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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열차를 타면 사는 것이고, 못 타면 죽는 것이다심주일 목사의 탈북일기(10)

우물쭈물 할 것 없이 빨리 떠나기로 굳은 결심을 했다. 여러가지 조건을 따지고 여러가지 문제를 생각하다보면 결국은 떠나지 못할 것이다. 이미 나는 하나님을 몰랐을 때부터 '7'자를 특히 좋아했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7자 달린 날에 인생의 전환점과 좋은 일들이 일어났었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7자는 깊은 뜻이 담겨져 있다고 생각했고, 그것을 일기장에 기록해 놓기도 했었다. 그런데 이것이 웬일인가. 하나님을 알고 나니 바로 7자가 하나님의 숫자인 것이다. 놀라지 않을 수 없었고 정말로 나는 그때 '아, 하나님은 이미 나를 알고 계셨구나'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평양을 떠날 날도 7자가 달린 날로 결정했다. 그날이 바로 1998년 3월 17일이었다.

집을 떠나면서 몇 가지는 잘 정리해야 했다. 첫째로 나의 건강이었다. 부대 군의소에서 신체검사를 받았다. 결과는 다 정상인데 다만 치과에 문제가 있었고 왼쪽 가슴 부근에 근육이 주먹만 하게 굳어 있었다. 이것은 종양과에서 시간을 좀 두고 치료를 하자고 했고 문제가 있는 이는 즉시 보철을 하였다.

다음은 가족에 대한 것이었다. 내가 어디에 갔는지 밝혀질 때까지 노동당은 서둘러 처리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김정일 친위대에 가 있는 맏아들은 즉시 제대시켜 집으로 보낼 것이라 예상되었다. 그러면 그때에 어떻게 해서라도 제3국으로 밀입국시켜 대한민국으로 안내하는 것이 나의 계획이었다. 아들 문제도 제대하고 나면 그때에 가서 정황에 따라 판단하며 행동하리라고 생각했다. 떠나기 직전 아내에게 함께 떠나면 위험이 크기에 지금은 혼자 떠나지만 언제든 죽지 않으면 꼭 찾아오겠다는 약속을 남겼다.

떠나기 전날 사무실에서 평상시처럼 태연하게 할 일을 처리했지만 사실은 마지막 정리를 하고 있었다. 일체 문건이 미흡하지 않도록 완벽하게 정리했으며 극비에 속하는 문제들은 총무과에 다 반납했다. 당시 나는 사무실에서 세포비서로 있었기 때문에 당원증을 꺼내어 그때가 3월이라서 3월 당비 납부란에 도장을 찍고 당비 수납부에다 사인을 하고 당비를 수납부 갈피에 끼워 놓았다.

그 다음 지도를 펼치고 압록강 도하 지점의 좌표를 확정하고 압록강을 도하하면 어디로 갈 것인가를 연구했다.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는 것이 없었는데 갑자기 중국 길림성 통화시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 통화시에 빨간 연필로 동그라미를 쳤다. 통화시에는 아무 연고도 없었지만 그저 거기로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국경을 마음대로 다닐 수 있는 증명서가 있었기에 증명서를 다시 점검하고 그날 저녁 집에 들어와 아내와 마지막 밤을 보냈다.

그때 나의 최종 목표는 서울이었기에 나의 작전 가방에는 나를 대한민국 정부 앞에 증명하기 위한 서류 즉, 대학 졸업증, 군관신분증, 당원증, 계급이 달라질 때마다 찍은 사진 등이 전부 들어 있었다. 

 
기차에 몸을 싣고

평양을 떠날 때는 북한군 군인들이 출장을 다닐 때 보통 그렇게 하고 다니는 것처럼 군복을 단정하게 입고 작전 가방을 멨다.  평양역에서 아침에 떠나는 7열차인 평양-만포 급행 열차에 몸을 싣고 언제 다시 돌아올지 모르는 길을 떠났다.  열차는 평양의 품을 점점 빠져나와 숨가쁘게 달리고 있었다.  군인 칸에 몸을 싣고 차창 밖을 내다보는 나의 마음은 착잡했지만 얼굴은 근엄하게 앉아 있었다.  평안남도 안주 역까지는 비교적 정시로 달리던 열차가 그때부터는 마음대로 달리기 시작했다.  전기가 오면 달리고 정전이 되면 아무때나 서기를 반복하면서 정말로 힘겹게 달렸다. 

  열차 안에서는 승무 안전원들이 열차에 타고 가는 손님들의 증명서를 단속하느라 혈안이 되어 그 좁은 열차 안을 헤집고 다녔다.  이들은 누구에게나 다 반말이다.  그리고는 증명서에 좀 이상이 있다든가 또 이상이 없다고 해도 짭짤한 문건을 가지고 가는 사람 같으면 무조건 끌고 단속실로 갔다.  그 다음에 그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른다. 

  북한은 열차에 탄 군인들은 검열원(헌병)들이 검열을 한다.  나는 별다른 문제가 제기될 것이 없으므로 단속에 대해 걱정하진 않았지만 마음속으로는 부대에서 내 계획을 알아채고 뒤따라 오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한편 안심하게 되는 것은 부대에 출근하지 않아도 첫날에는 그저 무슨 일이 있나 하고 그냥 지날 것이고, 다음날은 어디가 아픈가 하면서 또 그냥 지날 것이다.  그 다음날 정도는 집에 사람을 보내어 알아볼 수 있다.  그렇다면 3일 안으로만 북한 땅을 벗어나면 되는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는 집집마다 전화가 없어서 3일만 잘 견디고 국경을 넘으면 북한 안에서의 문제는 해결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만포에 도착해서 다시 또 열차를 갈아타고 혜산 방향으로 더 가야했다.  내가 목적한 곳이 바로 자강도 운봉 노동자 구였다.  바로 압록강을 도하해야 할 지점이 운봉발전소 댐 밑이었다.  북한에서는 만포에서 갈아타야 할 만포-혜산행 열차를 흔히 내륙선 열차라고 말한다.  열차가 만포에 도착하게 되면서부터 열차 안에는 나뿐만이 아니라 그 열차를 갈아타려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이제 내륙선 열차인 만포-혜산행 열차가 정시로 다니는 지가 관건인데 열차에서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들으니 전혀 다니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언제 다시 그 열차 운행이 재게될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래도 어쨌든 다시는 돌아설 수 없는 길이었기에 되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집을 떠날 때 북한 돈 300원을 가지고 떠났다.  집에 돈이 없기도 하였거니와 300원이면 얼마든지 북한 땅 안에서 3일은 살수 있다고 계산했다.  7시간이면 만포에 도착해야 할 평양-만포급행 7열차는 많은 시간을 지체해서 밤 11시 정도에 만포에 도착했다.  열차가 도착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만포시 안전부에서 동원되었다고 추정되는 많은 안전원들이 만포 역전을 완전히 포위하고 열차에서 내리는 손님들을 단속했다.  만포시 경무부와 또 만포시에 주둔하고 있는 검열원들이 군인들에 대한 검열도 강화하였다.  만포는 국경이기 때문에 그럴 수 있는 것이고 또 1년전 황장엽 선생의 대한민국으로의 탈북은 국경을 더욱 강화할 수 밖에 없게 만들었다.

  만포 역에 내려 역전 대합실에 들어가 내륙선 열차의 운행 실태를 알아보려고 하였다.  그런데 이것이 웬일인가.  언제 다시운행을 재개할지 모른다던 내륙선 열차가 그날은 특별한 예고도 없이 운행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알려지자 내륙선 열차를 타겠다고 밀려드는 사람들로 인산인해였다.  열차를 타겠다고 애쓰는 사람, 먹을 것이 없어 대합실을 전전긍긍하는 사람, 아예 역전 대합실 바닥에 쓰려져 있는 사람, 사람들을 단속하여 열을 지어서 안전부로 끌고 가는 안전원과 끌려가는 사람, 내륙선 기차표를 사겠다고 밀고 당기는 사람 등등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현실 앞에 '이것이 조선이로구나. 드리어 조선은 이렇게 망해가고 있구나'라고 생각하니 목이 메어왔다. 

사실 나는 그때 기도를 못했다.  그 위험한 길을 떠나면서도 기도를 드리지 못했다. 하나님에 대한 열망은 있었지만 기도에 대한 것은 완전히 문외한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나를 지켜주셨고 필요한 사람들을 내 앞에 예비시켜주셨다. 

내륙선 열차를 타고 못타고 하는 문제였기에 체면이란 중요하지 않았다.  저 열차를 타면 사는 것이고, 못 타면 죽는 것이다.  오직 이런 각오 밖에 없었다.  밤 몇 시인지는 정확히 몰랐지만 내륙선 열차는 사람들을 태워놓고도 내 기억에는 2시간 정도 더 정차해 있다가 떠난 것 같다.  그 열차는 원래 화물을 싣는 유계차를 나무의자들을  들여놓고 여객열차로 전환시킨 열차였다.  열차에는 조명도 없었다.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탔는지 전혀 그 안에서 움직일 수 없었고 열차 승강대와 열차 지붕 할 것 없이 온통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안전원들은 사람들을 단속하려고 돌아다닌다.  전지 불을 번쩍거리면서 소리치고 호령하고 욕하고 움직이지 않는 사람들은 밀치고 그러면서 단속한 사람들을 계속해서 단속칸으로 끌고 갔다.  열차는 사람을 많이 태워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한참 가다가 다시 뒤로 물러서기도 하는등 정말 힘겹게 달렸다. 

내가 내려야 할 역은 운봉역이었다.  그런데 운봉역에 내리면 잠을 좀 자야 내일 최종적으로 모든 것을 점검하고 강을 건널 것이다. 열차 손님중 한명에게 물어보니 운봉에는 여관이 있기는 한데 난방도 안되고 또 여관 식당에서 밥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자기 집이 역전에서 멀지 않는 곳인데  깨끗하지는  못하지만 자기 집에서 하룻밤을 자고 가라고 말했다.  고마운 그분 덕분에 운봉역에서 고생하지 않고 잠을 자고 아침밥까지 얻어 먹었다. 

 

강 도하지점 결정

그 집을 나와서 최종적으로 지도에서 강을 도하하겠다고 점을 찍어 놓은 위치를 정찰하기로 했다.  이렇게 되니 북한 땅 안에서 3일 밖에 있을 수 없는데 벌써 이틀이 지난 것이다.

  이제는 더 물러설 곳이 없기에 마음을 다잡고 지도에서 점찍어 놓은 위치에 가보았다.  운봉댐 밑이라 물은 적었지만 경비가 강화되어 있었다.  나는 국경 경비 현황을 좀 더 알아보기 위해 운봉역에서부터 다시 반대로 한 역 더 걸어 내려오면서 국경경비 초소의 위치와 그 역량, 그리고 군인들의 정신상태 등 모든 것을 정찰하기로 하고 다시 반대로 철길을 따라 걸어서 내려오기 시작하였다.  그 철길이 압록강을 따라 놓여 있었기 때문에  그 철길이 곧 국경인 것이었다.  여러 초소를 통과하면서 초소 군인들과 이야기도 나누고, 한 발 옮겨 짚으면 중국 땅이기에 중국 사람들이 말하는 말소리도 다 들으면서 한 20리 정도되는 역전 사이를 걸어서 내려왔다. 

마지막 초소에서 근무를 수행하는 군인은 상등병이었다.  그 군인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압록강 물에 발도 씻었다.  마지막으로 그 군인에게 부대에 후방물자가 잘 공급되는가 또 오늘 아침에는 무엇을 먹고 나왔는가 등 여러가지 것을 물어보았다.  그는 내가 장교라서 그랬는지 스스럼없이 다 답변해 주었다.  그난 아침에 통강냉이를 삶아 먹고 나왔다고 했다.  통 강냉이를 삶아 먹는 수준이면 보급물자 공급이 좋지 않음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이 강을 몰래 넘어 갔다오는 사람들이 있을 터이니 그 사람들을 잡아가지고 중국에서 가져오는 좋은 것들을 좀 빼앗아 먹어라. 네가 든든해야 조국이 든든할 거 아니가"라고 말 해 주었더니 그는 이곳이 지형이 좋고 물이 깊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강을 넘어 오가는 사람은 전혀 없다고 말했다.  나도 그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강을 도하할 수 있는 조건과 지형이 좋으면 그 반대로 경비는 더 강화되어 있는 법이다.

나는 그 상등병 말 한마디에 모든 정찰을 끝냈다.  그리고 경비가 강화되어 있으면 그만큼 경비에 동원된 군인들의 정신상태는 해이해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운봉역에서 반대로 철길을 따라 걸어 내려와 정착한 역의 이름은 상강역이다.  그 마을의 이름도 상강 마을이다.  그 상강역에서 시간을 계산했다.  그 때 달이 뜨는 겨절이었기 때문에 달 지는 시간을 계산하니 새벽 3시면 달이 완전히 지는 시간이다.  시간 계산이 끝난 다음에는 강을 도하할 위치를 결정했고 강 건너 중국 땅의 지형도 눈 안에 확실히 넣어 두었다.

상강역 앞에는 바로 만포시 결핵요양소가 있었다. 그 결핵 요양소가 위치한 구역은 국경경비대원들이 근무를 서지 않는다.  그 구역은 결핵요양소가 책임을 지는 것이다.  아무리 결핵요양소에서 근무를 선다고 해도 근무를 서는 사람들이 군인들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래도 총을 가지고 근무를 서는 군인들과는 달랐다.  그래서 강도하 위치를 바로 그곳, 결핵요양소가 위치한 대안으로 결정했다.

심주일 목사의 ‘탈북 일기’는 책 ‘멈출 수 없는 소명’(토기장이) 내용을 출판사의 허락을 얻어 요약, 연재하는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편집자 주

심주일  ukoreanew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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