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은 자연현상과 같아서 진공을 싫어한다. 21세기에 들어와 미국 경제력의 상대적 침체가 시작되고, 더욱이 9.11 이후 중동에 빠져있는 사이 동아시아에는 국제 권력의 진공상태가 감지되기 시작했다.

부상하는 중국이 그 진공을 메우려 들면서 G-2 기류가 형성되자 일본은 G-3를 주장하면서 진공의 한 부분을 차지하려 하고 있다. 일본은 집단자위권 행사를 명분으로 보통국가로서 군사력 보유의 길에 들어서고, 체제 생존을 위해서는 가릴 것이 없는 북한과 손을 잡아 중국 주도의 동북아 정세에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한편 중국은 역사상 어느 때보다 경제의 대외 무역의존도가 높아졌다. 해상 수송로는 중국의 미래이다. 그러나 국토 크기에 비해 짧은 해안선을 태평양쪽에만 갖고 있다. 미국이 서태평양을 장악하고 있어 중국의 대양 출구는 옹색하다. 그래서 태평양 진출 통로인 북쪽의 한반도 축, 중앙의 대만-일본 축, 남쪽의 동남아-호주 축 중에서 가능성이 높은 한반도에 공을 들인다.

이런 거시적 배경 하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7월 3~4일 방한했다. 북한 정세와 북중관계, 일본의 역사 회귀와 군사대국화 조짐, 미국의 미사일 방어망 구축 등 공개되지 않은 민감한 문제들이 논의되었을 것이다. 우선 양국 정상이 발표한 공동성명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물 잔의 반이 차오른 것도 보이고 반이 비어 있는 것도 보인다.

▲ 박근혜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3일 오후 청와대에서 공식 기자회견을 열고 회담 결과를 발표한 뒤 악수하고 있다. ⓒ청와대

우선 안보면에서, 북핵문제에 대해 “한반도에서의 핵무기 개발에 반대”한다는 표현은 “북핵 반대”로도 해석될 수 있지만, 실은 현재는 물론 미래에 있어서 남과 북 모두의 핵 개발을 반대한다는 지극히 원론적인 합의이다. 용어의 기교로 문제의 근본을 얼버무리고 실질적 해법을 회피하였다. 중국이 한국에 대한 매력공세(charm offensive)를 펴고 있는 형국에서도 ‘전략적 파트너십’의 핵심인 북핵문제 해결에 아무런 실질적 진전을 가져오지 못한 것은 아쉽다.

첫째, 시 주석이 공동기자회견에서 강조했듯이 중국은 지속적으로 “북한 비핵화”가 아니라 “한반도 비핵화”를 주장하고 있다. 이는 북한 핵 포기와 함께 북한이 주장하는 주한미군 및 한미군사훈련 위협 해소, 미국의 대북제재 해제 및 관계 정상화도 이루어져야 함을 뜻하는 것이다. 얼핏 비슷하게 들릴 수 있지만 실제로는 번개불(lightning)과 반딧불(lightning bug)만큼 차이가 난다.

둘째, 바로 그 차이 때문에 한중 양국은 9.19 공동성명의 이행을 위한 6자회담 재개방안에 대해 합의를 도출하지 못한 것이다. 2005년의 9.19 성명은 북핵 해결과 한반도에서의 공존양식, 그리고 동북아 다자안보 대화를 설정한 포괄적 합의였음에도 불구하고 한미와 북중의 기본적 입장 차이로 좌초상태에 있다.

다음 경제면에서, 금번 양측이 원-위안화 직거래 구축과 FTA의 연내 타결에 합의한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특히 한중 FTA는 앞으로 한중일 FTA로 연결될 가능성을 높이고, 나아가 지금 미중이 서로 버티고 있는 환태평양 동반자협정(TPP)과 지역포괄 동반자협정(RCEP)을 조화시킬 수 있는 여지를 확대할 것으로 기대된다. 그럼에도 한국 경제의 중국 편입이 가속화될 개연성이 높아지는 것은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양국 사회의 가치체계는 아직 간극이 크다.

마지막으로 공동성명에서 한국의 대미, 대일관계에 직접 영향을 줄 소지를 배제한 것은 적절했다. 특히 일본과의 역사 갈등에 있어 명시적 편 가르기를 원하는 중국의 기대를 수용하지 않은 것은 신중한 조치였다. 그러나 일본의 집단자위권 행사에 대한 대응은 한중 모두에게 거대 과제로 남는다.

지금 한국은 동북아에 일고 있는 삼각파도의 가운데에 있다. 시 주석 방한을 두고 일각에서는 미일과 중국의 대립선상에서 ‘균형 외교’를 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한국은 동북아의 평화와 협력을 증진시키는 ‘촉진 외교’를 전개해야 한다. 세력 간의 충돌 에너지를 중간에서 중화시키는 데 그칠 것이 아니라, 공동의 안보와 번영의 에너지로 수렴, 발전시키자는 것이다.

한국에게 그럴 힘이 있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미중 간 서태평양 경합이나 일중 간 영토 문제에서는 그런 여지가 없다. 그러나 동북아 안보의 최대 장애인 북핵 문제에는 분명 한국의 역할과 역량이 있다. 당장 6자회담 재개 방안만 해도 그렇다. 예를 들어 북한의 핵 활동 잠정중지와 미국의 대북제재 일부 완화를 묶는 예상 결과물을 한국과 중국이 함께 만들어 북한과 미국을 설득할 수 있을 것이다. 당연히 한국이 전력투구해야 가능하다.

6자회담의 진전은 9.19 공동성명에서 합의한 동북아 다자안보 대화의 진전을 의미한다. 이 대화는 역내 국가 간 군비 경쟁, 일본의 집단자위권, 영토분쟁과 방공식별구역 등 번지고 있는 안보 불안 요인들을 대화를 통해 순화시키는 기능을 할 것이다. 지금 미국은 기존 동맹의 망에 신규 동맹을 규합중인 데 비해, 중국은 소위 “개방적이고 투명하며 평등한 아태 안전과 협력의 틀”을 자신들 중심으로 만들고자 한다. 그러나 둘은 조화하기 어렵다. 해답은 양국이 이미 합의한 6자회담 내 다자안보대화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

한국이 내세우는 한반도 신뢰프로세스와 동북아 평화협력구상 등이 구호 수준을 넘어 남북고리와 외부 축을 연결시킴으로써 동북아의 평화와 번영을 촉진하고 통일을 주도하는 실질적 정책이 되기를 기대한다.

송민순/ 전 외교통상부장관

*이 글은 유코리아뉴스와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의 협의에 따라 게재하는 것으로 글에 대한 저작권은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에 있습니다.

송민순  ifes@kyungnam.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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