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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명서심주일 목사의 탈북일기(16)

   
 
그날도 새벽 4시30분에 일어나 일을 시작하기 전에 기도를 드렸다. 그날 기도는 "하나님, 중국 신분증을 만들어 주셔서 당분간 중국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 였다. 기도를 간단하게 드렸는데 왜 그렇게 기쁨이 넘치던지.. 그리고 무슨 뜨거운 것이 '꽝' 하고 가슴깊이 와 박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아침부터 너무나 즐거워 혼자 노래를 부르면서 일을 했는데 무슨 일이 반드시 일어날 것만 같은 확신이 들었다. 나는 지금도 자신있게 이야기한다. 그 기쁨과 예감이 곧 하나님에 대한 기도 응답이라고 말이다.

아침 9시 정도였을까. 교회에서 나를 양계장에서 일할 수 있도록 도와준 그분과 다른 두 분이 찾아와 양계장 사장과 무슨 이야기를 하더니 빨리 옷을 갈아입고 어디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어디를 가냐고 했더니 신분등을 만들기 위해 사진을 찍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복을 주시려고 오늘 아침 기도가 그렇게 기쁨으로 넘치고 확신이 들었던 것이다.

그분들을 따라 버스를 타고 백산이라고 하는 시까지 갔다. 거기에서 신분증 사진을 찍었는데 사진을 찍는데까지 중국 공안이 사복을 하고 와 있었다. 그분의 말에 의하면 일주일 후면 신분증이 나온다는 것이다.  사진을 찍고 교회 분들이 하루 좀 쉬고 양계장으로 들어가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내가 맡은 1,872마리의 닭을 한족들에게 임시라도 맡기고 싶지 않았다. 그날도 다시 양계장에 들어가 여느 때와 같이 일을 했다. 통화시에 온 지 일주일 만에 신분증을 받았고 중국 사람이 되었다.

양계장은 산골이어서 그런지 공기총이 한 정 있었다. 짬만 있으면 사장을 비롯한 한족 사람들은 그 공기총을 쏜다. 목표는 여러 가지이다. 병을 놓고 쏠 때도 있고 통조림통을 놓고 쏠 때도 있다. 문제는 누구도 목료를 명중시키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나는 총이라는 것과는 거리가 아주 먼 사람처럼 절대로 그들 사이에 끼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식사 후 병을 목표로 세워놓고 사장을 비롯해서 무슨 내기를 하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보니 아무도 명중시키는 사람이 없고 또 총을 쏘는 것을 보니 그야말로 초보자들이었다. 그들이 어떻게 명중사격의 5대 요소를 알겠는가. 참다못해 내가 한번 쏴보자고 하니 그들이 웃어댔다. 나는 사격자세로 정확히 조준하고 살그머니 격발을 하였다. 어김없이 명중했다. 총은 북한의 것이나 중국의 것이나 같은 것이다. 그들은 환성을 올렸고 그 후부터 사격하는 방법을 계속해서 가르쳐달라고 했다. 적당히 가르쳐 주기는 했지만 정확히는 가르쳐 주지 않았다. 공연히 나의 신분을 의심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간이 있을 때마다  나는 성경을 읽었다. 한족 사람들은 성경을 보는 나에게 찾아와 무슨 책인가 궁금해 하며 옆에서 들여다보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이 어떻게 알겠는가. 점점 중국말로 그들과 소통하기 시작했다. 하루가 다르게 중국말이 내 귀에 들리기도 하고 나 또한 자연스럽게 중국말을 하게 되었다. 내가 하는 말을 그들 한족들도 알아들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대부분 한족들은 청년들이었는데 한 청년이 나를 놀릴 목적으로 내가 물어본 중국말에 대하여 정확히 가르쳐 주지 않고 거짓말로 가르쳐 주었다. 나는 그것을 그대로 암기하고 암기한 대로 중국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니 통할 수도 없거니와 그들 한족들은 자꾸 웃기만 했다. 대뜸 속았다는 것을 알고 그 청년을 데리고 조금 외딴 곳으로 끌고가 차고 다니던 북한군 단도를 뽑아들고 위협을 하니 무릎을 꿇고 빌었다. 그후 다시는 이런 일은 없었다.

양계장에서 2km 쯤 떨어진 곳에 리명이라는 마을이 있었는데 그 마을에는 조선족 동포가 약 30퍼센트 정도 살고 있는 것 같았다. 떠오르는 아침해를 제일 먼저 보는 마을이기 때문에 '리명'이라고 한다고 한다.  그 마을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족 동포들의 대표가 한 분 계셨는데 그분을 박대장이라고 불렀다. 양계장에 북한에서 동포가 한 사람 와 있다는 것을 알고 그들은 자주 나를 데려다가 마을에서 잔치를 했다. 그럴 때마다 그들은 먹고 마시고 노래를 부르는데 중국노래든 한국노래든 북한노래든 다 잘 불렀다. 나는 노래를 잘 부르지 못해서 그때처럼 곤혹을 치른 적이 없다. 지금도 그 박대장이 그리워진다. 하나님이 기회를 주시면 언제든 그를 다시 만나고 싶다.

일과표대로 경건생활을 하다

양계장에서의 나의 신앙생활은 별다른 것이 없었다. 교회에 다닐 수도 없었고 당연히 예배를 드릴 수도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는 참으로 친밀하고 돈독한였던 것 같다. 시간만 있으면 성경을 읽는 것을 습관으로 만들었다.

중국의 한족들은 아무것도 읽는 것이 없다. 일하고 밥먹고 잘해야 양계장에 있는 흑백 TV를 보는 것이 문화생활의 전부였다. 중국의 TV는 계속 같은 방송이 반복해서 나오고 광고 방송이 주를 이루는 것 같았다. 내가 시간이 있을 때마다 성경을 읽자 그들은 나를 참으로 대단한 인물로 보는 것 같았다. 한번은 팡나라고 하는 청년이 와서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는 흉내를 내면서 그것도 할 줄 아는가를 물어보았다. 나는 사실 컴퓨터를 몰랐다. 그러나 그가 무엇을 물어보는지 몰라 무작정 할 줄 안다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엄지 손가락을 보이며 중국말로 '팅호, 팅호'하면서 나를 좋게 평가하였다. 닭을 잘 관리하여 한 마리도 죽이지 않지, 총도 잘 쏘지, 중국말도 빨리 배우지, 시간만 있으면 책을 보지, 닭장 관리도 떡이 떨어져도 주워 먹을 정도로 깨끗하게 하지 그러니 더이상 그들도 나를 우습게 볼 수 없었다. 솔직히 나는 민족적 자존심을 가지고 일을 했을 뿐이다. 한족들에게는 어떤 것을 해도 지고 싶지 않았다.

날마다 새벽 4시 30분이면 기상을 했다. 군대에서도 이런 새벽에는 비상이 아니면 일어난 적이 없었는데 나는 이 시간에 무조건 일어나는 습관을 만들었다. 그때 일어나서 산을 향하여 조용히 혹은 크게 기도하는 것이 그렇게 좋았다. 시편기자가 시편 121편 1-2절에서 노래한 것처럼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이 시를 노래한 기자가 꼭 나와 같은 형편에 있었을 때에 기도로 이 시를 노래한 것 같았다. 양계장은 눈을 뜨면 앞에도 산, 뒤에도 산 그러니 기도를 한다고 해도 산을 향하여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나는 그때야 비로소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를 듣고 계시며 응답하신다는 체험을 하기 시작했다. 인생의 뒤를 돌아보니 전부터 하나님은 나를 알고 계셨고 나의 마음과 나의 이야기를 다 듣고 계셨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참 이상한 것은 기도를 할 때 하나님께서 들으시는 기도와 또 그렇지 않은 기도를 알 수가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 일어날 일도 기도를 통해서 조금씩 알 수 있었다.

또 밤이면 잠도 자야 하지만 중국에 와서 나를 도와준 교회의 그 여성분을 통해서 소형 라디오를 얻었고 여전히 한국의 목사님들의 설교를 매일같이 듣고 메모했다. 양계장에서 일을 하는 동안 말씀을 규칙적으로 읽고 또 새벽에 기도하고 방송으로 설교를 들으면서 나의 소명은 더 확실해졌다. 즉 북한의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알려야 하고 또 그 일을 하는 것이 나의 소명인 것을 나 자신에게 거듭 확인시켰다. 이 마음은 분명히 하나님이 주신 것이고 나의 소명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에 어서 빨리 대한민국으로 가고 싶었다.

통화시에 있는 교회에서는 시간이 있을 때마다 나에게 면회를 왔다. 신발, 속옷, 간식 등 필요한 생필품들을 다 사가지고 왔다. 이상한 것은 교회 일꾼들이 오지만 정작 나에게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는 이야기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교회를 통해서 양계장에 들어왔으니 자연히 하나님을 믿겠지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하나님을 믿으라고 말하거나 또는 하나님을 알리기 위해 성경이나 기타 다른 책들을 가져다 주지는 않았다. 시간이 있을 때마다 성경을 보고 새벽 4시 30분이면 어김없이 일어나 새벽기도를 한다는 것을 하나님이 그들에게 먼저 알려준 것 같다.

맡겨둔 증명서를 찾다

양계장에서의 시간이 두 달여 지나가고 있었다. 이제는 중국말도 조금은 배워 자신감도 좀 있었고 중국 사람들이 운영하는 이발관이나 슈퍼에 가서 혼자 마음껏 물건도 살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이제는 빨리 대한민국으로 가야했다. 더이상 우물쭈물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하나하나 점검을 해보니 집안시 조선족 동포 한 가족이 운영하는 음식점에 두고 온 당원증, 장교신분증, 대학졸업증, 계급이 달라질 때마다 찍은 사진을 가져와야 한다는 생각이 났다. 그것들 없이는 대한민국에 갈 수도 없고 간다고 해도 나를 증명할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우선 대한민국으로 걸음을 옮기는 데 있어서 첫째는 집안시 조선족 동포 음식점에 놓고 온 모든 증명서를 찾아오는 것이고, 둘째는 어떻게 그곳을 다녀올지를 놓고 하나님께 기도드렸다. 결국 늘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하라고 했고 또 도와주었던 교회의 그 여성을 또 찾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집안시에 모든 증명서가 있다는 사실과 이제는 대한민국을 향해 떠나야겠다는 나의 결심을 이야기했다. 그 여성은 나의 결심에 적극 찬성했고 , 우선은 집안시에 있는 증명서를 자신이 직접 찾아오겠다고 했다. 하나님은 역시 배후에서 나의 모든 일상을 돕고 계셨다. 한편 그 증명서가 그 음식점에 그냥 있을까 걱정도 되었지만 어쨌든 찾으러 가보긴 해야 할 것이다.

그 여성은 당장 집안시로 나의 증명서를 찾으러 떠난다고 했다. 그래서 음식점의 위치를 정확히 알려주었다. 버스를 타고갔는지, 기차를 타고갔는지는 모르지만 그녀는 어째든 집안시까지 무사히 다녀왔고 내가 맡긴 모든 증명서들을 하나의 손실도 없이 전부 찾아왔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다.

그녀가 모든 증명서를 나에게 전해줄 때 나는 그것을 가슴에 꼭 안고 "다시는 너를 떼어 놓지 않을 것이다" 굳게 마음먹고 대한민국 정부 앞에 그것으로 나를 증명할 때까지 잘 간직해 두었다. (계속)

심주일 목사의 ‘탈북 일기’는 책 ‘멈출 수 없는 소명’(토기장이)에 나온 내용을 출판사의 허락을 얻어 요약, 연재하는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편집자 주

<부천 창조교회 담임목사>

심주일  ukoreanew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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