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양 선생님, 선생께서 가신 지 69주년이 되는 날, 선생님의 뜻을 기리는 후생들이 선생님의 묘 앞에 부복했습니다. 1947년 7월 19일 하오 1시 반, 그 날도 주변에서는 선생님의 신변을 걱정하여 외출을 삼가시라고 당부했지만, “내 생명이 무어길래 그리 아껴야겠소” 하면서 외출하셨다가 흉탄에 쓰러지셨습니다.

1886년 5월 경기도 양평 묘곡에서 태어난 선생께서는 미국 선교사 클라크(郭安連)의 전도를 받아 기독교에 입교, 조사생활을 거쳐 평양신학교에 입학하기까지 했습니다. 이 때문에 1929년 체포되어 재판을 받을 때 “피고는 유물론자냐 공산당원이냐”라는 재판관 신문에 “나는 어릴 적부터 기독신자다”라고 당당할 수 있었습니다. 일찍이 중국으로 망명한 선생께서는 1918년 신한청년당을 조직,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하고 3.1운동의 숨은 공로자가 되었으며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조직에 참여했고, 그 해 11월 도일, 일본 고위관리들과 수차례 회담하면서 조선 독립의 정당성을 논파했습니다. 그 이듬해 초 모스크바를 방문, 극동피압박민족대회 의장단에 선출되었고 레닌과 트로츠키도 만나 약소민족의 해방을 논의했습니다.

▲ 생전의 몽양 여운형 선생

1929년 중국에서 일제에 체포된 선생께서는 1932년 7월 대전감옥에서 출옥, 조선중앙일보 사장과 조선체육회 회장에 취임했고, 1936년 8월에는 일장기말살사건을 주도했습니다. 그 뒤에도 다시 체포되었다가 집행유예로 출옥하여, 일제 군국주의의 패망을 예견하고 조선건국동맹을 창건, 국내의 항일세력을 집결하여 새로운 조국을 준비했습니다. 해방을 맞았을 때, 선생께서는 이 해방이 연합국의 승리로 주어진 시혜가 아니라, 풍찬노숙하신 우리 독립운동가들의 주체적인 투쟁의 결과라고 떳떳하게 천명했습니다. 해방 후 선생께서는 건국동맹을 건국준비위원회, 나아가 인민공화국으로 전환시켰지만, 미군정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해체를 요구했습니다. 그 대신 미군정은 일제 통치기구에서 부역했던 경찰·관료·지주 등을 기용함으로, 해방된 조국이 다시 친일파의 손아귀에 맡겨지는 반동적 행태가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해방 후 선생께서는 조선인민당 및 근로인민당을 차례로 결성하는 한편 남북이 미소 양군에 점령당한 상황에서 자주독립 통일한국을 이룩하기 위해 민족통일전선 결성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좌우합작운동에 앞장서서, 1946년에만 북한을 다섯 번 방문했고, 김일성 김두봉과 10여차례 서한을 교환했으며, 하지와 로마넨코도 만나 설득했습니다. 김규식과 함께 주도한 좌우합작운동이 궁극적으로는 남북한연합이라는 과정을 밟아야 했기에, 한반도의 완전한 통일 독립은 미국과 소련이라는 외세와, 좌·우익이라는 이념, 남·북한의 지역대립 등 세 가지 층위의 대립구도를 극복해야만 가능하다고 판단했습니다. 때문에 선생님의 활동은 미국과 소련, 좌익과 우익, 남과 북에 결친 폭넓은 것이었고, 그 추구하는 바는 민족 내부의 통일과 민족통일전선 결성에 집중되었습니다.

선생께서는 좌우합작운동에서 대화와 설득, 양보와 타협을 중시했고, 민족자주의 일관된 원칙에 충실하면서도 이념적·정치적 입장을 탄력적으로 수행했습니다. 이 점은 주변에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했고, 지금도 훼예(毁譽)의 상반된 평가가 있습니다. 그러나 외세로부터의 자주와 민족 내부의 통일을 지향하고 있던 선생께서는, 선생께서 스스로 밝혔듯이, 공산주의자나 사회민주주의자가 아닌 ‘진보적 민주주의자’였습니다. 해방 직후 최악의 조건 하에서도 미·소, 좌·우, 남·북을 설득 조정하려고 동분서주하시던 선생님의 노심초사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선명합니다. 그러나 분단고착세력과 친일세력은 선생께 열 번 이상이나 테러를 가했고, 결국에는 조국의 자주평화통일의 소원을 안은 채 노상에서 산화되었습니다.

몽양 선생님의 60평생은 오늘 이 시대에 큰 귀감으로 떠오릅니다. 부친의 3년 상을 끝낸 1908년, 23세 때 단발하고 조상의 신주를 땅에 묻고 노비를 해방하는 결단을 보였습니다. 노비해방을 비롯한 선생님의 선구적인 개혁은 오늘날에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민주공화국’을 헌법 제1조에 명시하고 있는 대한민국이지만, 최근 몇 년 사이에 복벽(復辟)적 기운이 스멀스멀 스며드는가 하면, 이런 분위기에 편승하여 어느 공직자는 ‘민중을 개돼지’라 성언하고 신분제를 고착하자는 헛소리까지 내뱉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백여 년 앞서 민주와 공화를 친히 실천하신 선생님께 부끄러울 뿐입니다.

몽양 선생님, 조국의 자주 독립을 위해 일본·중국·러시아를 내왕하며 외교적 담판을 벌이던 모습을 떠올리면서 무능하고 용기없는 지도자들을 떠올립니다. 오늘날 재편되는 동북아 질서는 지도자의 정확한 정세판단과 기민한 기회포착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핵문제와 사드문제에서 보듯이, 국민적 합의도 끌어내지 못하고 ‘설명하는 민주적 정부’임도 포기했습니다. 북핵 문제와 한반도의 긴장을 남북이 주도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강대국에 의존함으로 한반도는 다시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이 대결하는 쟁투장으로 변했습니다. 국내적인 갈등과 분열을 가져올 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한·중, 한·러 갈등을 증폭시키고 북한 핵폐기보다 더 예민하게 동북아질서 속에 등장시킨 사드 배치가 과연 현명한 판단인지 선생님께 묻고 싶습니다. 이런 고민이 결여된 무능한 지도자들을 보면서 몽양 선생님을 더욱 생각하게 됩니다.

▲ 몽양 여운형 선생 묘에 새겨진 글귀 ⓒ블로그(koojinwook.tistory.com)

6.15공동선언과 10.4공동선언으로 고조되었던 민족화해와 평화통일의 전망은 이제 점차 사라지고 있습니다. 무능 불통의 지도자들은 백성/인민을 이념적으로 편가르고, 전쟁의 위협 속으로 몰아갑니다. 북핵 위협이 계기가 되어 전시작전권을 헌납하고 개성공단을 폐쇄하며, 사드를 배치하는 등 동북아질서가 긴장관계로 함몰되는 일련의 과정은,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위한 주변국의 협조를 어렵게 할 뿐 아니라 이번 참의원 선거를 통해 개헌발의선을 확보한 일본의 재무장과 군국주의화를 정당화해 주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거기에다 브렉시트로 유럽관리에 비상이 걸린 미국은 종래의 대(對)동북아 정책을 일정하게 일본에 위임할 가능성이 없지 않은 바, 따라서 재무장한 일본이 미일동맹을 근거로 한국에 상륙할 날이 재촉될까 걱정됩니다. 이런 상황인데도 한반도의 평화정착을 반대하면서 긴장과 갈등을 부추기는 세력이 있습니다. 그 긴장과 갈등을 통해 이득을 얻는 반평화적․반통일적 세력입니다.

몽양 선생님, 선생께서 가신 지 어언 70년이 되어가는데도 한반도의 갈등과 적대감이 더욱 확대되고 있어서 조국의 자주독립과 평화통일을 위해 동분서주하시던 선생님을 더욱 떠올리게 됩니다. 부디 선생께서 몽매에도 잊지 못하시던 한반도에, 평화통일과 자주독립을 위한 훈풍을 불어넣어 주소서. 목전의 이해관계에 얽혀 조국의 자주·평화·민족대단결을 실천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후진들을 꾸짖어 주소서. 민족의 딱한 현실 앞에서 스스로의 무능만 탓하고 있는 초라한 후생이 조국의 미래가 보이지 않아 선생의 묘전(墓前)에서 삼가 읍소(泣訴)하면서 한 줄기 빛을 구하나이다. 굽어 살피시어 조국의 평화통일과 자주독립을 위한 지혜와 용기를 베풀어 주소서.

2016.07.19일 이만열 삼가 올림

*이만열/ 숙명여대 명예교수, 전 역사편찬위원장

이만열  mahnyo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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