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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나라 미국트럼프, 혐오주의의 상징인가 정치혁명의 상징인가
제45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된 도널드 트럼프. 그의 당선을 예측한 사람은 드물었다.

도널드 트럼프(70)가 대통령에 당선될 거라는 예측은 드물었다. 8일 개표직전까지만 해도 미 주요언론들은 트럼프의 당선 확률을 20% 미만(CNN 9%, 뉴욕타임스 16%)으로 내다봤다. 힐러리 클린턴(69)의 일방적인 승리를 전망한 것이다.

막상 투표함을 열자 전망과 전혀 다른 상황이 전개됐다. 트럼프는 공화당의 전통적인 강세 지역에서 차곡차곡 선거인단을 쌓아갔고, 이번 대선의 분수령이라고 할 수 있는 경합주들(플로리다·오하이오·펜실베니아)을 싹쓸이했다. 거기에다 민주당 텃밭인 위스콘신과 미시간에서도 승리했다. 결국 전체 득표에선 힐러리가 트럼프에 근소하게 앞섰지만 45대 미 대통령 자리는 트럼프가 차지했다.

* 두 후보의 득표 수 (트럼프 5천9백만69만여 표, 힐러리 5천9백만91만여 표)

* 두 후보가 확보한 선거인단 수(트럼프 306명, 힐러리 232명)

제45대 미 대통령 선거인단 확정 지도. (출처 위키미디아)

 

트럼프 당선이 곤혹스러운 사람들

차라리 미국 떠나는 게 낫다

혐오주의 조장하는 광기의 지도자

트럼프의 당선이 확실시 되자 힐러리 지지자들은 충격에 빠졌다. 캘리포니아 시민 일부는 ‘칼렉시트’(캘리포니아와 미 연방탈퇴의 합성어)를 외치며 거리로 뛰쳐나왔고, 오클랜드·콘트라코스타카운티 등 미국 곳곳에서 트럼프에 반대하는 거리 시위가 일었다. 캐나다 이민국 홈페이지는 동시 접속이 몰려 한때 마비되기도 했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이자 힐러리 지지자인 폴 크루그먼(63) 교수는 뉴욕타임스에 “미국인 대다수가 민주주의적 가치와 법치를 소중히 여긴다고 이해했으나 이 모든 것이 틀린 것으로 나타났다”며 절망 가득한 글을 올렸다.

가장 곤혹스러운 처지에 놓인 건 미국의 주요언론들과 여론조사 기관들이다. 언론사와 여론조사 기관 대부분 전체 득표에서 힐러리가 적게는 1%, 많게는 6% 정도 트럼프에 앞설 것으로 분석했었기 때문이다. 선거인단 확보에서는 격차가 더 벌어져 힐러리가 트럼프를 압도할 거라고 전망했다. 하지만 실제 결과가 뒤집히면서 일각에서는 여론조사 무용론이 대두되고 있다. 심지어 기득권을 대변하는 힐러리를 당선시키기 위해, 같은 기득권인 언론사들이 여론조작을 한 게 아니냐는 의혹까지 제기되고 있다. ‘미국여론조사연합회’는 9일 “여론조사가 완전히 틀렸다”는 내용의 반성문을 보도자료 형식으로 배포하기도 했다.

트럼프 반대자들이 받은 충격은 트럼프의 낙선을 당연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더욱 컸다. 트럼프는 부동산 재벌로 대중에게 이름을 알렸다. 의회 경험은커녕 한평생 정치와 무관한 삶을 살았다. 트럼프가 처음 대통령 선거에 나섰을 때, 그의 지지율은 1%에 불과했다. 미국인 대다수는 트럼프를 우스꽝스러운 광대 정도로 생각했다. 선거 기간 중 계속된 여성비하와 인종차별적인 그의 막말은 대통령으로서의 자질을 의심케 했다. 선거 막판 공개된 음담패설 녹취록과 탈세혐의는 트럼프 캠프에 큰 타격을 입혔다. 그는 힐러리 지지자들뿐만 아니라 누가 보더라도 ‘자격미달’의 후보였다.

폴 크루그먼의 기고에서 트럼프를 바라보는 반대자들의 시선이 그대로 드러난다. “우리 시민들은 고위직에 걸맞지 않고 기질적으로 불안정하며 무서운 후보에 투표하지 않을 것으로 믿었고 인종적 편견과 여성비하를 배제하며 인내심을 가진 열린사회가 돼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트럼프 반대자들이 받은 충격은 단순히 정치적 성향이 다른 사람이 그들의 지도자로 선출된 것에 대한 아쉬움이 아니다. 그들의 충격은 절대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 될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다는 것에 대한 공포감이고, 그를 대통령으로 뽑은 다른 미국인들에 대한 실망감이 뒤섞인 것이다. 반대자들이 보기에 트럼프는 인종차별주의자이고 남성우월자이며, 소수자에 대한 혐오주의를 조장하는 광기어린 지도자일 뿐이다.

 

트럼프 당선을 예측한 사람들

극심한 사회 양극화 겪는 미국 사회

기존 정치세력 뒤엎은 정치혁명

트럼프의 당선을 예측한 사람들도 있었다. 미국 유명 다큐멘터리 감독 마이클 무어는 지난 7월 ‘도널드 트럼프가 승리할 수밖에 없는 5가지 이유’라는 글을 허핑턴포스트에 기고했다. 그가 첫 번째로 꼽은 트럼프의 승리 요인은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을 지지하는 클린턴의 공약이 러스트 벨트(Rust Belt) 사양화 촉진을 유발할 것으로 우려하는 지역 주민의 반감을 샀다”는 점이다. 무어의 지적은 현실로 일어났다.

러스트 벨트는 미국 중서부와 북동부의 쇠락한(Rust) 공업지대를 이르는 말이다. 이 지역들은 1970년대까지 호황을 누렸지만 제조산업의 쇠퇴와 함께 몰락의 길을 걸었다. 러스트 벨트는 미 대선에서 향배를 결정짓는 스윙 스테이트(Swing State)로도 불린다. 대부분 정치적 성향이 뚜렷하지 않아 대표적인 부동층 지역으로 분류된다. 트럼프 승리에 결정적 역할을 한 펜실베니아, 오하이오, 위스콘신, 미시간이 바로 러스트 벨트에 속하는 곳들이다.

1990년대 이후 불어닥친 세계화의 흐름은 러스트 벨트의 불황을 더욱 부채질했다. 실업자는 늘어났고 공장에서 일하던 블루칼라 백인 대다수가 저소득층으로 주저앉았다. 이들에게 힐러리 클린턴은 좋은 대통령감이 아니었다. 힐러리는 90년대 세계화를 주도한 빌 클린턴 행정부의 재현을 상징했다. 빌 클린턴 행정부 8년간 미국 경제는 호황을 누렸지만 제조업 중심의 러스트 벨트만큼은 예외였다.

트럼프는 기존의 무역정책과 달리 다른 나라와 맺은 무역협정 폐기 등 미국보호무역주의를 공약으로 내세웠다. 또 “해외 공장을 국내로 귀환시켜 일자리를 마련하고 높은 소득을 보장하겠다”며 러스트 벨트 지역 주민들의 마음을 샀다. 힐러리가 싸늘한 눈총을 받고 있을 때 트럼프는 주민들의 아픈 곳을 정확히 짚고 어루만진 것이다.

트럼프의 미국보호무역주의 공약은 다른 지역에서도 효과를 거뒀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미국은 극심한 양극화 사회로 접어들었다. 2008년 당시 미국의 빈곤율은 17.1%로 OECD 국가 중 멕시코, 터키에 이어 세 번째였다. 2014년에는 상위 1%의 소득이 전체소득 중 19.34%를, 상위 10%의 소득이 전체소득 중 48.16%를 차지했다. 상위 10명의 소득이 나머지 90명의 소득과 맞먹는 셈이다. OECD 국가 중 가장 높은 소득격차 수준을 기록했다. 트럼프 캠프의 표어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는 단순히 애국주의 슬로건이 아니었다. 대다수 미국인에게는 생존권이 걸린 문제로 받아들여졌다.

세계화를 이끈 빌 클린턴을 실패한 대통령으로 평가하고, 힐러리가 월가로부터 막대한 선거자금을 지원받는다고 공격한 트럼프의 전략은 매우 효과적이었다. 중산층 붕괴와 함께 저소득층으로 몰락한 가정들이 힐러리를 곱게 바라볼 리 없었다.

미국 양극화의 심각성을 알 수 있는 도표. (파리경제대학)

5개월 전부터 트럼프의 당선을 예측한 최종건 연세대 교수(정치외교학과)는 트럼프의 인기가 미국 사회의 극심한 양극화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최 교수는 지난 6월 6일 한 라디오 대담에서 “트럼프의 부상은 사회 양극화와 관련이 있다. 미국 국민이 봤을 때 우리도 힘든데 ‘왜 우리가 다른 나라의 안보를 책임져야 하느냐’, ‘왜 우리가 이민자를 받아들여야 하느냐’는 정서가 있다. 트럼프의 발언이 과격하기는 하지만 중하층 백인들은 시원함을 느끼고 있다”고 트럼프 현상을 설명했다.

트럼프의 승리라기보다는 힐러리의 실패라는 의견도 있다. 1년 전 트럼프의 부상을 예견한 <트럼프 대통령에 대비하라>의 저자 김창준(77) 전 미 하원의원은 한 언론사 인터뷰에서 “중·하류층 백인 서민들이 지지해 트럼프가 당선됐다는 시각도 있지만 이보다 더 영향력을 발휘한 건 미국 정계에 만연한 ‘끼리끼리 정치’의 폐해”라고 말했다. 그는 “트럼프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 정치인들의 모습은 국민을 무시하고 자기들만의 세계에서 살고 있다는 인상을 줬다”며 “이런 모습에서 미국인들의 기존 정치권에 대한 환멸감과 함께 트럼프에 대한 기대감이 동시에 커졌다”고 했다.

실제로 이번 대선에서는 비주류들의 돌풍이 유난히 거셌다. 민주당 경선에서 힐러리에게 석패한 버니 샌더스(75)는 무소속 출신에다 대중에게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인물이었다. 지난 5월 미국 유력언론사들의 여론조사 결과 샌더스와 트럼프가 맞붙을 경우 샌더스가 50% 이상의 지지를 얻어 승리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같은 여론조사에서 힐러리는 트럼프에서 0.2%차로 패배하는 것으로 예측됐다. 트럼프의 당선 직후 민주당 지지자들 사이에서 “샌더스였으면 이겼을 텐데” 아쉬운 목소리가 터져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미국 유력언론사들이 조사한 힐러리와 트럼프 1:1 대결 여론조사 추이.
미국 유력언론사들이 조사한 샌더스와 트럼프 1:1 가상대결 여론조사 추이.

트럼프의 당선을 둘러싸고 다양한 시각이 존재한다. 현재 그는 미국 백인층이 갖고 있는 혐오주의의 상징이기도 하고, 두터운 주류 정치세력을 뛰어넘은 비주류의 정치혁명을 상징하기도 한다. 그의 진짜 정체가 무엇일지는 두고 보면 드러날 일이다. 확실한 것은 미국 사회의 극심한 경제 양극화와 인종 갈등이 트럼프 당선에 크게 기여했다는 것이다. 환호와 절망, 기대와 수치심이 공존하는 미국은, 확연히 두 개의 나라로 갈릴 것으로 보인다. 

이민혁 기자  ukoreanew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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