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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쇠락의 원인과 신학적 과제

한국교회가 쇠락하고 있다

한국교회 안에서 가나안 교인들이 증가하고 있다. 가나안 교인이라고 하면 무슨 말인지 모를 사람도 있다. ‘가나안’을 거꾸로 읽으면 ‘안나가’인데, 이전에는 교회를 나가는 교인이었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서 더 이상 교회 나가는 것을 포기한 교인을 가나안 교인이라고 말한다. 현재 가나안 교인들의 수는 개신교 전체 인구 1,000만 명 가운데 25%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전체 교인수의 1/4이니 적지 않은 숫자이다. 가나안 교인들이 아직 기독교인의 정체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다행이지만, 오래지 않아 그것마저 포기할 수 있다는 사실이 우리를 안타깝게 한다.

우리 주변에는 무늬만 기독교인인 사람들이 적지 않다. 교회는 다니고 있지만, 기독교인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이 분명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특히 정치인들의 경우가 그러하다. 그들은 교회를 자신의 표밭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해서인지, 특히 선거철 전후하면 교회 언저리에 자주 나타난다. 그들은 안수집사다 장로다 심지어 전도사다 직함을 운운하면서 자기 소개하기를 좋아하지만, 실제로는 다른 정치인들과 별로 다를 바 없이 활동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 기독교인으로 사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기독교인 정치인은 어떠해야 할지에 대해 모른 채로 교인행세만 하면서 자기 이해관계나 얻어내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교회에서 교인이라는 사람들의 절대수가 줄고 있다. 각 교단 총회의 통계를 보면, 지난 10년 동안 수십만 명의 교인수가 감소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장년과 노인의 감소보다 청년과 아동의 감소가 더욱 심각하게 나타난다. 때문에 교회마다 교회예산을 줄이며 당장은 어느 정도의 수준을 유지할 수 있겠지만, 향후 10년, 20년이 지나면 중대형교회들의 경우에는 건물의 유지비조차 감당하기 어려운 상태가 될 수 있다. 교회의 주축이 되어야 할 장년들이 청년세대로부터 새로 유입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한국교회의 미래는 매우 어둡게 보인다.

무엇보다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신뢰를 잃고, 질타를 당하고 있는 것은 한국교회의 가장 큰 문제이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 실시한 “2017년 한국교회의 사회적 신뢰도”에 의하면, 한국교회를 ‘아주 신뢰한다’와 ‘신뢰한다’가 20%, 보통이다가 28.6%, 한국교회를 ‘신뢰하지 않는다’와 ‘아주 신뢰하지 않는다’가 50% 남짓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2020년 2월 7일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 발표한 세미나에서는 ‘전혀 신뢰하지 않는다’가 32.4%,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가 31.5%, 전체 63.9%의 응답자가 기독교를 신뢰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나마 응답자들 가운데 기독교인들 다수가 교회를 신뢰한다고 응답했기 때문에 이 정도의 결과가 나왔지, 만일 비기독교인들만으로 통계를 낸다면 한국교회의 신뢰도는 이보다 훨씬 낮아질 것이다. 사람들이 한국교회를 신뢰하지 않는 요인을 살펴보면, 교회의 불투명한 재정사용, 교회지도자들의 부끄러운 삶, 타종교에 대한 배타적인 태도, 교인들의 이중적인 삶, 교회세습의 문제 등이 지적되고 있다.

 

한국교회를 쇠락시키는 원인은 무엇일까?

오늘 한국교회 쇠락의 첫 번째 원인은 근본주의의 오류라고 말할 수 있다. 근본주의는 반과학주의, 반지성주의, 율법주의적인 금기에 매몰되어 있고, 상식 이하의 수준이라 세상과 정상적인 소통을 하기가 어렵다. 근본주의는 국수주의, 반공주의, 이슬람포비아, 반동성애를 주장하는 극우 보수주의를 대변하고 있다. 또한 근본주의는 성경 문자주의를 주장하는데다, 성경을 아전인수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게다가 근본주의자들은 인종차별, 여성차별, 성소수자차별 등으로 인해서 반인권의 대변자처럼 처신하고 있다. 지금 근본주의에 감염된 한국교회는 성경의 가르침과 대립해서 차별금지법을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선봉에 서 있다.

오늘 한국교회 쇠락의 두 번째 원인은 교회주의의 집착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수의 관심은 교회를 세우는데 있지 않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임하도록 하는 데 있었다. 예수 공사역의 일성(一聲)에도, 예수의 가르침에 등장하는 수많은 비유와 가르침에도 하나님의 나라가 핵심이 되고 있다. 지금 세상을 위해서 존재해야 할 기관인 교회가 세상과 담을 치고, 게토화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향해 오신 방향을 근본적으로 거스르는 것이다. 그리고 누구라도 동일하게 환영해야 하는 교회가 사람을 선택적으로 환영하고, 남성중심의 위계질서로 변질, 고착된 것은 교회의 자기모순이라 말할 수 있다.

오늘 한국교회 쇠락의 세 번째 원인은 삼박자 구원식의 맘몬이즘과 이중이기주의라고 말할 수 있다. 진정한 신앙인이라면 결코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는데도, 한국교회는 하나님과 맘몬을 동등하게 위치시키고 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한3서 1:2)는 짧은 한 구절이 마치 성경의 핵심이라도 되는 것처럼 빈번히 인용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인용의 동기에는 하나님의 것을 관리하는 청지기로서의 결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을 강탈하는 강도로서의 욕망이 내재해 있다. 명성교회 세습의 배경 역시 그곳에 맘몬의 문제가 도사리고 있고, 명성교회 세습을 승인하는 부류 역시 맘몬의 이해관계와 얽혀 있다. 세상 사람들과 달리 이 세상에서 좋은 것 다 누리고, 저 세상에서도 천국까지 차지하겠다는 소위 기독교인들의 신앙으로 미화된 태도는 이중이기주의의 전형이라 말할 수 있다.

오늘 한국교회 쇠락의 네 번째 원인은 종교자유, 정교분리, 정치참여에 대한 오해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종교의 자유는 종교가 국가 권력에 의해 간섭받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함을 의미한다. 종교의 자유는 부정부패 불의에 대한 예언자적인 책임으로 이어져야 함을 의미한다. 우리는 정교분리를 오해해서는 안 된다. 정교분리가 국가종교와 기독교왕국에 대해서 배제하지만, 그렇다고 독재정권에 대한 침묵이나 무관심으로 왜곡되어서는 안 된다. 한편 정치참여는 비민주적, 반인권적, 반평화적, 반통일적 정치권력이나 독재정권에 대해서 예언자적인 책임을 다해야 하는 것을 의미하지만, 그렇다고 진영논리에 빠져 상대진영의 정상적이고 민주적인 정치까지 무조건 반대하거나 부정하는 것으로 변질되어서는 안 된다.

오늘 한국교회 쇠락의 다섯 번째 원인은 실천적 무신론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 주변의 무신론자들 가운데는 일반적으로 심리학적 무신론자들, 사회학적 무신론자들, 과학적 무신론자들, 철학적 무신론자들, 신학적 무신론자들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이론에 문제가 발견되면, 그리고 그들 스스로 신적 경험을 하게 되면, 언제라도 신앙인으로 전환될 수 있는 가능성이 남아 있다. 그러나 말로는 자신을 신앙인이라 하고, 입으로는 하나님을 운운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의 현존 앞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사는 코람데오의 삶을 거부하며 사는 실천적인 무신론자들이 제대로 된 신앙인이 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들은 자신을 진실한 신앙인이라 스스로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의 회생을 위해서 설정해야 할 신학적 과제는 무엇일까?

첫째로 한국교회의 회생을 위해서는 신앙생활을 생활신앙으로 전환해야 한다. 대부분의 교인들에게 신앙생활이란 것은 많은 생활 영역들 가운데 추가된 또 하나의 생활 영역처럼 취급되고 있다. 가정에서의 생활, 일터에서의 생활, 공공영역에서의 생활, 세계 공동체에서의 생활, 그리고 신앙영역에서의 생활. 기독교 신앙이 이렇게 이해될 때, 기독교 신앙은 다른 모든 생활 영역에서 추방되고, 자기만의 영역 안에 이분법적으로 갇히게 된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의 기독교 신앙은 모든 존재의 근원이자 궁극적인 방향이고, 인간의 삶 전체를 추동하는 근원적인 힘이며, 어떻게 살 것인가를 결정해주는 기준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은 주일과 평일을 달리해서 적용할 수 없고, 교회 안과 밖을 구분해서 실행할 수 없다. 기독교 신앙은 모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언제 어디서나 동일하게 작용해야 하는 것이고, 또 동일하게 표현해야 하는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기독교 신앙은 생활신앙이다. 가정에서든, 일터에서든, 공공영역에서든, 세계 공동체에서든, 기독교 신앙인이 처한 삶의 모든 영역에서 유감없이 꽃피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생활신앙으로서의 기독교신앙이 회복되어야 한다.

둘째로 한국교회의 회생을 위해서는 예수를 믿는 것에서 예수를 사는 것으로 나아가야 한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가르치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마 16:24) 지금 세상에 사는 그리스도인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께서 보여주신 삶을 따르는 제자로서 살아야 한다. 나아가 지금 자신이 처한 삶의 자리에서 예수의 가르침과 삶을 자신의 삶으로 보여줌으로써 작은 예수처럼 살아야 한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성경을 보면, 귀신들도 예수를 알고 떤다. 예수를 아는 것, 단지 믿는다고만 하고, 삶이 동반되지 않는 신앙은 아무 의미가 없다. 예수를 알고 믿는다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 동시에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예수를 믿기만 하고, 예수를 살아내려고 하지 않는 것, 예수를 주님이라고 부르면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는 것은 샤마니즘이지, 기독교의 진정한 신앙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셋째로 한국교회의 회생을 위해서는 죽어서 천국을 가겠다는 신앙에서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 나라를 임하도록 하겠다는 신앙으로 바뀌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나라인가?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뜻, 사랑과 정의에 기초한 평화의 나라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빈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나라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있는 모습 그대로 초대받지만, 초대에 응한 자는 죄된 삶의 방식을 떨쳐버리고 새로운 피조물의 방식으로 살아야 하는 나라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 개체의 존엄성이 회복되고, 누구든 사람답게 대접받고 대접해야 하는 나라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청지기권이 실현되어 인간과 자연이 공존을 이루며 사는 나라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나라이다. 이미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와 아직 완성되어야 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양자택일적이지 않다. 그러나 이미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는 신앙인들이 지금 여기에서 감당해야 하는 영역이고, 아직 완성되어야 할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선물로써 주시는 영역이다. 진정한 신앙인이라면, 막연한 미래에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로 도피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사랑과 정의와 평화), 하나님의 다스림에 당장 순종함으로써 이미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를 지금 여기에 임하도록 하는 일에 전심전력해야 할 것이다.

넷째로 한국교회의 회생을 위해서는 교회신학을 공공신학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신학은 교회를 위한 신학임에 틀림이 없다. 1차적으로 교회와 기독교인의 삶을 도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신학은 교회와 기독교인만을 위한 신학에 머물지 않고, 공공을 위한 신학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세상과 비기독교인의 삶에도 의미를 줄 수 있는 것이 되어야 한다. 때문에 신학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우리의 공공 영역 가운데서 기독교인과 교회가 감당해야 할 역할과 책임이 무엇인지, 어떻게 세상을 위해 살 수 있을지를 질문해야 한다. 교회와 기독교인의 사명은 세상에서 소금이 되고, 세상에서 빛이 되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마 5:13,14)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교회의 소금, 교회의 빛이 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우리 기독교인과 교회는 하나님이 인간이 되시고, 하늘이 지구화 되며, 신성이 세속화 되는 성육신의 신비를 따라서 세상으로 나아가 공공영역에서 소금과 빛의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특히 세상에서 고통당하는 사회적인 약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의 기독교 신앙은 어떤 경우에도 사사화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섯째로 한국교회의 회생을 위해서는 타종교 배타적 태도를 지양하고, 이웃종교와 대화하는 태도를 지향해야 한다. 우리가 사는 다종교사회에서 다른 종교에 대해 드러내는 다섯 가지 태도가 있다. 배타적인 태도이다. 다종교 상황의 현실자체를 부인하고, 다른 종교를 무시하거나 적대시하는 태도이다. 우월적인 태도이다. 다른 종교를 종교의 일반 범주에 두고는 있지만, 자신이 신앙하는 종교에는 비견될 수 없다며 비하하는 태도이다. 병존적인 태도이다. 다른 종교의 존재 자체를 현실적으로 인정하지만, 다른 종교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질 이유나 여유가 없다는 태도이다. 종교통합적인 태도이다. 모든 종교는 이름만 다를 뿐 동일한 본질, 동일한 목표를 지니고 있다는 태도이다. 대화적인 태도이다. 다른 종교의 입장에서 다른 종교를 이해하고, 다른 종교의 진리성에 비추어서 스스로를 도전하며, 종교들 간에 서로 대화하는 가운데 보다 풍요로운 삶에 도달하고자 하는 태도이다. 오늘 우리는 다종교가 공존해야 살 수 있는 세상에 위치해 있다. 우리가 다종교사회의 존재 자체를 부정한다면, 평화를 말하는 종교 때문에 평화가 깨지는 우를 범할 수 있다. 그러므로 다른 종교에 대한 배타적인 태도, 우월적인 태도, 병존적인 태도, 종교통합적인 태도를 벗어나서, 이웃종교와 대화하는 가운데 공공의 선을 함께 추구하는 노력을 다해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

오늘의 한국교회는 끓는 물속에서 서서히 죽어가는 개구리와 같다. 시간이 지나면 ‘어찌되겠지’라며 막연하게 기대할 수는 없다. 1970년대와 80년대에 경험했던 급성장의 경험에 그대로 안주할 수도 없다. 한국교회는 지금의 무기력하고 부끄러운 현실을 인정하고, 한국교회 초창기 선배 신앙인들이 보여준 신앙의 순수함과 열정을 회복해야 한다. 이제 한국교회는 환골탈태하는 개혁을 통해서 거듭나야 한다. 40년을 살아온 독수리가 다시 40년을 더 살려면, 자신의 부리와 발톱을 갈고, 깃털을 다시 가는 고통을 감수해야 하듯이, 환골탈태의 개혁만이 한국교회가 다시 살아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요즈음 한국교회의 위기가 공공연히 말해지고 있지만, 아직 기회는 있다. 위기란 위험스런 기회로서 완전히 끝이 났다고 할 때까지는 아직 끝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위기를 벗어나기 위한 중요한 지침으로서 1517년 이래로 확립된 교회개혁 5대 원리는 여전히 유효한 것으로 보인다. Solus Christus,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살도록 해야 한다. Sola Scriptura, 인간의 오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영감이 역사하는 성경의 능력을 인정해야 한다. Sola Fide, 믿음은 사랑의 행위를 면제하지 않음을 인식해야 한다. Sola Gratia, 죄인에게 베풀어진 은혜로 인해서 이제는 새로운 존재로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한다. 

Soli Deo Gloria, 사람의 궁극적인 목적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고전 10:31)에 있음을 한시도 잊지 말아야 한다. 이제 한국교회는 개혁된 교회로서 언제나 끊임없이 개혁하는 교회로서의 자기 정체를 제대로 감당해야 할 것이다.

정종훈/ 연세대학교 교수, 평화통일연대 공동대표

정종훈  chjeong59@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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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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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혜연 2020-03-31 23:49:13

    전광훈 이만희 신옥주 정명석 정동수 이화영 조나단 노태정 박성업 홍혜선 홍경표 이초석 김계화 장경동 이현숙 이외의 극우종교세력들은 지옥으로 보내버려야 마땅할듯~!!!!!!   삭제

    • 박혜연 2020-03-31 23:47:50

      모든 종교세력들은 죽었다~!!!!! 이제는 북한의 주체사상이 답인가?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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