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몇 년 만에 조국을 찾은 이동욱 교장선생님을 인천에 가서 뵙고 환담을 나누었다. 한때 그 학교에서 동역했던 홍성현 목사와 김창락 교수가 동행, 경인선 전철을 타고 가서 교장 선생님을 맞았다. 인천에서는 이 교장선생님과 신의주상업학교 시절부터 벗이었던 김덕용 교장선생님과 조성훈 교장선생님 그리고 졸업생 몇 분도 차 모임과 대화에 참여했다.

이동욱 선생님을 뵙게 된 것은 1963년 내가 대학을 졸업했을 때다. 서울 소재 박물관에 응시하려고 준비하던 내게 홍성현 목사(당시 신학생)가 와서 무조건 인천으로 가자고 했다. 당시 홍 목사와 나는 재학 시절 신앙운동을 같이 했는데 그가 1년 먼저 졸업하고 교장 선생님과 동역하고 있었다. 이 무렵 같은 대학의 몇 몇 선배들이, 기독교적 설립목적을 분명히 하면서 새로 시작한 인천의 이 학교를 돕자고 의기투합하여 앞서거니 뒷서거니 나서던 때였다. 이때 내 앞서 참여한 분들이 홍성현 김창락 두 분 외에 손봉호 이명섭 최관식도 있었다. 그 무렵 그 학교에서 봉사했던 교사들 대부분은 얼마 안가 유학하거나 대학에서 가르치게 되었다.

그 무렵 내가 뵈었던 교장선생님은 40세가 채 되지 않았다. 면접하면서 나눈 대화에서도 시원시원했고 트인 분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대화에서는 유머가 넘쳤고 교사들과는 상하관계 같은 것이 보이지 않았다. 교사들의 자발성을 최대한 보장하면서 그런 교육방침이 교육 현장에도 스며들도록 했다. 첫 직장이었던 그 학교는 교무실은 물론 학교 전체가 가족 같은 분위기였고, 개교된 지 얼마 안되어서 그런지, 교사들간의 관계나 학생과의 관계에서도 존경과 사랑이 넘쳐났다. 그러나 오늘 와서 당시 동역했던 여러 선생님들의 안부를 물으니 대부분이 불귀의 객이 되었다. 50여년의 세월이 다정했던 친구들과의 건너지 못할 강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시절의 학교를 생각할 때마다 내 생애에서 가장 축복된 시간이었다고 자부한다.

당시 나는 그 학교 교사로 가기 전에 대학원에 진학했다. 교장 선생님을 처음 뵈었을 때 이 점을 숨기지 않았다. 그때 그의 대답이 참으로 의외였다. 학교 생활에 지장이 없는 한 개인의 발전을 얼마든지 돕고 싶다는 것이었다. 이런 그의 자세는 2년 후 내가 그 학교를 사임하려 할 때도 꼭 같았다. “나는 우리 학교가 중요하다고 해서 이 선생 개인의 성장과 발전을 가로막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이 선생 같은 분의 개인적 성장은 우리 학교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라고 기꺼이 내 사임을 허락했다. 한 기관의 장으로서 이런 철학을 갖는다는 것이 지도자의 길이라고 생각한다. 뒷날 내가 기관장이 되었을 때에 이 교장선생님의 이런 철학은 인사를 처리함에 큰 귀감이 되었다.

오늘 인천에서는 김덕용 선생님의 안내로 경인면옥에 가서 점심을 들었다. 경인냉면을 먹자는 제의는 김창락 교수가 했는데, 이는 내가 바라던 바였다. 김 교수가 그 시절의 경인냉면을 잊지 못하듯이 나 또한 그랬다. 그때 인천에 와서 처음으로 냉면이란 걸 먹어봤고 그 상큼한 맛을 잊지 못한다. 신포동과 내동의 현대화된 거리에서 50여년 전의 추억을 떠올리는 것은 쉽지 않았지만, 냉면 한 그릇이 나와 김 교수를 50년 전으로 되돌려 놓았다. 오후에 하버호텔에서 이 교장선생님을 뵙고 추억어린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다. 여러 이야기 끝에, 나는 교장선생님이 섣달그믐 같은 날에 교사들을 당신의 집에 초대하여 식사를 대접하고 판돈 일부를 나눠주시면서 몇 시간 동안 ‘섰다’라는 화투놀이를 하도록 했던 이야기를 해서 좌중이 웃었다. 나로서는 화투패를 그때 처음 대했기 때문에 퍽 인상깊은 추억이다.

이동욱 교장선생님은 인천에서 서울의 정신여학교로 옮겨 봉직했다. 그 시절 이야기를 하시면서 정신 출신의 현직 김 모 대법관 이야기를 간단히 언급했다. 그 대법관은 내 고교동기의 딸이기도 하다. 또 하나 그가 정신 교장으로 계실 때 한국에 선교사로 왔던 요시다 목사를 도운 이야기도 곁들이면서, 요시다 목사의 딸 노리꼬가 정신을 마친 뒤, 대학 진학을 위해서 나와 상의한 적이 있다는 말씀도 했다. 노리꼬는 외국인 특례형식으로 내가 봉직했던 대학에 입학하게 되었고, 대학을 제대로 마치기 위해서는 자상한 지도가 필요할 것 같아 역사를 공부하고 싶다는 본인의 의사를 고려하여 내가 소속한 학과의 학생으로 입학, 4년을 잘 마쳤다. 교장선생님은 그 이야기를 하시면서 노리꼬가 한국에서 대학을 마치게 된 것은 이 선생의 덕분이라면서 늘 내게 빚진 자 같은 심정이었다고 했고, 오늘 만나 그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게 되어 시원하다고 했다.

정신여학교를 끝으로 그는 따님이 머무는 미국으로 이주, 3년 전에 헌신적인 사모님을 여의고 현재는 따님의 도움을 받고 있다. 14일 고국을 떠나면 언제 다시 재회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인자하고 고운 풍모를 지니신 그는 올해 92세, 나는 아직도 그와 같은 깨끗한 인품과 포용적인 지도력을 가진 교육자를 뵌 적이 없다. 그러기에 오늘 만남을 참으로 기쁘게 생각하며 이 날의 인연을 몇 자 글로 남기지 않을 수 없다. 이 교장선생님의 남은 생애가 더 축복받는 삶이기를 기원한다.

이만열/ 숙명여대 명예교수, 전 역사편찬위원장

이만열  mahnyo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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