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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를 만드는 길본문: 시 133:1-3

하나님의 은총과 도우심이 예배에 참석하신 모든 성도에게 가득 넘쳐나길 기원합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에서는 평화를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누구나 평화를 원하지만, 개인적인 차원에서든 집단적인 차원에서든 평화를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니 평화를 누리기는커녕 평화가 결핍된 상태에서 긴장과 대립, 갈등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정치인들은 당리당략과 이기적인 욕망 가운데 타협의 기술을 발휘하지 못해서 평화가 없습니다. 기업인들은 기업의 생존과 최대한의 이윤을 창출한다는 명분 아래 노동자들과 공존하지 못해서 평화가 없습니다. 북한은 여러 번의 핵무기 실험을 거쳐 이미 핵보유 국가가 되었고,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통해 미국 본토까지 위협할 수준에 도달했다고 하지만, 유엔의 오랜 제재로 인해서 주민들의 삶의 질이 떨어져 평화가 없습니다. 며칠 전 북한이 개성에 있는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한 이래로 공존과 상호 번영을 위한 남북관계가 심각한 위협을 받으면서 한국전쟁 70주년을 앞둔 우리 한반도에는 평화가 없습니다. 작년 12월에 시작된 세계적인 재난 코비드19가 사그라지기는커녕 날마다 확산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누리던 일상생활의 기쁨이 계속 미루어지면서 우리 가운데 평화가 없습니다.

이처럼 평화를 찾기가 어려운 지금, 척박한 한반도에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해야 할까요?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2장 14절 이하에서 이렇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이 양쪽으로 갈라져 있는 것을 하나로 만드신 분이십니다 ... 그분은 이 둘을 자기 안에서 하나의 새 사람으로 만들어서 평화를 이루시고,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이 둘을 한 몸으로 만드셔서, 하나님과 화해시키셨습니다. 그분은 오셔서 ... 사람들에게 평화를 전하셨습니다.” 사람들을 화해시키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께서는 무덤을 찾아온 여인들을 부활하시고 처음으로 만나셨을 때 “(너희가) 평안하냐?”(마 28:9)라고 질문하셨고, 제자들을 만나셨을 때는 “너희에게 평화가 있을지어다”(눅 24:36)라고 축복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전한 복음은 평화였고, 평화를 전한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복음 그 자체가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은 선하고 아름다운 동거를 이루기 위해서 자기 삶의 자리에서 평화의 복음을 수용하고,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 시간 저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자기 삶의 자리에서 평화를 만들기 위해서 어떤 길로 나아가야 할지를 함께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첫째로, 우리 그리스도인은 평화를 만들기 위해서 십자가의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세상의 보통 사람들은 ‘나’를 살리기 위해서 수많은 ‘너’를 죽이려고 합니다. ‘나’만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길이라면, ‘나’ 아닌 ‘너’는 죽어도 좋다는 식입니다. ‘너’는 ‘나’를 위한 희생물이 되어야 하고, ‘나’를 위한 도구나 디딤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수많은 ‘너’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수많은 ‘너’ 역시 ‘나’를 포함한 다른 수많은 ‘너’를 죽이려는 데 주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나와 너’의 관계는 긴장과 갈등, 대립과 투쟁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더욱이 세상의 악한 사람들은 ‘너’가 자기 마음대로 ‘죽어주지 않기 때문에 ‘너’ 죽고, ‘나’ 죽자고 덤벼듭니다. ‘나’ 혼자 죽기는 억울하다는 막가파식입니다. 요즈음 세계 도처에서 벌어지는 테러범들의 모습이 막가파식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주님 예수께서 세상에 보여주신 십자가의 길은 보통 사람들과는 정반대의 길이었습니다. 수많은 ‘너’를 위해서 ‘나’를 죽이는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너’를 살릴 수 있다면, ‘나’는 죽어도 좋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께서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산상에서 무리에게 가르치신 말씀 가운데 황금율(Golden Rule)이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마 7:12)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이 말씀을 황금율이라고 지칭하는 이유는 금보다 귀한 삶의 고고한 원칙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황금율을 종종 오해합니다. 나를 대접하지 않는 다른 사람에게 내가 대접을 받을 목적으로 먼저 대접하면, 언젠가 그 사람에게서 내가 대접을 받을 수 있다는 식으로 오해합니다. 황금률의 본래 의미는 “내가 남에게 대접을 받고 싶은 바로 그 방식으로, 내가 남에게 대접을 받고 싶은 바로 그 내용으로, 남을 조건없이 대접하라”는 것인데도 말입니다.

그런데 황금율보다 단계가 더 높은 삶의 고결한 원칙이 있는데, 그것은 예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너’를 위해서 ‘나’를 죽이는 십자가의 길입니다. 십자가의 길만이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모든 폭력을 멈추고 원수조차 화해하게 하는 유일한 길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은 다른 수많은 ‘너’에게 십자가의 길을 걸으라고 요구하거나 기대할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수많은 ‘너’의 태도와 상관없이 십자가의 길을 자발적으로 걸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먼저 십자가의 길을 걷는다면, 우리 삶의 자리에서, 우리의 가정과 일터에서 긴장과 갈등은 해소되고, 대립과 투쟁 역시 중지되며, 용서와 화해, 진정한 평화가 움터 오르게 될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 그리스도인은 평화를 만들기 위해서 원수 사랑의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마태복음 5장 43절 이하를 보면 예수께서 원수 사랑이 무엇인지를 말씀하셨습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우리 그리스도인이 다른 사람들과 다를 수 있는 분기점은 원수 사랑에 있습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당연하고, 가족과 친지와 친구들을 사랑하는 것 역시 당연합니다. 오늘 우리의 문제는 당연한 사랑조차 하지 않는 것이 문제이지만,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한 사랑은 물론이고 원수 사랑까지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독일 교회가 발표한 ‘평화사회백서’에 의하면, 원수 사랑은 원수에게 굴복하는 것도 아니고, 그에게 알랑거리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원수를 희망과 공포 그리고 공격성에 의해 움직여지는 죄 있는 한 인간으로서 승인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이상화하지도 않고, 원수를 악마화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양쪽의 실제 요구와 관심을 과장된 것으로 보지 않고, 객관적인 것으로 보며, 자기 안에서 원수를, 원수 안에서 자기를 동시에 고려하는 것입니다. 동서독 분단시절에 서독의 물리학자이자 평화운동가였던 바이젝커 박사는 지성적인 원수 사랑을 호소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원수를 괴롭히지 않는데, 원수는 우리를 괴롭힌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세계평화를 원하지만, 원수는 전쟁을 원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아군의 전투력은 방어용으로 존재하지만, 원수의 전투력은 세계지배의 주도권을 추구하는 공격용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생각은 우리만 하는 것이 아니라 원수도 똑같이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인식할 때만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대화를 증진시킬 수 있고, 지성적인 원수 사랑을 실행할 수가 있습니다.”

이처럼 진정한 의미의 원수 사랑은 원수의 인격성을 승인하는 것이고, 원수에 대한 왜곡된 편견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며, 원수를 공동의 삶을 위한 동반자로 보고 신뢰 형성을 통해 상호 안전보장을 추구하는 데 있습니다. 왜냐하면 안전보장이란 것은 자신을 위해서 자신의 노력에 의해서만 보증되지 않고, 모두를 위해서 원수와 함께 공동으로 노력할 때만 보증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은 ‘친구 아니면 원수’라는 극단적이고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을 떨쳐버려야 합니다. 원수라도 함께 살아야 할 사랑의 동반자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면 두 번 보고 싶지 않은 인간관계에도, 남북대립의 한반도에도, 남남갈등의 한국 사회에도, 더불어 사는 공존의 평화가 도래하게 될 것입니다.

셋째로, 우리 그리스도인은 평화를 만들기 위해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아는 예수의 비유 가운데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는 수도 없이 많이 접한 비유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강도는 그 사람의 모든 것을 강탈하고, 반은 죽여서 길가에 팽개쳤습니다. 그 곁을 제사장이 지나갔고, 레위인이 지나갔지만, 그들은 강도만난 자를 외면하고 자신의 길로 급하게 가버렸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만난 사람에게 최선을 다하는 이웃으로 다가갔습니다. 레오나드 그리피쓰라는 미국의 목사는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는 세 가지 삶의 철학이 담겨 있다고 해설했습니다.

첫째 “너의 것은 나의 것이다. 나는 그것을 가지려고 한다.”는 강도의 철학입니다. 강도는 자신에게 속하지 않은 남의 것을 억지로 강탈하고자 합니다. 남이 땀 흘려 거두어들인 결실을 별로 힘들이지 않고 거두려 합니다.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물리적인 폭력을 가하는 것으로 분풀이를 합니다. 둘째 “나의 것은 나의 것이다. 나는 그것을 지키려고 한다.”는 두 종교지도자의 철학입니다. 두 종교지도자는 혹시 강도를 만난 자 앞에서 머뭇거리다가 자신도 강도를 만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빠져 있습니다. 자기가 노력해서 확보한 자신의 것을 자기만 누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자신의 것을 남을 위해서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하지 않으려 합니다.

셋째 “나의 것은 당신의 것이다. 나는 그것을 당신과 나누려고 한다.”는 사마리아 사람의 철학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자신의 것을 다른 사람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기쁘게 생각하며 아낌없이 나누고자 합니다. 그는 자신의 땀으로 확보된 자신의 것이 그것을 가장 절실히 필요로 하는 사람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는 강도 만난 사람의 고난을 미리 준비하기나 한 것처럼 최선의 자비를 베풀고자 노력합니다. 이처럼 우리 그리스도인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철학을 지니고 살고자 한다면, 우리 그리스도인은 억압과 착취가 팽배한 약육강식의 세상에서 기꺼이 나누는 가운데 더불어 먹고 마시는 평화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끝으로, 우리 그리스도인은 평화를 만들기 위해서 일상생활 가운데서 평화를 살아내는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가톨릭 신자인 박노해 시인의 시 가운데 ‘평화 나누기’라는 제목의 시가 있습니다. 이 시에 의하면 평화 나누기란, 일상에서 작은 폭력을 거부하며 사는 것입니다. 세상과 타인을 비판하듯 내 안을 잘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현실에 발을 굳게 딛고 마음의 평화를 키우는 것입니다. 경쟁하지 말고 각자 다른 역할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일을 더 잘 하는 것만이 아니라 더 좋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좀 더 친절하고 더 잘 나누며 예의를 지키는 것입니다. 전쟁의 세상에 살지만 전쟁이 내 안에 살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총과 폭탄 앞에서도 온유한 미소를 잃지 않는 것입니다. 폭력 앞에 비폭력으로 그러나 끝까지 저항하는 것입니다. 전쟁을 반대하는 전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따뜻이 평화의 씨앗을 눈물로 심어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하는 기독교 신앙은 인간 삶의 모든 자리에서 언제나 일관되게 작동해야 하는 생활신앙입니다. 왜냐하면 기독교 신앙은 가정생활, 학교생활, 직장생활, 사회생활 등 다양한 생활 영역 가운데 부수적으로 추가되는 또 하나의 생활 영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기독교 신앙은 언제 어디서나 우리 삶의 본질이자 근원으로서 삶의 에너지로, 삶의 방향으로, 그리고 삶의 방식으로 실행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평화 역시 인간 삶의 모든 자리에서, 일상생활 가운데서 일관되게 작동하는 하나님의 선물이자 우리 삶의 덕목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은 우리 사고의 바탕이 평화가 되어야 하고, 우리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 평화가 되어야 하며,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일상적 방식 역시 평화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될 때 우리 그리스도인은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 나라의 평화에 가까운 참된 평화를 경험하며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평화를 누리며 살고 계십니까? 지금 예수께서 “너희가 평안하냐?”라고 질문하시면, “예, 제가 평안합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3장 10절 이하에서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구분이 없다고 선언하면서, 그리스도인은 평화를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에, 서로 용납하고, 용서하며, 사랑할 것을 간절한 심정으로 권면했습니다. “새 사람을 입으십시오. 이 새 사람은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형상을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져서, 참 지식에 이르게 됩니다 ... 여러분은 .... 누가 누구에게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용납하여 주고, 서로 용서하여 주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과 같이,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십시오. 사랑은 완전하게 묶는 띠입니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을 지배하게 하십시오. 이 평화를 누리도록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아 한 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형제자매가 되어 서로의 있는 그대로를 용납하고 과거의 잘못을 용서한다면, 언제 어디서나 평화를 만들 수 있고,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형제자매의 아름다운 동거를 우리 삶의 자리에서 이루어낼 것입니다. 특별히 긴장과 대립과 갈등의 한반도에서 남북한의 아름다운 동거와 평화통일을 속히 이끌어 올 것입니다. 올해는 한국전쟁 발발 70주년이자 6.15 선언 20주년을 맞이한 의미심장한 해입니다. 우리의 열악한 삶의 자리에서, 언제라도 전쟁이 날 수 있는 한반도에서, 요즈음 코로나19로 인해 평화를 경험하기 어려운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평화를 만들고자 평화의 길로 앞장서서 걸어가는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우리에게 평화주기를 원하시며, 우리가 평화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시는 주님, 이제 우리가 너를 살리기 위해 나를 죽이는 십자가의 길을 걷게 하옵소서. 이제 우리가 만나기 싫은 원수라 할지라도 만나게 하시고, 용서하게 하시며, 화해함으로 참 평화를 만들게 하옵소서. 이제 우리가 가진 것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사람을 만날 때는 기꺼이 나눔으로 그에게 평화를 선물하게 하옵소서. 이제 우리가 서 있는 일상생활의 모든 자리에서 작은 평화라도 기어이 실천하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평화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정종훈/ 연세대 교수, 평화통일연대 공동대표

 

*이 글은 한국전쟁 발발 70주년을 앞두고 21일 열린 높은뜻광성교회(이장호 목사)의 통일선교주일 예배에서 했던 설교문이다. -편집자 주

정종훈  chjeong59@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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