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아이들의 발걸음, 분단·분쟁을 가로지르다

아침 8시 20분. 부랴부랴 집을 나선다. 아들 녀석이 묻는다. 무슨 취재를 하러 가냐고. 임진각 평화행진에 동행하는 거라고 말은 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아이들도 데리고 갈 걸 그랬다. 그치만 미세먼지에 초여름 날씨에 뙤약볕을 걷는 거니까 가만히 있는 게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가만히 있는 게 말이다.

일산에서 임진각까지 30분이면 충분할 줄 알았는데 네비를 켜니 9시 5분이 찍힌다. 큰일이다. 원래는 30분 정도 일찍 가서 분위기도 보고 마음도 다질 거라 생각했는데 제 시간에 맞추기도 어렵게 생겼으니 말이다. 마음은 급한데 자유로로 빠져나가는 길엔 웬 신호등이 이렇게 많은지, 한 군데선 신호등도 위반하고, 자유로에선 속도도 위반하면서 달리고 또 달렸다.

안개인지 미세먼지인지 모를 자욱한 공기에 사위를 분간할 수 없다. 지금 남북의 현실을 상징하는 것인가. 안개등까지 켜고 달렸다. 제법 빨리 달렸는지 도착 예정시간은 9시로 줄었다. 임진각 입구에 도착하니 스텝들이 안내를 서고, 곳곳에 경찰차도 보였다. 혹시나 보수단체에서 반대 집회나 하는 건 아닌지 살짝 걱정도 됐다.

긴 차량 행렬이 주차장에 들어서려고 줄을 지어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주차비를 받는 사람은 달랑 한 명이다. 예전엔 임진각 행사에 오면 주차장 관리소 측에서 2명 정도 나와서 주차비를 받았던 것 같은데, 보수 쪽 행사가 아니라고 주차비 받는 것도 신경을 안쓰는 것인가.

차를 주차장 중간 쯤에 주차했는데 망배단 쪽으로 가야 하는지 평화누리공원 쪽으로 가야 하는지 헷갈린다. 망배단 쪽엔 꽤 많은 관광버스가 들어선다. 뒤따라서 수십 명의 외국인 관광객들이 내린다. 오늘 여성평화걷기에 저 외국인들도 함께 하는 걸까? 망배단 쪽에 붙은 커다란 안내지도를 보니 <DMZ 안보관광 안내>라고 되어 있다. ‘DMZ 관광’이면 관광이지 왜 ‘안보’를 붙인 걸까? ‘안보’라는 이름으로 상대방을 비판하고 비난하고 모든 책임을 떠넘기고, 그러다 보면 알게 모르게 사람들의 한 쪽 귀와 눈은 자연스럽게 그 상대방을 향해 닫히게 된다. 그것이 ‘안보’라는 이름으로 행해온 못된 의식적 교육이었다. 그것은 상대방 북한에서도 똑같이 해오고 있는 짓이다. 그렇게 해서 양쪽 국민들은 정권의 논리에, 이념의 논리에 맹목적이건, 알면서도 어쩔 수 없건 길들여지게 되는 것이다. 분단 70년이 넘도록 요 모양 요 꼴로 부끄럽게 살고 있는 우리의 자화상이다.

이런 생각을 하다가 어제 주최측에서 보낸 문자를 다시 확인해봤다. 평화누리공원 쪽으로 오면 접수대가 있다고 되어 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반가운 얼굴을 만났다. 최은상 목사님과 윤은주 박사 부부다. 거의 바캉스 복장이다. 시원하고 보기 좋다. 뒷차에서 플래카드며 나눠줄 책자를 잔뜩 꺼넨다. 시민운동가답다.
접수대로 들어서니 사람들이 바글거린다. 그런데 중학생, 고등학생들이 꽤 된다. 아예 중고등학생들은 학교별로 단체 접수를 받고 있다. 어떻게 된 것일까? 이런 ‘불온한 행사’에 학교장이 허락해줬을 리는 만무할 텐데. 한 아이를 붙잡고 물어봤더니 ‘봉사 점수 때문’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중학교 3년 내내 60시간의 봉사를 해야 하는데 오늘 행사로 7시간을 딸 수 있다니 아이들에겐 이만한 봉사활동도 없는 셈이다. 그런데 다른 아이한테 물어봤더니 ‘평소 통일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그러면 이렇게 정리하면 될 것 같다. 평화통일 행진도 할겸 봉사 점수도 딸겸, 꿩 먹고 알 먹기 위해 참석했다고 말이다.


▲ 28일 오전 9시 임진각 평화누리공원과 생태탐방로 일대에서 열린 2016 여성평화걷기 행사에서 주최측 인사들이 한반도 평화조약을 촉구하는 현수막을 들고 행진하고 있다. ⓒ유코리아뉴스


▲ 2016 여성평화걷기에 참여한 윤후덕 국회의원(왼쪽 두번째)을 비롯해 경기도의회 의원들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유코리아뉴스


▲ 구호를 외치는 참석자들 ⓒ유코리아뉴스

본격적인 걷기에 앞서 내빈 인사가 이어진다. 제법 유명한 이들도 꽤 온 것 같다. 파주의 윤후덕 국회의원은 큰 소리로 “우리가 오늘 걷는 이 길이 분단을 허물고 평화를 내는 길이 될 줄 믿는다”며 참석자들을 격려했다. 그러면서 이 자리에 ‘통일의 꽃’ 임수경 국회의원도 참석했다고 소개했다. 하지만 그 많은 여성들 틈 사이 어디에 숨었는지 임 의원의 얼굴은 끝내 찾지를 못했다.

회색 복장의 수녀들도 많이 참석했다. 4대강 때도 그랬고, 제주해군기지 건설 때도 그랬고, 비록 나와 종교는 다르지만 천주교의 신부, 수녀들은 몸을 아끼지 않고 반대 시위에 나섰었다. 그것은 순리대로 흘러가야 할 이 땅의 자연, 평화를 위해 온몸으로 바치는 기도였다고 나는 믿는다. 그래서인지, 그들 앞에서는 왠지 모르게 머리가 숙여진다.


▲ 걷기가 본격 시작됐다. 풍뭁패가 선두에 섰다. ⓒ유코리아뉴스

긴 서막이 끝나고 드디어 걷기기 시작됐다. 풍물패가 길을 튼다. 과거 캠퍼스 시위에서는 어김없이 풍물패가 시위대의 맨 앞에 섰었다. 그때의 풍경을 보는 것 같다. 그런데 풍물패 바로 뒤를 따르는 선두는 유명인사들이 아니었다. 10대의 학생들이었다. 왜 그렇게 했냐고 주최측에 물을 겨를도 없었다. 학생들 틈에 끼어 휩쓸려갔다.

큰 도로를 건너는데 경찰도 없다. 분명 집회는 신고됐을 텐데 경찰조차 보호해주지 않는 이유는 뭘까. 학생들의 긴 행렬이 길을 건너자 달려오던 대형 버스가 멈춰선다. 맞은편 트럭도 학생들 앞에 멈춘 채 보고만 있다. 아찔한 상황이었지만 역설적이게도 평화는 폭력을 끊어버리는 놀라운 힘이 있다. 아이들 자체가 평화인 것이다.


▲ 학생들이 임진각 입구 도로를 횡단하고 있고, 지나가던 버스와 트럭이 멈춰서 있다. ⓒ유코리아뉴스

도로를 건너니 이내 농로로 들어섰다. 오른쪽은 논, 왼쪽엔 멀리 임진강, 그 건너편엔 북한 땅이다. 그런데 좁은 농로로 승용차며 트랙터가 저만치 오고 있다. 결국 마주오던 승용차와 트랙터는 그 자리에 멈춰선다. 학생들의 긴 행렬이 지나가고 난 뒤에야 비로소 움직인다. 평화는 이렇게 또 다시 폭력을 멈춰서게 했다.
학생들 틈에 아까부터 인상 좋은 할머니 한 분이 끼어서 걷고 있다. 나랑 멀지 않은 간격으로 걷다가 할머니가 나에게 핸드폰을 주며 사진을 한 장 찍어달라고 하신다. 자연스럽게 말문을 텄다. 할머니는 올해 나이가 71세, 천주교 단체에서 왔고, 고향은 북한의 평양이라고 한다. 아버지는 북한에 가서 사실 거라며 일부러 북한에 가까운 철원에서 사시다가 돌아가셨다. 북한에 가는 걸 얼마나 확신했는지 이산가족 신청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할머니도 원래는 북한에 갈 마음이 없었는데 나이 일흔이 넘으니 비로소 북한에 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진다고 하신다. 그래서 뙤약볕에도 불구하고 오늘 여성평화걷기에 오신 거라고.


▲ 좁은 농로를 따라 길게 이어진 학생들의 행렬. 지나가던 트랙터가 멈춰서 있다. ⓒ유코리아뉴스

내 옆에는 한 명의 길동무가 더 있었다. 중1 짜리 남학생. 현수막을 들고가는 게 힘들어보여 물어보다가 통일에 대한 학생의 식견에 그만 폭 빠지고 말았다. 평양 지하철이 왜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지(그건 전쟁 때문이라며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스위스 같은 산악지역을 타고 올라가는 기차에 관심이 많다는 둥, 자신의 꿈은 철도연구소 연구원이 되는 거라는 둥, 그러면서 길섶의 풀, 벌레, 채소에 대해서도 관심과 식견이 깊다. 궁금한 것은 왜 그리 많은지, 뙤약볕을 걷는 내내 아이는 나에게 묻고 조잘거리는 걸 멈추지 않았다. 덕분에 3시간 가까운 평화걷기는 한 순간도 지루할 틈이 없었지만, 때문에 잠시도 이 땅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 기도할 시간은 없었다.

멀찍이 있는 임진강을 따라 걸으며 중딩이 그런 말을 했다. “저 임진강에서 남북이 뭔가 같이 할 수 있는 게 없을까요?” “왜 없어? 같이 농사를 지어서 ‘통일’ 이름으로 팔아도 되고, 같이 마을을 만들어 살아도 되고.” “그런데 그게 될까요?” “왜 안돼? 꿈은 이뤄지라고 있는 거잖아. 네가 몇 년 후 고딩이 되면 수학여행도 기차 타고 북한으로 갈 수도 있어. 그리고 네가 군대 갈 나이 쯤 되면 군대 가고 싶은 사람만 가는 걸로 바뀔 수도 있고.” 중딩은 믿기질 않는지 어쩔 줄 몰라 웃기만 한다.


▲ 농로를 걷는 아이들 왼쪽 뚝방길이 임진강 철책선이다. 이 길로 되돌아가고 싶었지만 갈 수 없었다. ⓒ유코리아뉴스

할머니, 중딩과 얘기하다 보니 나중에 돌아오는 길엔 ‘취재’ 생각은 까마득히 잊고, 그냥 이들의 일행이 되어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어느 행사에서든지 ‘취재’가 아니라 ‘대상’이 아니라 그 속에 들어가 그 일원이 되는 것, 그것을 많은 사람들은 기자의 본분을 잊는 것이라고 하지만, 어쩌면 진정한 기자 되기가 바로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다시 임진각 평화누리공원 입구 가까이 오니 신나는 꽹과리, 장구 소리가 더위에 지친 우리를 응원해준다. 거기다 평화누리공원을 스치는 바람이 마음속까지 시원하게 해준다. 아이들은 잔디밭에 털썩 주저앉았다. 나 역시 본분으로 치면 열심히 사진을 찍고 주최측을 만나야 할 상황이지만, 학생들 뒤에 털썩 주저앉았다. 피곤하기도 했지만, 나도 그 일원이니까.


▲ 3시간여의 평화걷기를 마치고 평화누리공원으로 들어서는 일행들 위로 전시해놓은 전투기가 보인다. ⓒ유코리아뉴스

잠시 후 다시 마무리 행사가 시작됐다. 처음 출발할 때보다 사람들은 반 이상 줄었다. 원래 모든 행사가 다 그런 거지 뭐. 더군다나 통제도 거의 없고 자유분방한 오늘 같은 평화걷기 행사야 얼마나 더 자유로울 것인가. 가야 하는 사람은 가야 하고, 남을 사람은 남는 거고, 이런 자유로움 속에서 평화는 피어나는 것이니까.

무대에 오른 수십 명의 여성들의 ‘평화의 합창’에 이어 ‘2016 여성평화걷기 선언문’이 낭독됐다. 어느 행사건 선언문을 내걸지만 오늘 여성평화걷기의 선언문은 남다르게 다가왔다. 그것은 분단과 남북관계의 절연으로 남녘에서 북녘으로 갈 수 있는 마지막 선에서 외치는 간절한 평화이기 때문이다. 선언문은 이렇게 호소하고 있다. “한반도를 휘감고 있는 전쟁의 기운은 대화와 협력을 통해서만 해소할 수 있습니다. 평화협정을 통해 한반도 영구 평화의 초석을 놓아야 합니다. 1953년 체결된 정전협정 4조 60항에 규정된 바와 같이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해야 합니다.”

이번 여성평화걷기는 전쟁과 분쟁의 가장 큰 피해자인 여성들의 힘으로 평화를 만들기 위한 것이다. 선언문은 이렇게 맺음을 하고 있다. “평화는 오직 평화적인 방법을 통해서만 이룰 수 있습니다. 무력으로, 혹은 궁핍한 이들의 삶을 더욱 피폐하게 만드는 방식으로는 결코 평화를 이룰 수 없습니다. 여기 모인 우리는 이 땅에서 전쟁의 위협이 영원히 사라지는 그날까지 평화의 발걸음을 결코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2016년 5월 28일.”


▲ 28일 오전 9시 임진각 평화누리공원과 생태탐방로 일대에서 열린 2016 여성평화걷기 행사에서 주최측 인사들이 한반도 평화조약을 촉구하는 현수막을 들고 행진하고 있다. ⓒ유코리아뉴스


▲ 2016 여성평화걷기 행사가 열린 임진각 평화누리공원 하늘은 평화 그 자체다. ⓒ유코리아뉴스

선언문 뒤엔 여성들이 만드는 한반도 평화기원 플래시몹이 이어졌다. 일명 ‘One Billion Rising for Women Peace'이다. 흰색, 파란색, 자주색, 분홍색 긴 천을 서로 맞잡고 빙글빙글 도는 모습은 역시 격식 없이 자유분방하지만 평화롭다. 신명 난다. 이 여성들이 앞으로 한 달에 한번 광화문광장에서 평화기원 춤을 출 것이라고 하니, 시위문화가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 될 것 같다.

평화도 통일도 누군가 그냥 던져주지 않는다. 외치고 움직이고 행동할 때, 전쟁을 나무라고 분단을 말로써 삶으로써 반대하고 거부할 때, 조금씩 조금씩 다가오는 게 바로 평화다. 통일이다. 오늘 여성평화걷기에 참여한 이 작은 몸짓들이 이 분쟁과 분단의 땅에 평화와 통일을 한 걸음 쓱 다가오게 했기를.

김성원 기자 ukoreanew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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