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오피니언 칼럼
언어습관과 남북협력KOLOFO 칼럼 제519호

우리는 흔하게 “밥 한번 먹자”는 말을 한다. 어떤 시인들에게는 이 말이 “살점 발라 얹어주듯 건네는 그 말”이라거나 “물리지 않는 맛”으로 들리기도 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이런 표현이 가끔은 한국문화에 서툰 외국인이나 이 땅에 살고 있는 많은 탈북주민들에게 혼동이나 불쾌감을 주는 경우를 보게 된다. 얼마 전만 하더라도 한국에 온 지 8년이 넘었다는 북한출신 분이 이런 얘기를 하는 게 아닌가. “며칠 전 사무실을 방문한 분이 윗분과 함께 본인 동네에 놀러오라 했는데 언제 가면 좋겠냐고 윗분께 물어보니 그러지 말라며 단순한 인사말이라는데 이게 어떤 상황인지?”를 묻는 것이었다. 말의 본뜻이야 현장에서의 뉘앙스에 달린지라 딱히 정답이라고 내놓을 수는 없다. 하지만 어디 이 말뿐이랴. “언제 소주 한잔 하자”는 말도 그렇고 “자주 보자”는 말도 마찬가지다.

 

공직자의 말 무게와 책임감

말의 의미를 아는 사람들에겐 헤어짐의 아쉬움과 어색함을 포장하고 마무리 짓는 예의바름과 따뜻함으로 이해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겐 공허한 소리요, 실없는 말로 받아들여지기 십상이다. 이런 오해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15년 전쯤 정부 실장급 인사와 함께 꽤 많은 사람들이 동남아시아 국가로 동행출장을 간 적이 있다. 공항에서부터 앞선 관료의 고급 승용차를 버스로 따라가며 경찰 오토바이가 사거리의 차량들을 막고 호위해주는 소위 캄보이(convoy)를 생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받으면서 까닭모를 우쭐함이 스멀거리며 올라올 때, 막혀 서 있는 차량과 오토바이 사람들의 순박한 표정을 보는 순간 미안한 마음과 책임감이 확 드는 것이었다. 이어진 만찬과 회의에서 그 나라 총리가 가장 신임한다는 고위급 인사가 자국 관광에 대해 한국의 지원을 간곡하게 요청했다. 당연히 우리 정부 인사들도 예의 바르게 기꺼이 그럴 것이라는 답사를 전했다. 그리고 남은 일정 동안 몇 가지 세부적 사업을 나름 진지하게 논의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일본이나 프랑스 등 선진국들의 대규모 지원들을 그 나라 곳곳에서 목도했음에도 이후 우리의 지원은 참으로 미미하고 지난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현장의 호탕했던 대답에 부응하지 못한 많은 이유가 있었겠지만 국제사회에서 우리 공직자들의 말 무게와 책임감에 대해 생각해 볼 기회였던 것 같다.

개인적으로 이런 경험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어느 광역자치단체에서 용역을 받아 유럽의 유수 학교와 투자협정을 진행해 거의 합의에 이르러 해당 도(道)로 보냈지만 새로운 도지사로 바뀌자 아무런 후속조치를 이행하지 않아 협상파트너의 항의를 꽤 세게 받았던 일도 있었다. 또 몇 년 전 우리 포럼의 김영윤 회장을 따라 몽골에 갔을 때도 비슷한 일을 겪었다. 수많은 정부 관료와 대기업 관계자들이 몽골에 올 때마다 대규모 지원이나 투자를 하겠다는 약속이나 긍정적 검토를 얘기했는데 울란바토르엔 정작 룸살롱과 노래방, 음식점만 난립했다는 것이었다. 나중에 몽골에 대한 브리핑을 듣고 우리가 관심을 가졌던 엄청난 지하자원은 이미 대부분 강대국들이 선점해 한국이 차지할 수 있는 자원은 남은 게 거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 나라 인구도 부산보다 적어 우리 대기업들이 투자하기에 시장규모가 적절하지 않았다는 말을 후일담으로 들으면서 그런 내용은 정부나 대기업들도 진작 알았을 터인데 왜 그런 흰소리들을 해서 그들을 실망시키고 화나게 했는지 유감이다.

이와 유사한 일들은 동남아나 남미에서 차고 넘친다. 이해하고자 하면 이는 우리의 말 습관이고 예의랍시고 하는 말인데 곳곳에서 국가 이미지만 버리고 있는 셈이다. 안타까운 일 중의 하나가 2년 전 평양 능라도경기장에서의 15만 평양시민들에게 한 문재인 대통령 연설이다. 인터넷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그날 영상의 감격은 지금 봐도 눈물이 날 정도다. “5천년을 함께 살다 70년을 떨어져 사는 사이”라든가 “더 이상 이 땅에 전쟁이 없을 것”이며 “양측 지도자가 우리 민족의 운명은 우리가 스스로 결정하자는 민족자주의 정신에 합의했다고 하는..” 내용에 이르러 현장에 있던 평양시민들도 그랬겠지만 남쪽의 우리도 가슴이 뜨거워지고 곧 희망의 시대를 맞이할 수 있다는 기대에 부풀었던 게 사실이다.

특히 관광업계는 즉각 2008년 박왕자 씨 사망사고 후 막혔던 금강산관광이나 개성관광 재개 준비에 들어갔다. 이때 현대아산의 주식 동향을 보면 당시 우리 사회의 기대수준을 짐작할 수 있다. 2년이 지난 지금 결과적으로 공개 선언한 말들은 거의 실현되지 않았다. 남측 최고지도자의 말 뒤로 자신들의 노력은 인정되지 않고 오히려 가혹해지는 국제제재와 예상치 못했던 코로나에 이은 극심한 경제난, 태풍피해와 복구부담까지 겹쳤을 때 그들이 느꼈을 감정이 어느 정도일지 짐작이 간다.

 

언어습관을 바꾸는 노력

막말과 남북연락사무소 폭파와 같은 반복적 도발과 무응답, 빗장 잠그기 등 무례하고 과격한 반응에 화가 치밀어 오르다가도 그게 다는 아니지 하는 생각이 드는 이유인 것이다. 평양에서의 대통령의 진정성에 대해 추호의 의심을 갖지 않는다. 그가 보인 삶의 궤적이나 일관성을 믿을 뿐 아니라 왜 지킬 수 없었는지 잘 알기 때문이다. 남북관계의 열쇠를 쥔 트럼프가 하노이에서 북한주민들의 환호와 기대를 등에 지고 66시간을 기차로 달려온 김 위원장을 우리에게 한마디 귀띔도 없이 돌려세워 한미동맹을 흔드는 동시에 우리에 대한 북의 신뢰기반까지 무너뜨린 일은 지금껏 유감이다.

G2간 패권싸움은 날로 커지고 있어 군사적 안정과 경제적 실리 중 하나만을 선택해야 할 운명의 시간도 다가오고 있다. 방역조차 부인하며 정권반대와 저항에 격렬하게 나서는 일부 보수세력, 코로나로 인한 경제난과 뜻하지 않은 집값폭등으로 지지율 하락이 이어지면서 교착된 남북관계를 반전시킬 계기 마련이 어렵게 되어 있다. 그러니 웬만한 아이디어나 의지를 가져도 작금의 상황을 풀어내기가 좀체 쉽지 않다는 걸 모르지 않는다. 아무리 그래도 아쉬움은 남는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우리 대통령의 진심과 약속을 관철할 지혜와 용기, 더 정교한 정세분석과 지킬 수 있는 세부방안의 모색이 저 쟁쟁하다는 관료들과 보좌진들에게 그렇게 어려웠는지... 

북한을 포함해 국제사회에서 우리의 입장을 잘 정리하고 펼쳐나가기 위해 무엇보다 우리 언어습관을 바꾸는 게 먼저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연애든 외교든 아무리 진심이라도 상대에게 희망고문이라면 안하는 게 맞다.

김상태/ 전 문화관광연구원 본부장, 남북물류포럼 수석 부회장 

김상태  korealofo@naver.com

<저작권자 © 유코리아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많이 본 기사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