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년 전 3.1혁명의 함성을 드높였던 거리. 그 해 1월 22일 고종이 ‘독살되었다’는 흉흉한 소문의 진원지 덕수궁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 3.1혁명으로 일제의 무단통치가 더 간악한 ‘문화통치’로 바뀌었을 때 그 산물로 간행된 동아일보, 조선일보가 자리한 데서 멀지 않은 곳, 그곳이 광화문 네거리요 청계광장이다.

오전에는 이곳에서 멀지 않은 덕수궁 중명전(重明殿)에서 <다시 3·1정신으로 민족을 살리자>는 제목의 333인 ⌜2016 독립선언⌟이 있었다. 중명전은 1905년 11월 17일,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대한제국의 신료들을 겁박하여 을사늑약을 강제했던 곳이다. 역사적인 이곳에서 작년 이맘때는 경술국치를 맞아 전 재산을 정리하여 망명, 신흥무관학교를 세웠던 ‘이회영과 그 형제들’에 대한 전시회를 열었던 곳이다.

333인 ⌜2016 독립선언⌟은, 3·1절을 맞는 오늘 97년 전 선열들께서 기약했던 겨레의 환희와 삶의 기쁨을 누리고 있지 못하고 나라와 겨레의 생명이 폭풍 앞에 선 등잔불 같음을 고백하면서 참으로 죄스럽고 부끄럽다고 실토한다. 천신만고 끝에 도로 찾은 광복의 날,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친 그 기쁨이 잠시였다. 북핵을 해결하기 위해서 ‘반드시 지켜야 할 민족자주원칙’이 중대한 위기를 맞고 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불가역적”이란 합의 자체가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이며, 그러기에 돌이켜야 할 합의임이 분명하다. 선언은 세계인권운동사에 길이 남을 한국여성인권운동가들의 눈물겹고 위대한 투쟁을 이렇게 천박하게 매도(賣渡)하고 일본 정부에 면죄부를 준 한국정부의 무능과 일본정부의 파렴치를 질타한다. 나아가 선언은 침략과 식민지배를 인류역사에서 영원히 추방하려는 정의로운 역사인식를 바탕으로 한일협정을 새롭게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오후 12시 반부터는 파이낸스 빌딩 앞에서 <역사교과서 국정화와 ‘역사범죄’ 관련 20대 총선 집중심판> 관련 기자회견이 있었고, 이어서 ‘한국사교과서국정화저지네트워크’ 주최로 역사 퀴즈 모임이 있었다.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모여든 청소년들의 역사이해의 정도가 대단하다는 것을 보면서 새봄 새로운 희망을 갖게 된다. 그러나 그 옆에서 고성확성기로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간간히 “구주의 십자가 보혈로 죄 씻음 받기를 원하네”, “예수는 우리를 깨끗게 하시는 주시니 그의 피 우리를 눈보다 더희게 하셨네” 등 부흥회에서나 부르는 찬송으로 이웃 집회를 방해하는 광신 예수쟁이들의 '행패'는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는 정도를 넘고 있었다.

오후 3시부터 청계광장에서는 정대협 주최로 <heart 이모티콘.1 한일 일본군 ‘위안부’ 합의 무효 전국행동의 날, “함께 손잡고 정의를 되찾자!”>의 서울행사가 있었다. 정확히 셀 수 없는 수많은 인파와 깃발, 플래카드가 즐비한 가운데 첫발언자로 등단한 천주교전국행동의 권오광 신부는 작년 12월 28일에 한일 외무장관이 선언한 합의(합의문 보기)에 대해서 질타했다. 이어서 등단, ‘종군 위안부’역을 대신하여 그 처참했던 삶을 애잔하게 술회한 배우 강예심 선생, 그는 경상도 억양으로 듣는 이들을, 전선이라는 명분으로 야수적인 행동을 정당화하려는 그 미칠 듯한 현장으로 이끌었다. 여성이 유린당하는 처참한 모습을 조용한 음성으로 토해낼 때는 전율과 분노를 동시에 느꼈다.

▲ 지난해 12월 28일 서울에서 열린 한일 외교장관회담에서 한일 외무장관이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문제와 관련 합의안을 설명하고 있다. ⓒ외교부

이어서 등단한 나는 먼저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역사적 입장은 천년이 흘러도 변할 수 없다”는 말과 그 해결책으로 “피해자가 수용할 수 있고 국민이 납득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을 인용한 후 이 말이 맞는지를 물었다. 청중들은 모두 “맞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그 말이, 10억엔에 소녀상을 철거하는 것으로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으로 합의하는, 모욕적 사건으로 바뀌어진 데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다시 물었다. 아베는 진정한 사과가 없었고 1993년의 고노 요헤이의 발언마저 애매하게 만들어 버렸다고 지적했다. ‘12.28’의 ‘불가역적 합의’는 합의 직후 일본 측은 딴소리를 하는 것으로 나타났고 우리 정부는 충실히 지키기에 급급하다. 올해 배포하는 초등학교 6학년 교과서에는 소녀상도 ‘위안부’라는 말도 빠져버렸다. 그런 상황에서 2001년 이래 일본의 후쇼샤 판 등의 일본의 역사교과서를 더 이상 비판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뿐만 아니라 국제사회를 향해 끈질기게 일본의 만행을 폭로해온 노력마저 이제는 스스로 재갈을 물려야 할 것이라고 했다. 그 동안 유엔 회원국들이 여성을 전쟁범죄에 이용해온 일본의 만행을 지적하며 한국의 노력을 지지해 왔는데 이제 그들에게 할 말이 없게 되었다는 것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문서조차 공개하지 않는 ‘12.28’합의가 이렇게 우리의 양심과 정의를 짓밟고 있다. 1905년의 을사늑약도 비준을 거치지 않고 우리의 외교권을 빼앗아 가더니 ‘12.28’합의는 그 소상한 과정조차 밝히지 않은 채 한국인의 사상과 언론의 자유를 옥죄고 있다. 일본은 1965년 한일기본조약 때에 거론되지도 않은 ‘종군위안부’의 문제가 그 기본조약에 의해 해결되었다고 주장한다. '12.28'합의를 폐기하자면, 결국 1965년의 굴욕적인 한일조약을 폐기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주장하게 되었다. 청계광장의 부르짖음은 3.1절을 맞아 이날 오전에 333인이 선언한 ⌜2016 독립선언⌟과 맥을 닫게 되었다.

이만열/ 전 국사편찬위원장, 숙명여대 명예교수

이만열  mahnyo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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