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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날밤좌측을 바라보면 쿨도 없는 캄캄한 북한 마을, 우측을 바라보면 행복해 보이는 중국 마을

풍찬노숙이라는 말은 북한에서 많이 들어보고 내가 직접 대원들에게 많이 이야기하기도 했다. 왜냐하면 김일성이 항일을 할 때 풍찬노숙을 많이 하였다고 한다. 자동차가 많이 다니고 그중에 버스도 다니는 것을 보았지만 나를 태워줄 차나 버스는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산에서 만난 사람의 안내로 큰 도로에 들어서기는 했지만 도보로 걷는 사람은 나 혼자인 것 같았다. 그 도로는 내가 가는 방향 좌측으로 압록강이 흐르고 있다. 드문드문 포장된 곳도 있었지만 전반적으로는 비포장 도로였다. 도로를 확장하는 중국노동자들이 기계도 없이 손으로 일하는 것을 보면서 계속 행군을 이어 갔다. 도로 좌측을 따라 흐르는 압록강은 물도 맑고 수심도 깊어 보였으며 유속도 꽤 빨랐다. 그 강 너머로 북한 마을들이 보였다. 북한에서 들려오는 트랙터 소리도 들렸다.

벌써 해가 지고 저녁이다. 그런데도 강 건너 북한 마을에서는 집집마다 굴뚝에서 연기가 나지를 않는다. 그래도 아이들이 뛰어노는 것이 눈에 보인다. 뛰어노는 아이들이 아니라면 정말로 그 북한 마을은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다. 날이 저물면서 나도 어둠속으로 깊이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를 데려다가 따뜻한 집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여주고 하루 푹 쉬고 가라고 할 사람을 만나면 얼마나 좋을까. 누가 그래 줬으면 했지만 그럴 사람도 없고 그걸 바란다는 것은 착각에 지나지 않았다. 여기는 중국 땅, 낯선 곳에서의 첫 번째 밤을 이렇게 맞이하고 있었다.

그래도 잠은 자야 할 것이 아닌가. 잠을 자지 않고 행군을 계속 다그칠 수도 있지만 앞으로 얼마를 더 가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나의 건강과 에너지를 잘 조절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어디서 자야 할 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를 않았다. 길옆에 있는 마을들에서는 나 같은 사람이 저 길가에서 고민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나 있는지... 하여튼 마을은 행복해 보였다. 좌측을 바라보면 불도 없는 캄캄한 북한 마을, 우측을 바라보면 행복해 보이는 중국 마을. 만감이 교차되면서 벌써 고향과 가족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어둠이 나의 행군을 멈춰 서게 하였다. 이제 무슨 대책을 세워야 할 것이다. 그때 언뜻 옥수수 짚으로 집을 짓고 그곳에서 하룻밤 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길을 걸으면서 중국사람들의 집에는 옥수수를 밖에다 많이 보관해 두는 것도 보았고 밭에는 지난해 옥수수 가을 걷이를 하고 그 옥수수 짚을 밭 가운데 그냥 세워 놓은 것을 보았던 것이다. 더는 지체할 필요가 없다. 밭으로 들어가 옥수수 짚을 가져다가 집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렇게 하면 될 것을 괜히 걱정했다고 생각하면서 중국 땅에서의 첫날밤을 그렇게 옥수수밭에서 풍찬노숙을 하였다. 그리고 거기서 야곱의 하나님을 만났다. 나는 그 전날 북한 땅 상강역 마당에서 새벽 3시에 불의 형상으로 임하신 하나님을 직접 보았다. 나는 가방에서 빵을 한개 꺼내들고 그것으로 저녁식사를 대신하고 잠자리에 누웠다. 빵도 아껴야 했다. 앞으로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 말이다. 더 먹고 싶었지만 먹지 않았다. 나는 긴장을 많이 하고 육체적으로도 지쳐 있었다. 그러나 비록 옥수수 짚으로 만든 집이었지만 잠은 무척 달고 깊이 잤다. 나의 인생에 있어서의 벧엘은 바로 중국의 어느 한 도로 옆 옥수수 밭 가운데 지어진 옥수수 집이었다.

하나님이 예비하신 조선족 동포들

옥수수 짚으로 지은 집에서 아침 일찍 일어나 압록강으로 뛰어갔다. 압록강 물에 세수하고 머리도 감고 면도도 하고 조깅도 하였다. 이제부터는 모든 일을 빨리빨리 재촉할 일은 없는 듯했다. 여전히 불투명한 대한민국으로 가는 길은 하나님만이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역시 아침식사로 작전 가방에 있는 빵을 한 개 꺼내서 먹었다. 물도, 국도 없었지만 그래도 빵은 맛있었다. 한 개를 먹으니 배부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마음대로 마구 먹으면 안된다.

3월의 압록강 물은 찼다. 그러나 그 물에 발도 씻었다. 발도 잘 관리해야 한다. 행군을 많이 할 때는 찬물에 발을 씻는 것이 좋은 방법이다. 떠오른 햇살이 북한과 중국 온 지면을 따스하게 비추었다. 정확히 몇 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때 다시 행군을 시작했다. 하룻밤 옥수수 짚으로 만든 집에서 풍찬노숙을 하고 나니 더 이상 무서울 것도 없었다. 오늘 저녁도 잠자리가 없으면 또 그렇게 자면 되는 것이다.

다시 도로를 따라 행군을 개시했다. 이 길이 마치 이스라엘 민족이 걸었던 광야 길처럼 여겨졌다. 그렇게 생각하니 오히려 힘이 생기고 은혜가 되었다. 도로는 압록강을 따라 굽이굽이 뻗어 있었다. 지나다니는 화물차, 버스, 승용차, 압록강 물에서 물고기를 잡는 중국 사람들 또 사냥총을 가지고 압록강에 내려앉은 물오리를 쏘아 잡는 사람 등 각양각색의 중국 사람들을 보면서 빠르지도 않게, 그렇다고 느리지도 않게 행군속도를 유지하며 걸어갔다. 도로에는 이정표도 없었다. 도로의 양떼들도 함께 갔다. 중국 공안 사람들도 지나갔다. 이상한 것은 누구 하나 나를 쳐다보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나를 쳐다보고 이상하게 여겼던 사람은 청하 마을을 떠나 산을 행군할 때 만났던 그 중국인 한 사람뿐이었다.

가다가 쉬기도 하면서 계속 행군을 했는데 중국 지형을 보고서는 어디까지 왔는지 잘 모르겠고 압록강 넘어 북한을 보니 만포시가 가까워 오고 있음을 알았다. 만포제련소 굴뚝이 멀리서 보였다. 그렇다면 만포에서 중국 쪽으로 압록강을 넘어서면 중국의 국경도시 집안시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놓고 보면 내가 지금 중국의 집안시에 거의 가까이 오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가 있었다. 집안시가 가까이 오니 도로에는 자동차, 특히 화물차들이 더 많이 다녔다. 오토바이도 많이 다녔다. 계속 행군을 다그쳐 드디어 집안시 초입에 들어섰다.

도시 입구에서부터 길 옆에는 장사하는 사람들로 가득했는데, 그들은 북한에서는 볼 수 없었던 여러가지 상품을 가져다놓고 판매하고 있었다.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생선과 땅콩이었다. 땅콩은 북한에 없지만 그래도 내가 제일 좋아하던 것이었다. 아주 어릴 때 중국 지원군들이 주는 것을 먹어 본 기억이 있었고, 군 복무할 때 황해북도 토산 지방에 기동훈련으로 잠깐 황강교 주변에 주둔하고 있을 때 협동농장에서 심은 땅콩을 먹어본 적이 있었다. 그 다음부터는 땅콩이라는 이름만 알고 있었지 먹어본 적은 없다. 중국 사람들이 파는 것을 한 옴큼 사서 먹고 싶었지만 중국 돈도 없었고 북한 돈도 20원밖에 없었다. 평양에서 떠날 때 가지고 온 북한 돈 300원은 오면서 역전 대합실에 쓰러져 있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에게 무엇을 좀 사서 주고나니 지금 수중에는 20원밖에 남지 않았다.

길 옆 시장을 지나 조금 더 걸어가니 내가 집안시에 들어온 것을 알 수 있었다. 연일 서너끼를 빵으로만 살다보니 밥 생각이 간절했다. 북한 돈 20원이 있기 때문에 밥을 한 그릇 사 먹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음식점들이 많이 보였다. 그러나 온통 중국 글자로 음식점 이름을 소개하고 있었기에 어떤 음식점인지 알 수도 없었을 뿐더러 그들과 의사소통도 안 될 것이 뻔하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조금 더 돌아보니 우리 한글로 쓰인 음식점 간판이 하나 눈에 띄었다. 주저할 것 없이 그 음식점으로 들어갔다. 

음식점에 근무하는 분들은 나를 보는 순간 북한에서 왔다는 것을 금방 알았다. 대번에 "조선에서 왔지요?"라고 물어보는 것이다. 그렇다고 대답을 했다. 우리말을 할 줄 알고 우리말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지 정말 놀라왔다. 음식점 사장은 남자인지 여자인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정이 그 음식점을 운영한다고 했다. 그분들은 나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공안들이 자주 오기 때문에 위험하다는 것이다. 그분들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는데 뒤이어 공안들이 음식점에 들어왔다. 그 공안들은 나를 보고 잡으러 온 것이 아니라 식사를 하러 왔던 것이다. 가슴이 철렁했다.

들이닥친 중국 공안들

음식점 어머니는 공안들을 맞이하고 아버지와 아들로 보이는 젊은이는 집안에서 나를 보호하고 있었다. 공안들이 식사하고 가기를 기다렸고 나는 감히 내다볼 수도 없어서 공안이 몇 명이나 와서 식사를 하였는지 조차 알 수 없었다. 공안들이 돌아가자마자 온 집안 식구가 내 곁에 둘러 앉았다. 이것저것 물어보는 것이 많았는데 지금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한 한 가지는 그들은 온 집안이 다 교회에 다닌다고 했다.

조금 있으니 정말 처음으로 먹어 보는 맛있는 음식을 한상 가득 차려왔다. 그 집 아들로 보이는 젊은 사람과 함께 밥을 먹었다. 정말 맛있게 먹었다. 식사가 끝난 후 그 집 아버지라고 생각되는 분이 이제 어떻게 어디로 가겠느냐고 물어보았다. 속으로는 통화로 가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고 그 마음이 변함이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나의 행동방향과 목적지에 대해서 함부로 말할 수도 없었다. 아무리 교회에 다니는 집이라고 해도 그때에는 교회에 다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잘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통화로 가려고 한다는 말을 숨기고 단동으로 가려고 한다고 이야기를 해주었더니 그 아버지는 대뜸 "아닙니다. 단동으로 가지 마세요"라고 했다. 나는 할 말이 없어 "그러면 어디로 가야 합니까?"라고 물어보니 통화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길을 좀 가르쳐 달라고 했다.

그 집 아버지는 지금 이 상태로 가면 노상에서 공안들에게 잡힐 수 있다면서 신발부터 옷까지 모두 중국인처럼 입혀 주었다. 조선에서 올 때 가지고 온 증명서도 있는가도 물어보았다. 우선 장교신분증, 노동당원증, 대학졸업증, 계급이 달라질 때마다 찍은 사진을 앨범에서 뜯어 가지고 온 것이 있다고 말했다. 그분은 어느 때까지라도 잘 보관해줄 터이니 아무 증명서도 지참하지 말고 그냥 떠나라는 것이다. 사실 그 증명서를 내 몸에서 떼어놓으면 나는 헛것이나 다름이 없다. 장차 나는 대한민국앞에서 그 증명서로 나를 입증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는 믿고 다 내주었다. 어떻게 처음 본 그 사람들을 믿고 주었는지 나도 모르겠다.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이 하신 것이다. 그날 증명서를 내어준 것도 하나님이 나에게 그렇게 하라고 한 것인데 그 때에는 미처 몰랐었다. 물론 그때 그 사람에게 맡겼던 모든 증명서와 사진들이 지금은 전부 대한민국으로 와 있다.

무인지경에서 만난 천사

통화로 가는 길을 가르쳐 준 대로 행군을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는 벌써 해가 서산에 걸려 있을 때였다. 평양을 떠날 때에도 통화로 가야 한다는 마음을 주셨기에 통화까지만 가면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 확신이 내 안에 생겼다. 밤이고 낮이고 통화까지 무조건 행군하려고 하였다. 얼마간 행군을 하였는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날이 저물어 캄캄해 오기 시작하였다. 그래도 이번에는 목표가 설정되었으니 끝장을 내자고 결심했다. 행군속도도 좀 높였다. 그런데 문제는 가면 갈수록 산이 얼마나 높고 험한지 무인지경이고 무서웠다. 이렇게 계속 가야 하는지 갈등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뒤를 돌아볼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다. 

계속 앞으로 행군을 했다. 두려움이 더 깊이 엄습했다. 옥수수 밭도 보이지를 않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길 양 옆으로 불빛이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분명히 그 불빛은 집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조금 더 가까이 가니 정말 집들이 도로 옆으로 하나 둘씩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집으로 뛰어들 수는 없었다. 압록강을 도하하자마자 청하마을 외딴 곳에 있는 중국집을 찾아 들어갔다가 봉변을 당하다시피 쫓겨난 적이 있었기에 함부로 중국 사람들의 집에 접근하는 것은 피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 마을을 벗어나면 영영 집이라고는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어떻게 해서라도 그 마을에서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가지도 오지도 못하고 그냥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조금 있다 어디선가 사람 말소리가 들렸다. 중국말인지 한국말인지 분간이 안갔지만 내가 서 있는 곳으로 오는 것만은 확실했다.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고 있는데 두 사람이 서로 부축이며 걸어가는 모습이 완전히 술에 취한 것 같았다. 중국 사람이라면 말이 전혀 통하지 않을 것이기에 그들에게 도움을 청한다는 것은 어림도 없었다. 그런데 한 50m  뒤에 또 한 사람이 걸어오고 있었다. 여성이었는데 내 앞을 지나가면서 앞에 술 취해가는 사람들을 향해 "여보! 그렇게 부축해 가지말고 엎고 가구래"라고 말했다. 분명 중국말이 아니고 우리말이었다. 나는 '이순간을 놓치면 안된다. 안 될 뿐만 아니라 이 사람을 놓치면 죽는다'라는 심정으로 그 여성의 손을 꽉 잡았다. 그리고 말했다.

"저, 조선에서 왔는데 하룻밤 어디에서든지 좀 재워 주십시오."  그 여성은 따라오라고 했다. 이보다 더 기쁜 일이 또 있겠는가. 하여튼 따라오라는 것을 보니 문제가 해결되는 것 같았다. 그 도로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어느 집에서 집 주인과 중국말로 무슨 이야기를 하더니 그 집에서 하룻밤을 자라는 것이다. 집주인인 남자분이 나와서 나를 맞아주었다. 나를 안내해주었던 그 여성은 마음놓고 이 집에서 자도 된다고 하면서 나를 안심시키고, 자기집으로 가려고 하였다. 그러다가 다시 돌아와서 나에게 "어떻게 지나가던 자기의 손을 잡고 도와달라고 할 수 있었습니까?"라고 물어보는 것이었다. 나는 있는 그대로 말했다. 내 이야기를 들은 후 그 여성은 한국말을 잘하지만 자기는 원래 중국말로 늘 대화를 하는데 그때는 왜 한국말을 했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압록강을 건너려고 첫발을 강에 디뎠을 때 불덩어리로 임재하였던 그 하나님의 도우심이 분명했다.

나는 평양을 떠나 서울까지 오는 과정에서 하나님이 예비하신 손길을 따라오면서 하나님께 쓰임받은 많은 사람들이 나를 도와주었지만 그날 저녁에 나를 도와준 그 여성과 나를 하룻밤 재워준 그 조선족 가족에 대해서는 영원히 잊을 수가 없을 것 같다.(계속)

<부천 창조교회 담임목사>

심주일 목사의 ‘탈북 일기’는 책 ‘멈출 수 없는 소명’(토기장이) 내용을 출판사의 허락을 얻어 요약, 연재하는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편집자 주

심주일  ukoreanew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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