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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5의 길과 6.25의 길

민족상잔의 전쟁은 한반도를 피비린내로 뒤덮었고 국토를 화염에 물들인 채 동강 냈다. 불행하게도 남과 북은 전쟁에 관한 서로 다른 시각과 주장을 굽히지 않고 아전인수(我田引水)를 거듭해왔다. 서로에 대한 적대와 증오심을 정치적 소구력으로 삼았던 것이다. 전쟁 발발 74년이 지났어도 남북은, 아직 전쟁을 제대로 끝내지 못한 채, 국제 환경 변화에 속수무책으로 끌려다니고 있다. 정전체제로 굳어진 한반도에서는 열전(熱戰)을 막는 일이 최선이 되어 버렸다.

오늘날 남북관계는 서로 다른 정치 시스템을 바탕으로 하는 한계를 노정(露呈)하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민주’가 노동당 독재를 당연시한다면,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를 천명하고 있다. “당이 결심하면 우리는 한다”라는 문화와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개인 중시 문화가 같을 수 없다. ‘남북기본합의서’에서부터 ‘9.19평양선언’까지 체결하고도 효력이 발생하지 못하는 이유 중 먼저 서로 다른 정치 시스템을 꼽을 수 있다.

6.15남북공동선언(2000년)은 상호체제 인정과 불가침에 합의했던 남북기본합의서(1991년)를 바탕으로 했다. 이는 정권교체와 관계없이 남북 합의를 이어받았던 최초의 선언이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남북기본합의서를 입안했던 노태우 정부의 실무책임자 임동원을 중용했다. 남과 북의 관계를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로 규정한 남북기본합의서는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의 토대이기도 했다. 노태우 정부에서 김대중 정부로 대북・통일정책이 이어진 사례는 더 깊은 성찰을 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제대로 돌아볼 새도 없이 북한은 이미 작년부터 새로운 길로 들어서고 있다.

김정은 위원장은 2023년 12월 제8기 제9차 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북남관계는 더이상 동족관계, 동질관계가 아닌 적대적인 두 국가관계, 전쟁중에 있는 두 교전국관계"로 규정했다. 그 근거로는 "력대 남조선의 위정자들이 들고나온 《대북정책》, 《통일정책》들에서 일맥상통하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면 우리의 《정권붕괴》와 《흡수통일》이였으며 지금까지 괴뢰정권이 10여차나 바뀌였지만 《자유민주주의체제하의 통일》기조는 추호도 변함없이 그대로 이어져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후 올해 1월 열린 제14기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주권행사 령역을 합법적으로 정확히 규정짓기 위한 법률적 대책을 세울 필요가” 있다며 우리의 헌법 제3조를 언급했다. 남북관계를 국가 대 국가로 규정하고 영토에 관한 헌법 규정을 명시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또한 "우리 국가의 남쪽 국경선이 명백히 그어진 이상 불법무법의 《북방한계선》을 비롯한 그 어떤 경계선도 허용될 수 없으며 대한민국이 우리의 령토, 령공, 령해를 0.001㎜라도 침범한다면 그것은 곧 전쟁도발로 간주될 것"이라고 못박았다.

여기서 특이점은 우리 헌법 제3조와 달리 국토 영역을 ‘남쪽 국경선’이라고 지칭한 지점이다. 김정은 위원장은 대한민국 국호1)를 사용하면서 휴전선 이남의 정권 실체를 ‘괴뢰’가 아닌 독자적 국가로 인정하고 있다. 이는 선대 수령들의 대남·통일정책의 본격 전환을 알리는 신호탄으로 읽힌다. 진보 정부마저 내면적 흡수통일을 포기하지 않고, 미국에 종속된 현황을 타파할 의지도 없다면 북이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선다고 탓할 수도 없다. 이미 북한은 2021년 제8차 당대회에서 당규약 전문에 명시됐던 혁명론을 수정한 바 있다. 남조선혁명을 더 이상 그들 혁명의 완성으로 여기지 않겠다는 뜻이다.

남북관계의 ‘적대적 국가관계’ 규정은 정전체제를 전환하지 못하고 있는 형편에서 볼 때 이상한 일이 아니다. 2015년부터 효력이 발생한 우리 군의 작전계획 5015를 염두에 둔다면 더욱 그렇다. 북한 전 영토를 평정하고 자유민주주의를 심는 군정을 실시하겠다는 것인데, 참수작전을 동반한 군사훈련임을 뻔히 알고 있는 북에서 “조선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는 경우에는 대한민국을 완전히 점령,평정,수복하고 공화국령역에 편입시키는 문제를 반영하는것도 중요하다고” 한들 같은 입장임을 상기하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남북관계가 상대적임을 안다면 평화의 길은 정해져 있다.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하며 공통분모를 키워가는 길 말이다.

6.15는 바로 그 같은 길을 열었고 남북경협의 꽃, 개성공단을 현실화했다. 불행히도 우리는 가장 소중했던 역사적 자산을 내팽개쳤다. 북한에 대한, 평화에 대한 무지는 물론 민족의 번영과 역사적 사명에 대한 소시민적 근성이 발목을 잡은 탓이다. 어떤 이들은 아직도 6.25의 길을 주창한다. 더구나 윤석열 정부의 통일문제 전문 연구기관인 통일연구원은 헌법 제3조와 제4조의 내용을 공공연히 내세우고 있다. 6.25의 길을 계속 고집한다면 이는 국가에 위임한 권력을 잘못 사용하는 격이다. 더 늦기 전에 6.25의 길은 걸을 수 없도록 해야 한다.

1)김여정 부부장 역시 2023년 7월 담화에서 ‘대한민국’이라고 우리 국호를 언급했다.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방북을 불허하는 외무성의 김성일 국장 담화에서는 “남조선의 그 어떤 인사의 ‘입국’도 허가할 수 없다”고 말해 ‘입경’이 아닌 ‘입국’이라는 이례적 표현도 등장했다.

* 위 글은 ‘남북물류포럼’에도 실렸습니다.

 

 

윤은주/ (사)뉴코리아 대표, (사)외교광장 부이사장

 

윤은주  ejwarrior@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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