13-15절)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정의는 불가합니다. 공평의 잣대를 들이댈수록 정의에 대한 갈망만 왜곡될 뿐이지요. 공평은 하나의 잣대나 일관된 성과주의로 실현되지 않습니다. 공평의 1계명은 자비의 법칙입니다. 어거스틴은 말합니다. “성서는 자비 외에는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리고 탐욕 외에는 정죄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성서는 이런 방식으로 사람의 마음을 바로잡습니다.”

생명의 가치를 귀히 여기는 하늘의 마음과 따뜻한 시선이 담기지 않은 공평은 허상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근본을 바로 잡는 것이야말로 모두를 위한 가장 큰 자비입니다.

“모든 골짜기는 메워지고 모든 산과 언덕은 평평해지고 굽은 것은 곧아지고 험한 길은 평탄해져야 할 것이니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구원을 볼 것이다.”(눅 3:5)

 

다른 음의 어울림

묵상 31일째 (4월 1일 수요일)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서로 화답하며, 여러분의 가슴으로 주님께 노래하며, 찬송하십시오.(에베소서 5:19)

언어가 다르고 문화가 다르고 시대가 달라도 언제 어디서나 노래가 들립니다. 기쁠 때도 노래를 부를 수 있고 슬플 때도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사람의 목소리로 부르는 노래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가장 좋은 선물이며 인간이 하나님께 드리는 가장 좋은 선물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모든 목소리, 모든 음이 노래가 되는 것은 아니며, 모든 노래가 아름다운 것도 아닙니다. 노래를 아름답게 하는 것은 각기 높이가 다른 음들의 어울림, 곧 화음(harmony)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울림’은 ‘다름’을 전제한다는 사실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음이 똑같이 하나뿐인 노래가 있다면 어떨까요? 노래라기보다는 지루한 단음의 연속이거나 거슬리는 소음일 뿐이겠지요. 화음을 위해 필수적인 것은 다른 음, 다양한 음입니다.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생각 방식, 다른 생활 방식은 삶의 노래를 더 깊고 풍요롭고 아름답게 하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리고 서로의 다른 음을 경청하고 존중하며 화음을 이루는 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우리의 선물, 우리의 찬송입니다.

 

탈주

묵상 30일째 (3월 31일 화요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마태복음서 5:46)

“그때 희랍정교회 주교가 나섰습니다. ‘지금 봐서는 남북통일이 쉽게 이루어질 것 같지 않습니다. 하지만 홍해를 가르신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38선이 문제겠습니까?’ 그리고는 미국교회 목사가 성찬집례자로 나서며 화해와 평화의 인사를 나누라고 말했습니다. 처음에는 가볍게 악수하는 정도로 시작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서로 끌어안고 울기 시작했어요. 우리보다 북쪽 사람들이 더 울었던 것 같아요. 그 순간 마음이 하나가 된 겁니다.”

1986년 ‘글리온 회의’의 마지막 풍경입니다. 분단 30여년 만에 처음으로 남북교회 대표들이 제3지대인 스위스 글리온에서 대화의 자리를 가졌습니다. 두려움 반 설렘 반으로 시작된 자리는 어색함과 착잡함으로 끝나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반전은 항상 마지막 순간을 기다립니다.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문은 스스로 열어야 하는 문입니다. 어떤 무기로도 깰 수 없고 다른 누군가가 대신 열어줄 수도 없습니다. 그저 스스로 열고 나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라는 감옥에 갇혀 내가 있는 곳이 내가 만든 감옥인지도 모른 체 나 홀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고 보면 스스로가 가장 큰 감옥입니다.

화엄경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나무는 꽃을 버려야 열매를 얻고, 강물은 강을 버려야 바다에 이른다.” 제 집 문턱을 넘지 않고 더 큰 세상과 마주할 수 없듯이, 집단의식의 옹졸함과 편협함을 넘어서지 않고는 경계 너머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평화의 나라에 합류할 수 없습니다. 함께 만들어가는 미래 사회와도 조우할 수 없겠지요. 나를 넘어서는 그 순간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시작입니다.

 

줄탁동시(啐啄同時)

묵상 29일째 (3월 30일 월요일)

“주님, 우리 눈을 뜨게 해주십시오. 예수께서 측은히 여기셔서 그들의 눈에 손을 대셨

다.”(마태복음서 20:33-34)

행복은 고통을 나누어질 때 커지고, 세상은 땀 흘린 만큼 바뀝니다. 바깥세상이 궁금한 작은 병아리가 있습니다. 스스로 알을 깨고 나오려는 여린 몸부림과 더 큰 공간을 열어주려는 어미닭이 안팎에서 온힘을 다해 힘껏 부리를 맞춥니다.

새로운 시대를 여는 일은 한 사람의 의지와 노력만으로는 어렵습니다. ‘기평’이라는 본명을 가진 박노해 시인의 어릴 적 만난 스승 이야기입니다.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 “박기평입니다. 터 기基 평화 평平, 평화의 터를 이루는 길입니다.”

“길道은 머리首를 베어 창으로 꿰들고 열어가는 것이다. 일본 놈들이 여기까지 신작로를 열 때 얼마나 많은 사람과 나무와 생명의 목을 베었겠느냐. 너는 평화의 길을 어찌 열겠느냐?”

“평화를 해치는 나쁜 사람의 목을 쳐야 하나요?”

“내가 먼저 평화를 이루지 못한 사람은 평화의 세상을 이루어 갈 수 없단다. 길을 잃거든 네 빳빳한 목을 쳐라! 그러면 평화다.”

새로운 역사는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세우고 채워가는 것입니다. 특정한 사람이 아니라 모두가 저마다의 방식으로 힘을 보태야 한걸음 나아갈 수 있습니다. 자기 안에 있는 힘을 발견하고 그 내면의 힘을 키우는 데 힘써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렇게 자라난 힘은 누구도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누구도 훔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작은 우주를 깨고 더 큰 우주로 나오려는 병아리처럼, 있는 힘을 다해 쪼고 또 쪼아야지요. 내가 알고 있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할 때까지. 더 큰 우주를 만나기 위해 오늘도 ‘작은 나’와 씨름하는 이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닙니다.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2020년 한국기독교 부활절맞이 묵상 사순절 다섯째 주일(3월 29일 주일)

온갖 기도와 간구로 언제나 성령 안에서 기도하십시오. 이것을 위하여 늘 깨어서 끝까지 참으면서 모든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십시오.(에베소서 6:18)

신체적, 심리적, 사회적 고통은 누구나 보편적으로 겪는 것이지만, 그 고통(pain)을 특별한 괴로움(suffering)으로 만드는 것은 ‘외로움’입니다. 고통을 겪는 것만으로도 아프고 힘든데, 게다가 그것을 홀로 겪어야 하니 괴로운 것입니다. 그 괴로움이 극에 이르면 견디다 못해 삶을 포기하기도 합니다.

반면, 함께 울고 함께 아파하는 친구와 이웃이 있다면, 아무리 큰 고통이라도 삶을 포기하거나 절망하지 않고 계속 살아갈 용기와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나홀로 고통’은 견디기 어렵지만 ‘더불어 고통’은 견딜 수 있는 것입니다.

더불어 고통을 나누는 길 중 하나가 중보기도입니다. “누군가 널 위하여 누군가 기도하네. 네가 홀로 외로워서 마음이 무너질 때,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이 아름다운 노래처럼, 고통 속에 홀로 던져져 있다고 생각하는 이가 문득 자신을 위해 누군가 기도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면 고통 속에서도 감사와 희망을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가 자기를 위해 기도할 거라고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는 누군가를 위해, 아파하고 슬퍼하고 외로워하는 이웃을 위해 마음 다해 기도하며 간구해 보면 어떨까요?

 

당신을 응원합니다!

2020년 한국기독교 부활절맞이 묵상 28일째(3월 28일 토요일)

“너희는 무엇을 보러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아니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이냐?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은 왕궁에 있다.”(마태복음서 11:7-8)

세례자 요한이 옥에 갇혔습니다. 그는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냈습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그분이 당신입니까?” 예수님께서는 눈으로 직접 그 현장을 확인하라고 권면합니다. 어떤 사람들과 함께 하는지, 어떤 사람들을 응원하는지. 보지 못하던 사람이 제 눈으로 세상을 보고, 온전히 걷지 못하던 사람이 스스로 걷고, 하늘이 내린 형벌이라고 모두가 수군대는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듣지 못하던 사람이 제 귀로 듣고, 죽음에 갇혀 있던 사람이 되살아나고, 가난이 죄인 세상에서 절망으로 한숨 쉬던 사람이 희망가를 부르는 그 현장을….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을 더 응원하셨습니다. 앞서 길을 낸 세례자 요한은 예언자보다 더 위대한 인물이라고. 함께 길을 걷는 사람만이 그 가치를 알아보는 법입니다.

누구를 따라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내가 선 곳이 어딘지, 왜 이곳에 있는지 사방을 둘러보아도 답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마음만 앞서 무턱대고 앞서가는 사람만 따라온 탓도 있겠지요. 그가 어떤 사람인지, 어디로 가는지 묻지도 않은 채.

내가 응원하는 이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보십시오. 나를 응원하는 이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보십시오. 지금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 보일 것입니다. 성공과 실패의 여부보다 지금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 아는 것이 훨씬 중요합니다. 가서는 안 될 길에 서 있으면 제 아무리 성공가도를 달려도 헛수고가 될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의 기도

묵상 27일째(3월 27일 금요일)

너희 가난한 사람들은 복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누가복음서 6:20)

세상은 가난한 우리를 멸시하며, 실패한 인생이라고 비아냥거립니다. 우리는 살면서 억울한 일을 고스란히 겪었고 많이 아프고 춥고 외롭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복이 있다 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다른 가난한 이를 환대하겠습니다. 주머니가 빈 것에 집착하지 않고 심령이 가난한 자인 것을 기뻐하겠습니다. 숨거나 비겁해지는 대신에 도둑질 하지 않은 것에 감사하겠습니다. 실패한 인생이 아니라 더불어 살기를 원한다고 말하겠습니다.

가난한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를 소망하는 자라고 불리고 싶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향해 가난을 해결하라고 요청하는데, 정작 주님은 우리에게 너는 누구의 이웃이냐고 물으십니다. 주님, 힘들고 아파하는 이들의 편에 서겠습니다. 가난한 우리를 가난한 우리가 서로 돕겠습니다. 세상이 우리를 배우고, 우리의 행실에 공감한다면, 그 때 세상이 하나님 나라를 향해 돌아섰다고 기뻐하겠습니다.

 

서로를 지켜주는 힘

묵상 26일째(3월 26일 목요일)

가인이 아우 아벨에게 말하였다. “우리 들로 나가자.”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였다. 주께서 가인에게 물으셨다. “너의 아우 아벨이 어디에 있느냐?” 그가 대답하였다.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창세기 4:8-9)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성경에 기록된 첫 살인자, 그것도 제 아우를 죽인 가인의 항변입니다. 영어에 “raising Cain”이라는 말은 직역하면 가인을 끌어올린다는 말로 ‘큰 소동, 분란을 일으킨다.’라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신약에서도 탕자의 형은 성실하고 헌신적이지만 바람직한 모습으로 그려지진 않습니다. 그러나 장자에게는 많은 부분 무거운 의무와 책임감이 주어집니다. 장자라서 부과되는 고생이 있는데, 그것을 인정받지 못하니 분노합니다. 그래서 ‘형’들의 불만과 빈정거림이 한편 이해되기에 안쓰럽습니다.

그런 점에서 현대인은 모두 장자입니다. 첫째가 되어야 살아남고, 살아남기 위해 경쟁자를 제압합니다. 누군가 쓰러짐을 보며 나도 그럴지 모른다는 불안을 느끼며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하고 눈감아 버립니다. 어쩌면 종교마저도 그 시스템에 눈감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지켜주지 않으면 ‘나’도, ‘우리’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장자가 되려는 마음, 인정받고 싶은 마음, 많이 가져야겠다는 마음이 앞서면 그럴 수 없습니다. 너도나도 장자이어야만 하는 세상입니다. 그래서 가장 좋은 것을 골라서 예물로 드렸다는 아벨처럼 타자를 향한 친절과 환대, 사랑과 보듬음이 꼭 필요한 세상입니다.

 

악을 이기는 법

묵상 25일째(3월 25일 수요일)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이 선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려고 애쓰십시오.(로마서 12:21)

악의 승리는 선을 파괴하는 것이 아닙니다. 악의 최종적 승리는 악으로 선을 물들여 변질시키는 것입니다. 선이 악을 닮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악의 승리를 역사 속에서 안타깝고 고통스럽게 목격해 왔습니다. 어제의 선이 오늘의 악이 되고, 과거의 피해자가 현재의 가해자가 되는 비극이 인류 역사에 서 반복되어 왔습니다. 이처럼 잔인하고 교활한 악을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요? 악에게 달려들어 악과 똑같이 싸우는 것일까요? 무력으로 악을 무릎 꿇려 선의 승리를 선포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은 악의 승리일 뿐입니다. 악을 이기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악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선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어둠을 이기는 가장 좋은 길, 유일한 길은 어둠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작은 촛불이 되어 빛을 내는 것입니다.

 

진실의 힘

묵상 24일째(3월 24일 화요일)

“그의 안에서 생겨난 것은 생명이었으니, 그 생명은 모든 사람의 빛이었다.”(요한복음서 1:4)

“진실이 신발을 신는 동안 거짓은 지구 반 바퀴를 돈다.” 어느 책에서 우연히 본 구절인데, 거짓의 파급력을 이보다 잘 표현할 수는 없을 듯합니다.

어떤 진실은 하루만에도 얼굴을 드러내지만 어떤 진실은 제 모습을 드러내는 데 천년이 걸리기도 합니다. 주인공이 사라지고 없는 시대의 진실은 어디에서 보상 받아야 하나 억울해질 때가 있습니다. 주인 잃은 진실이, 때늦은 지각 진실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무력감도 아닌 좌절감도 아닌 그렇다고 자괴감도 아닌 그 무엇이 모든 것을 뒤흔들어 놓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한 번 더 생각해보면, 이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아니라 실로 어마어마한 것입니다. 진실이라는 것은 한순간에 세상을 바꾸어 놓을 만큼 강한 힘을 발휘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누군가의 한마디 거짓말에 쉽게 덮이기도 할 만큼 가진 힘이 일천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천년 만에 돌아온 진실은 어떻게 그 길을 찾은 것일까.

이는 그 진실을 위해 천년을 싸운 사람들이 있었다는 말이 아닌가. 천년 진실의 힘은 바로 이 런 것입니다. 거짓은 갈수록 힘을 잃지만 진실은 갈수록 빛을 발합니다. 회색 구름이 짙게 깔려도 온 천하를 비추는 햇빛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이름이 그리스도인이기를 빌어 봅니다.

 

악마와 성경

묵상 23일째(3월 23일 월요일)

그래서 악마는 예수를 예루살렘으로 이끌고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그에게 말하 였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여기에서 뛰어내려 보아라. 성경에 기록하기를 ‘하나 님이 너를 위하여 자기 천사들에게 명해서, 너를 지키게 하실 것이다’ 하였고 또한 ‘그 들이 손으로 너를 떠받쳐서, 너의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할 것이다’ 하였다.”(누가복음서 4:9-11)

서양 공포영화를 보다 보면 가끔 신부나 목사가 악마에게 성경을 들이대며 물리치는 장면이 나옵니다. 문자 그대로 ‘거룩한 경전’인 성경(聖經)의 능력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대중적 믿음을 반영합니다. 하지만 정작 성경에는 악마가 성경을 자유롭게, 자의적으로 활용하는 이야 기도 있습니다.

유명한 예수님의 ‘광야 시험’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돌로 빵을 만들어보라는 악마의 첫 번째 유혹을 예수님이 “성경에 기록하기를 ‘사람은 빵 만 먹고 사는 것이 아니다’ 하였다.”(눅 4:4)면서 성경 말씀을 들어 물리치시자 영악한 악마는 자기도 똑같이 “성경에 기록하기를”이라는 단서를 붙여 예수님을 다시 유혹합니다.

악마도 성경을 읽고 자신의 악한 목적을 위해 성경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손에 들고 있다고 해서, 성경 말씀을 줄줄 외운다고 해서, 성경에 대한 지식이 풍부하다고 해서, 모두 성인(聖人)이나 천사인 것은 아닙니다. 성경을 들고 말하는 이가 어떤 존재인지, 그 의도와 목적이 무엇인지 우리가 깨어 분별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거기에서 나를 만날 것이다

묵상 사순절 넷째 주일(3월 22일 주일)

여자들은 무서움과 큰 기쁨이 엇갈려서, 급히 무덤을 떠나, 이 소식을 그의 제자들에게 전하려고 달려갔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께서 여자들과 마주쳐서 “평안한가?” 하고 말씀하셨다. 여자들은 다가가서, 그의 발을 붙잡고, 그에게 절을 하였다. 그 때에 예수께서 그 여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무서워하지 말아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러면 거기에서 그들이 나를 만날 것이다.”(마태복음서 28:8-10)

한 장애인 시설에서 봉사하고 돌아온 청년들이 자랑스레 이야기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잘 하고 왔다는 자부심이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이야기 듣고 있던 한 사람이 끼어들었습니다.

“당신들은 잘못 알고 있어. 당신들이 예수를 전하려고 거기 갔다면 오산이야, 예수님은 애초에 거기 그들과 함께 계셨는데 당신들이 예수를 보러 간 거지. 예수는 이전부터 거기 있었던 거야.”

슬며시 웃음이 나왔습니다. 이 사람은 불교 신자인데 세월호 예배에 꾸준히 참석하면서 설교를 듣더니 기독교를 제대로 이해했네요. 예수가 누구이며 어디 있는지 안다면 다 아는 거 맞지요? 그래도 이 사람, 자기는 불교 신자라고 매번 강조합니다.

 

“섬 사람들이 우리에게 특별한 친절을 베풀어 주었다”

묵상 22일째(3월 21일 토요일)

백부장은 바울을 구하려고 병사들의 의도를 막고, 헤엄 칠 수 있는 사람들은 먼저 뛰어내려서, 뭍으로 올라가라고 명령하였다. 그리고 그 밖의 사람들은 널빤지나, 부서진 배 조각을 타고 뭍으로 나가라고 명령하였다. 이렇게 해서, 모두 뭍으로 무사히 나오게 되었다. 우리가 안전하게 목숨을 구한 뒤에야, 비로소 그 곳이 몰타 섬이라는 것을 알았다. 섬사람들이 우리에게 특별한 친절을 베풀어 주었다. 비가 내린 뒤라서 날씨가 추웠으므로, 그들은 불을 피워서 우리를 맞아 주었다.(사도행전 27:43-28:2)

사도 바울이 탄 배가 난파하기 직전, 병사들은 배에 탄 죄인들을 죽이려는 계획을 짰습니다. 공권력이 상황을 제어하기 힘든 경우에는 기결이든 미결이든 죄수를 죽이는 것이 규칙이었습니다. 바울은 거친 풍랑에, 또 잔혹한 제도에 의해 죽임에 처하게 됐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백부장이 바울을 구할 마음으로 자기의 권한 내에서 모종의 조치를 취했음을 알려줍니다. 또 몰타 섬사람은 특별한 친절을 베풀어 바다에서 살아나온 이들에게 안식을 제공합니다.

데이비드 테이어스 1세가 그린 “몰타에서 바울의 기적(Miracle of St Paul on the Island of Malta)”이란 그림은 마치 두 개의 작품을 겹쳐 놓은 느낌을 줍니다. 한쪽은 바울이 뱀에 물리는 장면이, 한쪽은 마을 사람이 베푸는 환대의 장면입니다. 사람들은 위대한 사도 바울의 기적에만 초점을 맞추어 꽤 오랫동안 열광했지만, 이 그림은 바울의 삶에 숨어 있는 많은 도움과 친절이 위대한 기록의 힘임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섬에는 바울의 놀라운 기적과 일상의 기적이 동시에 일어났습니다.

인류는 과거에 비해 엄청나게 많은 힘을 갖게 됐지만 따듯한 인정을 주고받으며 살아가는 능력은 상실하고 있습니다. 친절은 인간을 편히 숨쉬게 하고 행복하게 만드는 힘입니다.

 

함께 웃는 것이 평화입니다

묵상 21일째(3월 20일 금요일)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않는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았더라면, 너희가 죄 없는 사람들을 정죄하지 않았을 것이다.”(마태복음 12:7)

독일 문학계의 거장으로 꼽히는 슈테판 츠바이크는 마르틴 루터를 앞세운 나치의 폭력을 피해 망명을 떠나며 마지막 작품의 주인공으로 16세기 인본주의자 에라스무스를 선택했습니다. 에라스무스는 사제였고 신학자였고 유머를 멋지게 구사할 줄 아는 최고의 문인이요 지성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시대는 멋진 유머와 재치 있는 낭만과 관용의 언어를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광기와 광신과 폭력으로 얼룩진 시대의 혼돈 속에서 극단을 강요하는 모든 선택을 포기함으로써 가톨릭과 개혁파 사이에서 평화와 자유와 휴머니즘을 지켜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더욱 바랐던 것은 제자들이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신발과 여행 보따리를 버려두는 것은 물론입니다. 다만 칼을 준비하라 했는데, 이는 도적들과 살인자들에게 소용되는 칼이 아니라 영혼의 칼이라, 마음속 깊은 곳에 소중히 간직할 칼이라, 이로써 가슴 속에 자라나는 온갖 고통을 자르며 마음속에는 오로지 사랑만을 섬기게 할 칼이었습니다. 교회학자는 칼을 박해에 대한 자기방어로 해석하며, 여행 보따리를 여행을 위한 충분한 비축으로 해석합니다. 포악한 자가 아니라 온유한 자라야 행복할지니 악행에 대항하지 말라 가르친 것과, 참새와 나리꽃을 따르라 한 것을 까맣게 잊고, 이제는 제자들이 칼 한 자루 없이 길을 나서는 것이 싫어 속옷이라도 팔아 칼을 구입하라 명합니다.” - 《우신예찬》, 1511

휴머니즘은 이념과 종교의 틀에 갇히지 않는 인류의 보편가치입니다. 휴머니즘이 사라지는 순간 모든 혁명은 잔인한 폭력이 되고, 모든 종교는 집단파멸을 부르는 광기가 됩니다.

"사랑이 없으면"

묵상 20일째(3월 19일 목요일)

내가 사람의 모든 말과 천사의 말을 할 수 있을지라도, 내게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징이나 요란한 꽹과리가 될 뿐입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내 모든 소유를 나누어줄지라도, 내가 자랑삼아 내 몸을 넘겨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는 아무런 이로움이 없습니다.(고린도전서 13:1-3)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의 찬가’라는 애칭을 갖고 있을 정도로 사랑의 의미를 시적이면서도 심오하게 조명해 줍니다. 하지만 같은 본문에서 우리는 인간은 사랑 없이도 고귀하고 영적이고 윤리적으로 보이는 일을 할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으며 정신이 퍼뜩 듭니다.

우리는 사랑 없이도 천사의 말을 할 수 있고, 사랑 없이도 예언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랑 없이도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을 가질 수 있고, 사랑 없이도 자선을 베풀 수 있습니다. 사랑 없이도 우리의 전 재산을 이웃에게 줄 수 있고 심지어 우리 몸마저 내어줄 수 있습니다.

물론 이 모두는 외적으로는 세상의 칭송을 받을 만한 고귀한 선행일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인간의 모든 선한 마음과 태도와 언행도 사랑이 없으면 무의미하고 무가치하고 무익하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타적으로 보이는 우리의 행위에 속으로는 이기적인 자아가 달라붙어 있지 않은지 스스로 묻고 경계해야 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묵상 19일째(3월 18일 수요일)

요한이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어떤 사람이 선생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우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우리는 그가 그런 일을 하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셨다. “막지 말아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너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누가복음서 9:49-50)

요즘도 그렇지만 평범하지 못한 일들이 예수님 당시에도 많았나 봅니다. 성경에 나타나는 귀신의 모습은 사람의 어려워진 삶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사람들과 어우러질 수 없어 무덤가에 사는 모습입니다. 전설에 등장하는 한국의 귀신은 대부분 원귀입니다. 사회의 부조리로 억울하게 죽임당한 이들이며 심리적, 사회적 구제가 뒤따라야 한다는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귀신들린 사람은 귀신의 지배를 벗어나 자신이 살던 마을로 복귀합니다. 요한은 제자가 아닌 이가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행위를 금지했지만, 예수님은 그렇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치유받고, 다시 가족들 품에 돌아간다면 그것이 평화이기 때문입니다.

화평하게 하는 사람이며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마 5:9). 꼭 그리스도인이 아니더라도 정의와 평화를 위해 수고하는 이들이 많아서 참으로 다행입니다. 우리도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친절, 자비, 환대 그리고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의 의미

묵상 18일째(3월 17일 화요일)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서로 수군거리며 말하기를 “이 사람이 죄인들을 맞

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구나” 하였다.(누가복음서 15:2)

 

예수님은 자주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로 묘사됩니다. 사회적으로 지탄받는 이와 음식을 함께 먹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학교에서 따돌림받는 친구를 돕다가 같이 따돌림받는 경우도 많습니다.

사람을 죄인과 의인으로 구분하여 보는 그들과 달리 예수님은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셨기 때문에 그들의 미움을 사게 되었습니다.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성별, 외모, 출신, 직업, 종교, 취향 등으로 어떤 사람을 평가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가수 홍순관은 쌀 한 톨에는 바람과 천둥, 비와 햇살, 농부의 새벽도 숨어 있어서 그 작은 한 알의 무게는 생명의, 평화의, 농부의, 세월의, 우주의 무게라고 노래했습니다.

사람에게도 쌀 한 톨에 담긴 의미 정도는 있습니다. 식사 전에 감사 기도로 그 의미를 새길 줄 안다면, 사람을 가볍게 대해서도 안 됩니다. 그를 만드신 하나님의 손길이 그의 존재에 깃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적의 내밀한 역사”

묵상 17일째(3월 16일 월요일)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여라” 하고 이른 것을, 너희가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만,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것이다.(마태복음서 5:43-45a)

그리스도인이 추구하는 ‘원수 사랑’의 이상은 아름답고 고상합니다. 하지만 이상이 너무 크고 높으면 현실과 더 큰 괴리가 생깁니다. 그래서 원수를 사랑하는 데 실제로 필요한 것은 ‘이상’이 아니라 ‘이해’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우리의 원수가 우리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은 존재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는 “적의 내밀한 역사를 이해하면 적을 미워할 수 없게 된다.”고 했습니다. 원수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두려움과 무지 때문에 타인을 경계하며 의심하는 존재입니다.

우리도 불운하고 불행한 삶의 조건과 환경에서 살다 보면 우리의 원수처럼 모질고 사나운 존재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 사실을 이해하면 여전히 원수를 사랑할 수 없을지는 몰라도 최소한 무작정 원수를 미워할 수는 없게 됩니다. 미움을 버리는 순간 원수는 더 이상 원수가 아니게 됩니다. 적의 내밀한 역사, 원수의 살아온 이야기를 귀 기울여 경청하고 이해하는 것은 원수 사랑의 시작이며 기본입니다.

 

진심으로 정성을 다해서

묵상 3월 셋째 주일(3월 15일)

“그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인자가 올 것이기 때문이다. 누가 신실하고 슬기로운 종이겠느냐? 주인이 그에게 자기 집 하인들을 맡기고, 제때에 양식을 내주라고 시켰으면, 그는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마태복음 24:44-45)

유학 문화권에서 오래 살아온 한국인들은 충효를 중요한 덕목으로 여깁니다. 국가와 가정을 지탱하는 중요한 덕목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점은 유학은 왕이나 부모가 백성이나 자녀들에게 충과 효를 강요하는 것은 정도(正道)가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왕은 백성에게 은덕을, 부모는 자녀에게 사랑을 베풀어야만 합니다. 그에 대하여 충으로, 효로 답하는 것이 맞다고 가르칩니다.

그런 점에서 충과 효의 본질은 위계질서가 아닌 사람 사이의 관계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웃에게 어떤 말로 다가섭니까? 상대가 먼저 친절을 베풀기를, 상대가 먼저 굽히기를 기다리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인은 충성, 그리고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정성으로 이웃에게 먼저 다가서는 사람입니다.

 

십계명과 부모 공경

묵상 16일째(3월 14일 토요일)

너희 부모를 공경하여라. 그래야 너희는, 주 너희 하나님이 너희에게 준 땅에서 오래도 록 살 것이다.(출애굽기 20:12)

초월적 하나님께서 직접 주신 십계명에 “부모를 공경하여라.”라는 인간적 계명이 포함되어 있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런데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은 있지만 자녀를 사랑하라는 계명은 없는 것에 놀라는 이들은 거의 없습니다. 왜일까요? 부모의 자녀 사랑은 ‘도덕적 의무’라기보다는 거의 ‘자연적 본능’에 가까운 것이어서 계명이 따로 필요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누가 강요하거나 명령하지 않아도 부모는 본능적 사랑으로 자식을 낳고 돌보고 기릅니다. 반면, 예나 지금이나 부모의 무조건적 사랑과 은혜를 망각하고 부모에게 무심하고 무례하게 대하는 자녀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랍비 아브라함 조슈아 헤셸은 “한 부모는 열두 자녀를 기를 수 있지만 열두 자녀는 한 부모를 모시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고통의 시대에도 어미 새가 날개 밑에 아기 새를 품어 기르듯 희생과 헌신으로 자녀를 돌보며 길러온 부모를 공경하고 사랑하는 것이 자녀의 ‘본능’은 아니어도, 최소한 자녀의 ‘본분’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이 된다는 것은

묵상 15일째(3월 13일 금요일)

여러분은 옛 사람을 그 행실과 함께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십시오. 이 새 사람은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형상을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져서, 지식에 이르게 됩니다. 거기에는 그리스인도 유대인도, 할례자도 무할례자도, 야만인도 스구디아인도, 종도 자유인도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모든 것이시요, 모든 것 안에 계십니다.(골로새서 3:9b-11)

 

이민 국가인 미국은 다문화사회입니다. 약 3년 전부터 DNA 여정(the DNA journey)이 파장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DNA 검사를 통해 자신의 외모에 감춰진 이야기에 경악하는 동시에 자신의 편견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제작된 홍보물에는 세계 각지에서 모인 67명의 참가자가 나옵니다. 이들은 DNA 검사 전, 다른 민족이나 나라 사람들에 대한 이미지를 구술하는데, 대부분 어떤 부정적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눈길을 끄는 장면은 쿠르드 여성 엘라하(Ellaha)의 이야기입니다. 쿠르드족인 그녀는 이란, 특별히 터키 정부에 대해서 부정적입니다. 쿠르드인들을 속이고 힘겹게 한 나라입니다. 그러나 DNA 검사를 받아든 날, 그녀는 자신의 DNA 중 79%가 이란인과 터키인과 일치함을 알고 깜짝 놀랍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그녀와 사촌 사이라고 99.6% 확실할 수 있는, 태어나서 처음 만난 터키인 와쉬도 있습니다. 눈물이 흐르고 놀라움이 교차하는 중에 메시지가 전달됩니다. “자신이 속한 다양한 뿌리를 알게 된다면 극단주의자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겁니다.”

DNA 검사를 통하지 않고서도 “모든 사람들에게 차별이 없다”는 야고보의 말을 기억합니다. 얼굴색이나 문화 등이 달라도 누군가를 향한 연민과 살필 줄 아는 넉넉한 마음만으로도, 우리는, 다름도 아름다움을 충분히 알기 때문입니다.

 

“서로 관용과 자비를 베풀어라”

묵상 14일째(3월 12일 목요일)

주께서 스가랴에게 말씀하셨다. “나 만군의 주가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공정한 재판을 하여라. 서로 관용과 자비를 베풀어라.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가난한 사람을 억누르지 말고, 동족끼리 해칠 생각을 하지 말아라.”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으나, 사람들은 듣지를 않고, 등을 돌려 거역하였다. 귀를 막고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마음이 차돌처럼 굳어져서, 만군의 주께서, 이전 예언자들에게 당신의 영을 부어 전하게 하신 율법과 말씀을 듣지 않았다. 그래서 만군의 주께서 크게 노하셨다. 주께서 부르셨으나, 그들은 듣지 않았다. “그렇다. 이제는 그들이 부르짖어도, 내가 결코 듣지 않겠다.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나는 그들이 알지도 못하는 모든 나라로, 그들을 폭풍으로 날리듯 흩었고, 그들이 떠난 땅은 아무도 오가는 사람이 없어서, 폐허가 되고 말았다. 그들이 아름다운 이 땅을 거친 땅으로 만들었다.”(스가랴서 7:8-14)

 

서로 다른 문화를 지닌 민족인 문화 집단이 하나의 공동체 속에서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서로에게 ‘관용과 자비’를 베풀려는 풍토일 것입니다.

“관용”은 인간의 불완전함을 전제로 합니다. 다른 사람의 의견이 나와 다르다고 비난하거나 부정할 것이 아니라 나 자신도 불완전하고 다를 수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의견을 경청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관용의 기본 정신입니다. 관용이 부족할 경우 오직 자신의 생각만이 옳을 것이며 자신의 문화만이 우월하다고 주장하게 됩니다.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가난한 사람을 억누르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을 “사람들은 등을 돌려 거역”하였고, 주님은 더이상 우리가 “부르짖어도 듣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폐허”로 만들지, 포용의 사회로 가꾸어 나갈지 주님께서 스가랴에게 하신 말씀을 묵상해 봅니다. 

 

차이를 품는 일치

묵상 13일째(3월 11일 수요일)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을 거룩하게 하여

주시며, 그 나라를 오게 하여주시며, 그 뜻을 하늘에서 이루신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

어 주십시오.”(마태복음 6:9-10)

 

개신교와 천주교가 만나서 신구교 ‘그리스도인 일치기도회’를 할 때는 여러 면에서 서로에 대해 많이 배려합니다. 주기도문을 암송하는 순서가 되면 사회자는 친절하게 안내해 줍니다.

“각자 교회에서 쓰는 주기도문을 암송하시면 됩니다.”

나직한 소리로 다양하게 주기도문을 암송하는 그 소리가 참 좋습니다. 자신의 신앙고백을 바치면서도 옆 사람에게 방해되지 않으려고 소리를 줄이는 배려가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차이가 있어도 그것이 서로를 방해하지는 않았습니다. 일치는 다양함을 담고 있어서 아름답습니다. 

 

경쟁, 독점에서 상생, 공유로

묵상 12일째(3월 10일 화요일)

“‘내가 살 집을 넓게 지어야지. 누각도 크게 만들어야지’ 하면서 집에 창문을 만들어 달고, 백향목 판자로 그 집을 단장하고, 붉은 색을 칠한다. 네가 남보다 백향목을 더 많이 써서, 집 짓기를 경쟁하므로, 네가 더 좋은 왕이 될 수 있겠느냐? 네 아버지가 먹고 마시지 않았느냐? 법과 정의를 실천하지 않았느냐? 그 때에 그가 형통하였다. 그는 가난한 사람과 억압받는 사람의 사정을 헤아려서 처리해 주면서, 잘 살지 않았느냐? 바로 이것이 나를 아는 것이 아니겠느냐? 나 주의 말이다.”(예레미야서 22:14-16)

 

‘경쟁’에 쓰이는 한자어 ‘競’은 두 사람이 다투는 모습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앞글자가 옆에 있는 글자의 다리를 거는 모습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무한한 경쟁이 인간 문명을 발전시킬 수 있다는 환상이 깨져 이제는 공동체의 정신을 회복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말과 달리 현실은 여전히 무한경쟁의 시스템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다리를 거는 자와 거기에 걸려 넘어지는 자만이 존재하는 세상은 그야말로 비극입니다.

독일의 철학자 테오도어 아도르노는 경쟁은 근본적으로 인간적인 교육에 반하는 원리라고 말했습니다. ‘상생’의 ‘相’에 본래 ‘자세히 보다’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음을 기억한다면, ‘경쟁’에서 ‘상생’으로 나아가기 위한 전환점에서 우리는 지금 서로를 자세히, 찬찬히 살펴봐야 하겠습니다.

개인과 사회의 회심과 결단이 필요합니다. 경쟁의 대상에서 상생의 친구로, 밟고 밟히는 관계에서 존중과 공유의 관계로. 광장의 외침과 우리 일상의 실천이 다르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잘 갈등하는 법

묵상 11일째(3월 9일 월요일)

“누가 누구에게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용납하여 주고, 서로 용서하여 주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과 같이,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골로새서 3:13)

 

공동체를 소개하는 어느 책의 부제가 흥미로우면서도 의미심장합니다. “혼자는 외롭고 함께는 괴로운 사람들…” 딱 우리 사는 모습입니다. 남과 함께 사는 것은 한편으로는 즐거운 일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고단한 일이기도 합니다. 다른 생각과 성향과 습관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다보면 갈등을 겪기 마련이고 그로 인해 상처도 입기 때문입니다.

교회도 예외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공동체에서도 제자들 가운데 다툼이 있었고 초대교회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 갈등이 싫어 공동체를 피하거나 떠나고 싶기도 합니다.

그럴 때면 바닷가의 자갈들을 떠올려 봅니다. 지금은 둥글둥글한 자갈들도 처음에는 모나고 울퉁불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수백 년, 아니 수천 년 동안 달과 바람과 바다가 보내 준 파도에 무수히 서로 부딪치고 깨어지면서 지금의 반질반질한 모습이 되었습니다.

갈등을 피할 수 없다면 잘 갈등하는 법을 배워야겠지요. 갈등할 때마다 서로 용납하고 용서한다면, 우리도 바닷가 자갈들처럼 단단하면서도 부드러운 존재로 성숙할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의 죄를 알게 하소서

사순절 둘째 주일(3월 8일)

그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제비를 뽑아서, 예수의 옷을 나누

어 가졌다.(누가복음서 23:43)

 

대구ncc인권위원회가 마련한 가난한 이들의 기도회 시간에 대구416연대 봉사자인 한 선생님은 이렇게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세월호 참사로 누나를 읽은 동생이 군인이 되었습니다. ‘나라는 누나를 지켜주지 않았는데, 나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군대에 가야 하느냐?’라고 엄마에

게 물었다는 의찬이가 짧은 머리 군인이 되었습니다. 의찬이가 부모님의 품으로 안전하게 돌아올 때까지 건강하고 무탈하도록 지켜주십시오.”

이어서 한 선생님은 5년이 지난 지금도 한 움큼의 약을 먹어야 하는 부모들의 소리 없는 비명을 들어주시길, 아들 곁으로 스스로 찾아간 승환아버지가 이제는 아들과 함께 편히 쉴 수 있도록 해 달라 하고, 기타 연주를 좋아했던 아들 생각에 기타만 봐도 눈물을 쏟던 승묵아버지의 눈물을 닦아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의 죄를 알게 하시고, 우리의 죄를 용서 받을 수 있는 날이 오게 하소서.” 하고 기도를 마쳤습니다.

대구의 서 목사님도 여든 생신에 축하 인사를 받으시면서 세월호 아이들이 생각나서 힘들다며 눈물을 삼켰습니다. 아이들은 갔는데 늙도록 살아있는 것이 미안하고 부끄럽다 하십니다. 우리 모두 살아있는 것이 죄스러운 시대를 삽니다.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 아닌지”

묵상 10일째(3월 7일 토요일)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않은지 살펴보아라.”(누가복음서 11:35)

빛이 어떻게 어두울 수 있을까요? “빛이 약하다”거나 “빛이 강하다”는 표현은 자연스러운데 “빛이 어둡다”는 표현은 왠지 이상하고 어색합니다. 영어 성서(NRSV)에는 “Consider whether the light in you is not darkness.”로 적혀 있습니다.

여기서 상태를 나타내는 be동사 ‘is’가 중요해 보입니다. 빛이 어둠의 상태라는 의미입니다. 한글 공동번역 성서는 영어성서와 같은 의미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 아닌지 잘 살펴보아라.”

우리 안의 빛이 사실은 어둠일 수도 있다는 충격적 가르침입니다. 그것은 정의를 말하면서 독선적인 자기의(自己義)에 사로잡히는 것, 평화를 외치면서 마음은 전쟁터와 같은 것, 선한 일을 하면서 속으로는 명예를 탐하는 것, 고독을 실천하면서 자기만의 내적 평화를 욕망하는 것입니다.

악마의 한 이름인 ‘루시퍼(Lucifer)’의 라틴어 의미는 “빛을 가진 자”입니다. 늘 깨어서 우리의 빛이 어둠이 아닌지 묻고 또 물어야 합니다.

 

“일이 잘못 되었소”

묵상 9일째(3월 6일 금요일)

“하나님은 자비가 넘치는 분이셔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으로, 범죄로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려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그분과 함께 살리시고, 하늘에 함께 앉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로 베푸신 그 은혜가 얼마나 풍성한지를, 앞으로 올 모든 세대에게 드러내 보이시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구원이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님은, 아무도 그것을 자랑할 수 없게 하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선한 일을 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준비하신 것은, 우리가 선한 일을 하면서 살아가게 하시려는 것입니다.”(에베소서 2:4-10)

“1950년 여름, 국군이 인민군을 막기 위해 낙동강에서 최후의 방어선을 펴고 버티고 있는데 피난민들은 결사적으로 강을 먼저 건너려고 아우성이었답니다. 군인과 경찰은 후방의 치안확보와 질서유지를 위해 이들의 신분조사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신분이 확인된 사람에게 우선적으로 도강을 허용했는데 기독교인이 확인되면 우선권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를 안 대구 ○○교회의 박인서 장로는 한탄하면서 ‘일이 잘못 되었소, 기독교인은 언제 어디서 죽어도 구원 받고 천국 갈 사람이니 꼴찌로 하고 불신자를 먼저 피난시켜 예수 믿고 구원받을 기회를 주어야 하오.’ 하며 이를 어디서나 주장하였다 합니다.” - 출처 : 《대구남산교회70년사》

지금 한국교회가 많이 잘못된 것 같아 마음이 아픕니다.

 

이유 있는 추락

8일째(3월 5일 목요일)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심하겠느냐?”(마태복음서 6:2)

빛이 되어야 할 교회가 세상을 더 어둡게 합니다. 소금이 되어야 할 교회가 부패의 싹을 키워 세상을 더 어지럽힙니다. 평화의 일꾼이 되어야 할 교회가 세상에 갈등을 더합니다. 걱정을 덜어야 할 교회가 세상에 걱정거리를 더해줍니다. 우리 안에 빛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빛이 가장 필요한 곳은 이제 세상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가장 어두운 곳도 등잔 밑이 아닌 우리의 발밑입니다. 너무 밝은 것만 좇다가 그만 그 빛에 눈이 멀어버렸나 봅니다. 나치 시대와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교회도 그랬습니다. 용기 있는 독일 기독교인들이 정직한 성찰로 침묵을 깨뜨렸습니다.

1947년 독일 개신교회 형제 모임이 발표한 고백문의 일부입니다. 2020년 한국교회를 향한 메시지로 읽어도 무방해 보입니다. “과거를 미화하는 환상과 또다시 전쟁이 올 것이라고 망상하는 짓을 버리고, 오히려 좀 더 나은 나라를 건설하기 위하여 우리들의 자유와 책임을 투입해야 합니다. 그래서 정의와 복지와 사회적 평화에 도움이 되 고 이웃나라들과 화해하는 데 봉사해야 합니다.”

사람이 무너지는 것은 누군가 쓰러뜨리기 때문이 아닙니다. 사람은 스스로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스로 무너지는 순간 야수의 본능만 남습니다. 교회가 추락하는 것도 누군가가 쓰러뜨렸기 때문이 아닙니다. 위기는 밖이 아니라 안에서 옵니다. 길이 보이지 않는 것도, 교회가 길을 잃은 것도 세상이 더 어두워져서가 아니라 내 안에 빛이 빠르게 소멸해가기 때문입니다. 없는 적을 만들기보다 나를, 우리를 먼저 살펴야 하는 이유입니다.

 

예물을 드리기에 앞서

7일째(3월 4일 수요일)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제물을 드리려고 하다가, 네 형제나 자매가 네게 어떤 원한을 품고 있다는 생각이 나거든, 너는 그 제물을 제단 앞에 놓아 두고, 먼저 가서 네 형제나 자매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제물을 드려라.”(마태복음서 5:23-24)

 

현대인들은 바쁩니다. 짧아진 식사 시간만큼 대화가 줄고, 효율화된 업무 시스템처럼 인간 관계망도 줄어들었습니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아픕니다. 질병에 따른 치료법은 많아졌어도 마음은 더 아픕니다.

성경은 안식일에, 예물을 드리기에 앞서 형제와 화목해야 한다고 합니다. 어려운 일입니다. 얼굴을 찌푸리지 않는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기보다 대면해 서 자신의 잘못을 청하는 일이 더 어렵습니다. 자존심 때문에, 나처럼 화났을 그 마음이 읽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영화 “밀양”에서처럼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셀프 용서’를 선택하게 됐을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겸손히 하나님의 창조에 동참한다면, 우리는 매일을 창조의 시간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사람들과 관계로 인한 아픔을 가장 창조적인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예물을 드리기에 앞서, 즉 예배를 드리기에 앞서 친구와 이웃, 그리고 창조 세계와 용기 내어 화해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성경을 배우게 해주세요”

6일째(3월 3일 화요일)

마지막 때에, 주의 성전이 서 있는 산이 모든 산 가운데서 으뜸가는 산이 될 것이며, 모

든 언덕보다 높이 솟을 것이니, 모든 민족이 물밀듯 그리로 모여들 것이다. 백성들이

오면서 이르기를 “자, 가자. 우리 모두 주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의 하나님이 계신 성

전으로 어서 올라가자. 주께서 우리에게 주의 길을 가르치실 것이니, 주께서 가르치시

는 길을 따르자” 할 것이다. 율법이 시온에서 나오며, 주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 나온

다.(이사야서 2:2-3)

 

선교사들이 한국에 와서 복음을 전하자 현실과 이상(理想) 모두에 목말라 있던 조선인들은 성경을 더 읽고 싶어 모여들었습니다. 희망은 조선의 절망만큼이나 깊고 간절했습니다. 새로운 세계를 꿈꾸며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로 교회는 수년이 안 되어 부흥을 더했습니다.

1901년 선교사를 돕는 한국인 봉사자를 양성하고자 시작한 사경회(Bible Class)는 이름 그대로 성경을 가르치는 자리였고 전도자 훈련반, 제직 훈련반들이 생겨났습니다. 여자들도 배우고 싶어 졸랐습니다. “우리도 성경공부하게 해주세요.”

1902년에 여덟 명의 여자들로 시작하여 바로 이듬해 600-700명! 1913년에는 대구여자성경학교가 설립되었습니다. 많은 여성들이 몰려들자 대구 선교부는 경북 여러 지방(16개 지방)으로 분산하여 사경회를 운영했습니다. 교회 지도자반과 교사 양성반도 생겼습니다. 특히 농촌 선교를 위한 여성 훈련이 강조되었고 사경회는 여전도회 연합회의 주요 사업으로 자리 잡습니다. 초기 한국교회는 이렇듯 성경에 기초하여 성장하였습니다. 지금과는 다르게 말입니다.

 

하나님의 외침

5일째(3월 2일 월요일)

빌라도는 다시 예수께 물어 말하였다. “당신은 아무 답변도 하지 않소? 사람들이 얼마

나 여러 가지로 당신을 고발하는지 보시오.” 그러나 예수께서는 더 이상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빌라도는 이상하게 여겼다.(마가복음서 15:4-5)

 

우리 교회 집사님 남편이 오랜만에 교회에 나왔습니다. 성서를 읽고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그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혹시 하나님이 우리에게 소리쳐 말하고 계신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저는 우리가 안 듣는 것일 뿐 하나님은 그러신다고 생각해요. 그런데도 우리는 기도하고 조르기만 할 뿐이지요.”

그의 말을 들으며 한영애 씨가 부른 ‘조율’이라는 노래도 생각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많이 부탁하고 요청하실 텐데 귀 기울이지 않았구나 싶었습니다. 우리가 듣지 않아서 아들을 보내신 건데, 이 아들을 죽였으니 참 가슴 칠 일입니다.

다시 살펴보니, 하나님의 외침이 도처에서 들리는 듯합니다.

 

희망가

2020년 한국기독교 부활절맞이 묵상(3월 1일)

“제왕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사람들을 높이셨습니다. 주린 사람들은 좋은 것으로 배부르게 하시고, 부한 사람들을 빈손으로 떠나보내셨습니다.”(누가복음서 1:52-53)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니 희망이 족할까.”(희망가)

마리아 찬가는 희망가입니다. 식민지의 딸로 태어난 마리아는 당차고 강인한 신앙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는 로마 식민 시대의 억압적 상황에서 보란 듯이 의의 승리를 이루는 신의 자비하심을 노래합니다. 폭압 정치로 민중을 도탄에 빠뜨린 압제자들을 반드시 벌하고 비천한 삶을 강요받는 민중들을 다시 일으켜 새 시대를 열어갈 하나님의 역사를 확신에 찬 목소리로 노래합니다. 민족의 해방역사를 소환하여 제국의 폭력성을 고발한 것은 예언자의 목소리 그 자체입니다.

예수님은 그냥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그의 희망가를 듣고 자란 예수님에게 십자가의 길은 분명 운명이었습니다. 우리의 희망가였던 3.1 독립선언서를 비밀리에 인쇄하고 전국에 보급하다가 투옥된 이종일 선생은 옥중일기인 《묵암비망록》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우리가 지금 일본에 압박과 탄압과 고문을 받고 있으나 그래도 희망을 걸 수 있다면, 우리의 민간정부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안도의 한숨을 돌리고 있지 아니한가. 새삼 그에 고마움을 표하고 싶다.”(1920년 8월 27일)

이제 새로운 100년이 시작되었습니다.

 

거기가 아닙니다 여기입니다

부활절맞이 묵상 4일째(2월 29일)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서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요한복서 12:24)

“민중(조국)이 고통당할 때 함께 아파하는 교회는 존경받습니다.”

엘살바도르의 고통 받는 민중들과 끝까지 함께 했던 오스카 로메로 주교의 말입니다. 군사 독재 정권의 무자비한 탄압에 비폭력 저항으로 맞선 로메로. 그를 두려워한 독재정권은 결국 총을 빼들었고, 1980년 3월 24일 미사집전 중인 그를 암살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비통’으로 남지 않고 ‘희망’이 되었습니다.

그의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선포할 의무를 가진 교회는 하나님의 계획을 파괴하는 모든 욕망과 거짓과 불평등과 폭력을 경계하고 비판하고 이를 막아내는 데 적극 나서야 한다, 이것이 바로 이 세상에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다.’ 그가 ‘희망의 예언자’로 기억되는 이유입니다.

40년 전 수백수천의 로메로를 낳은 1980년 광주의 역사는 여전히 우리에게 큰 아픔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고통 속에 심은 광주의 씨앗은 평화입니다. 그리고 평화는 정의의 열매입니다. 고통의 땅은 모두 성지입니다. 위대한 사랑은 고통의 땅으로 모이고, 그 둘이 한곳에 모일 때 우리는 거룩한 땅에 서게 됩니다.

해방신학자 김근수는 오스카 로메로를 추모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부자나 권력자와 가까이 지내다가 망가지지 않은 성직자를 나는 본 적이 없다. 가난한 사람들과 가까이 지내다가 회개하지 못한 성직자를 나는 본 적이 없다.”

농부는 오늘 심은 씨앗에서 반드시 새싹이 돋고 열매가 맺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삽니다. 믿음의 사람 오스카 로메로의 말입니다. “주교 한 명이 죽을지라도 하느님의 교회와 국민들은 결코 죽지 않습니다.”

 

흔들리며 가는 길

3일째(2월 28일)

“시몬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예수의 무릎 앞에 엎드려서 “주님, 나에게서 떠나 주십시

오. 나는 죄인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베드로와 그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은, 자기들이

잡은 고기가 엄청나게 많은 것에 놀랐던 것이다. 또한 세베대의 아들들로서 시몬의 동

료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다. 예수께서 시몬에게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누가복음서 5:8-10)

 

믿음이란, 지고지순하거나 불멸의 상태가 아닙니다.

믿음은 흔들리면서 가는 길이며, 지향하는 그 지향점을 지금 여기서 살아내는

일입니다.

아브람조차도 흔들렸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으면서도 말입니다. 하나님을 독대했던 바로 그날 밤에

그는 깊은 어둠과 공포에 짓눌렸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흔들릴 때마다 하

나님은 그를 위로하고 힘을 주셨습니다. 그의 흔들리는 믿음 위에 당신의 약속

을 심으셨습니다.

예수의 제자 베드로도 그렇게 흔들리며 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난한 베드로의 떨림에 하나님 나라의 씨앗을 심으셨습니

다. 꽃도 흔들리면서 핀다고 하더군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제공

하나님의 편

묵상 2일째(2월 27일 목요일)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이 가르침이 하나님에게서 난 것인지, 내가

내 마음대로 말하는 것인지를 알 것이다. 자기 마음대로 말하는 사람은 자기의 영광을

구하지만, 자기를 보내신 분의 영광을 구하는 사람은 진실하며, 그 사람 속에는 불의

가 없다.“(요한복음서 7:17-18)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하나님을 자기편으로 생각하고 주장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신앙이야 개인의 자유이지만, 지나친 자기 확신은 타자에 대한 부정과 폭력을 초래하기도 합니다. 특히 같은 그리스도인들끼리 정치적, 사회적으로 대립하며 갈등할 때는 문제가 더 심각해집니다. 하나님이 자신들의 편이라고 믿을수록 서로를 더욱 혐오하고 적대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미국의 남북전쟁 때, 하나님은 남과 북 중에 어느 편이냐는 질문을 받았던 에이브러햄

링컨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 관심은 하나님이 우리 편인가 아닌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가장 큰 관심은 하나님의 편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죽임이 아닌 생명의 편에 서는 것입니다. 전쟁이 아닌 평화의 편에 서는 것입니다. 불의가 아닌 정의의 편에 서는 것입니다. 주인이 아니라 노예의 편에 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선적으로 사랑하시는 사회적 소수자와 약자의 편에 서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도 우리 편이 되어 주십니다.

 

혼자라도 가야 할 길

묵상 1일째(2월 26일 수요일)

“그분은 해를 하늘 높이 뜨게 하셔서,

어둠 속과 죽음의 그늘 아래서 사는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게 하시고,

우리의 발을 평화의 길로 인도하실 것이다.”(누가복음서 1:79)

 

아는 것과 믿는 것은 다른 듯합니다. 우리는 어둠이 빛을 이길 수 없고, 공격과 비난으로 평화를 얻을 수 없음을 의심치 않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빛의 힘보다 어둠의 힘을 두려워합니다. 공격과 비난 앞에서 평화를 말하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라고 먼저 절망합니다.

예수님께서 깊은 고뇌 속에 받아든 고난의 잔은 평화의 길을 여는 성배입니다. 새로운 길은 언제나 막다른 길목에서 열립니다. 빛은 언제나 어둠 속에서 제 힘을 드러내고, 평화는 언제나 고통 한가운데서 그 이름이 소환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방법으로 하늘의 뜻을 드러내시기 때문입니다. 다만 인간이 제 욕심에 눈이 어두워 외면하거나 알기를 거부하고 다른 허상을 좇아 헤맬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걸으신 평화의 길은 고난의 신을 신지 않고 걸을 수 없는 길입니다. 어둠이 짙게 깔리고 죽음의 신음소리에 둘러싸여도 제 혼자라도 내디뎌야 하는 고독한 길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함께 걸어야 할 길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지금 그 출발점에 서 있습니다. 그분과 함께.

 

코로나19 위기 상황에서 사순절을 시작하며

세상을 구원하신 그리스도의 수난을 기억하며 주님의 남은 고난에 참여하는 사순절을 시작하는 ‘재의 수요일’에,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 된 교회들에게 회개와 자기성찰의 마음을 담아 간곡한 부탁의 말씀을 드립니다.

코로나19가 외부유입단계를 지나 지역확산단계로 접어들면서 한국사회의 생명의 안전이 심각하게 도전 받고 있습니다. 이 같은 위기상황이 기독교계 신흥이단사교집단인 신천지의 집회가 코로나19의 ‘슈퍼 전파자’ 역할을 하면서 가속화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이제 한국사회의 시선은 한국교회의 집회에 모아지고 있습니다. 신천지 ‘추수꾼’들의 지역교회 ‘침투’로 인한 감염의 확산이 우려되는 동시에, 한국교회가 취하고 있는 유사한 집회의 형태가 또 다른 ‘슈퍼전파자’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현실을 마주대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이 같은 감염 위기 상황 속에서도 극우개신교 정치집단이 고집스럽게 펼치고 있는 광화문 광장집회가 또 다른 불통의 바이러스가 되어 우리를 실망시키고 있습니다. 지금 정부와 시민사회는 코로나19 위기상황 속에서 한국교회의 사회적 역할과 기능이 무엇이며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심각하게 되묻고 있습니다.

대재난 앞에 무력할 수밖에 없는 개인이 취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은,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생명의 안전망을 구성하는 ‘마디’라는 깊은 신앙적 생태적 감수성을 가지고 다 함께 극복해 나가는 것입니다. 코로나19가 전국으로 확산되는 상황에서 교회는 정부가 마련한 매뉴얼대로 먼저 자신을 돌아보되, 공동체가 지니는 사회적 상호의존성의 관점에서 ‘우리’ 모두를 위한 공개적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코로나19의 위기 상황 속에서 우리는 교회의 공동체적 정체성의 표현인 집회를 철저하게 전체 사회의 공적 유익을 우선시하면서 재구성해야 합니다. 코로나19로 인해 모든 국민이 고통에 빠진 시기에 우리의 신앙 형식이 세상을 더욱 위험하게 만든다면, 그것은 우리의 집단적 이기심이지 이 세상을 향하신 생명의 하나님의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공동체로서의 교회는 이웃을 위한 교회, 세상을 위한 교회로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세상에 불어 닥친 생명의 위기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성도들은 물론이요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의 생명과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교회당의 대중집회를 통한 감염의 위험이 크다는 사실이 이미 현실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대구지역은 물론 각 발생지 교회와 여러 교단에서 주일예배를 포함한 모든 집회를 당분간 중지하자는 제안들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제안들은 결코 우리의 신앙을 시험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가 코로나19를 확산시키는 진원지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우리는 코로나19의 위기 상황 속에서 맞이한 사순절에, 그리스도의 수난을 묵상하며 일상의 삶의 자리에서 드리는 예배와 경건을 훈련하고 회복하므로 신앙의 유익을 더할 수 있습니다. 우리 시대의 소통의 방식인 온라인 매체들을 최대한 활용하여 각자의 자리에서 예배를 드리고, 다양한 묵상자료나 기도문을 통해 우리의 신앙을 성찰하고 나누면서 공동체적 신앙의 깊이를 더 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한 모든 교단 차원의 보다 적극적이며 섬세한 대응과 지침이 필요합니다.

현재 어느 곳도 그 누구도 더 이상 안전을 장담할 수 없다는 공포가 확산되면서 두려움이 커지고 있습니다. 두려움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신과 공동체를 지키라고 주신 선물이지 결코 우리의 신앙의 나약함이 아닙니다. 다만 두려움이 우리 안의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고 이웃을 향한 혐오와 차별로 표현되지 않도록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스스로 예방에 힘쓰면서 고통 받는 이들을 배척의 눈이 아닌 상호 돌봄의 눈으로 바라보며 함께 어려움을 나누어야 합니다. 자기 의에 충만하여 선과 악을 가르는 심판자의 위치에 서서 누군가를 비난하고 정죄하며 속죄양을 삼는 것은 신앙의 오만이지 결코 세상을 구하는 힘이 아닙니다. 사순절을 지나며, 그리스도의 수난 당하시는 사랑을 본받아 국적, 인종, 종교, 이념을 떠나 가장 위급한 이에게 가장 먼저 구호를 실천하며, 혐오와 차별이 아닌 상호 연대와 인류애의 정신으로 대재난을 극복합시다.

생명의 하나님, 우리가 의지하는 우리의 하나님,

주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요새이십니다.

우리가 지존하신 하나님의 거처에 몸을 숨기고

전능하신 주님의 그늘 아래 머물게 하소서.

우리를 사냥하는 자의 덫과 죽을 병에서 건져 주시며

주님의 날개로 덮어 주시고 그 깃 아래 숨겨 주소서.

(시편 91편 1~4)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회장 윤보환

총무 이홍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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