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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박근혜’의 길

오늘은 이래저래 짜증나고 고통스러운 날이다. 며칠 전에 페이스북을 통해, 정식 서명단계에는 이르지 않도록 궐기하자고 요청한 바로 그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이 박원순 서울시장의 유일한 반대토론에도 불구하고 국무회의를 통과했단다. 며칠 전에 나는 이 협약이 장지연의 표현처럼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 되지 않도록 하자고 호소했지만 전혀 보람이 없었다. 그 협정이 통과되자 어느 분은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제목으로 다시 그 우려를 표명했다. 1905년 11월 17일 심야에 통과된 ‘을사늑약’으로 한국의 외교권은 빼앗겼고 그 뒤 국권상실의 결정적 분수령이 되었다. 그 날 저녁 이 늑약에 찬성한 이완용(李完用)을 비롯한 다섯 대신은 ‘을사오적’으로 국치의 역사와 함께 기억되고 있다. 더구나 오늘 이 협정을 밀어붙이는 데 실무를 맡은 국방장관이 한말 의병장 한봉수의 손자라고 하니, 참으로 서글프다.

오후에는 중구 정동 프란치스코 회관 2층에서 <국정교과서 ‘사용중지’를 요구하는 대한민국 학부모 및 국민일동> 주최의 ‘국정교과서 사용반대 긴급포럼-왜 학부모들은 국정교과서 사용을 반대하는가?’라는 모임에 참석, ‘국정교과서와 건국절 문제’를 설명했다. 이 모임에는 학부모 김준용(한성여고 학부모 회장)과 심용환 소장이 참석하여 발표했고, 안식년을 맞아 제주도에 가 있던 주진오 교수도 참석, 격려하는 순서를 가졌다. 정부는 이달 28일에 국정국사교과서를 선보이겠다고 하면서, 역사학계와 교육계, 일선교사와 학부형들의 완강한 반대를 무릅쓰고 국정교과서 편찬을 강행하겠다고 한다. 정부가 민심을 외면하는 정도가 이제는 물불가리지 않는 독선과 오기만을 내뿜는 듯하다. 오늘 발표한 학부모 선언은 국정교과서가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들에 대해 편향적이고 작위적인 우상화를 시도할” 것이며, “박정희 시기의 경제발전에 대해 환상에 가까운 강조가 예상”되며, “고귀한 민주화운동을 폄훼”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 우려의 소리를 우리 정부만 듣지 못하고 있는가.

오늘은 멀리 워싱턴DC에서 귀를 의심케 할 소리가 들려왔다. 대한민국 방위사업청장 장명진이 한·미 국방 관련 회의에서 “트럼프가 한국에 대해서 방위비 분담 인상을 요구하면 수용해야 한다”는 요지로 발언했다. 언론에서도 “그 사람, 한국 관리 맞나?” 하는 반응이었다. 아직 취임하지도 않은 트럼프 행정부를 두고, 과공(過恭)은 비례(非禮)라는 말도 잊은 듯, 저두굴신(低頭屈身)하며 미리 아부를 한 셈이다. 덧붙여서 그는 국방예산을 더 많이 투입하기 위해서는 한국의 복지 등 다른 예산을 축소해야 한다고까지 주장했단다. 이런 관리를 위해 세금을 내야 하는가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가 정말 방사청장답게 자주국방을 생각한다면 요한 갈퉁이 언급한 바, “트럼프가 만약 대통령이 돼서 한반도에서 미군을 철수한다면 미국이 대한민국에 준 최대의 선물이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는 말의 의미를 한 번 쯤은 되새겨봤어야 한다. 갈퉁은 트럼프가 그렇게 큰 소리를 쳐도 미군이 전략적으로 한반도에서 결코 물러날 수 없다는 것을 간파했을지도 모른다. 자주국방을 고민하는 군사전문가라면 방위비 분담 문제로 미군을 철수시키겠다는 트럼프의 위협에 지레 겁을 먹고 ‘과천에서부터 길 것’이 아니라, 그 엄포를 무력화시키는 지혜를 강구했어야 한다.

박근혜 정권이 임기를 다 채울 수 있을지 알 수 없지만, 요즘같이 나라를 거덜낼 것만 같은 상황에서 국민에게 인내를 요구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이 정권 들어서서 국격이 현저히 떨어졌고 각종 지표 또한 하강국면을 면치 못하고 있다. 정말 지도자라면 이 점을 심각하게 여기고 이같은 난국에서 어떤 결단을 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대통합은 이루지 못할망정 극단적인 분열을 부채질한다면 이는 지도자의 길이 결코 아니다. 난마와 같이 얼킨 실타래를 더 얼키게 한다면 그 또한 지도자의 길이 아니다. 지도자는 인내로써 난마를 풀어내야 한다. 복잡다단한 상황을 단순화시켜 공동 상생의 목표를 선명하게 제시해야 한다. 촛불 민심을 어리석은 군중쯤으로 취급하면서 청와대까지 들리는 그 함성을 외면하는 것은 지도자의 금도가 아니다.

새누리당이 얼마 전 쇄신하겠다면서 국민에게 약속한 ‘사즉생(死卽生)’이란 말, 결코 빈 말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 말만큼 추락한 명예를 회복시켜 준 방안도 없었고, 실패한 인간을 승리로 이끈 명언도 없다. 인간 박근혜가 이 시점에서 그래도 승리할 수 있는 길은 손해보는 듯하면서도 민심에 순응하는 것이다. 그것이 승리하는 길이요, 역사에 살아남는 길이다.

 

이만열/ 숙명여대 명예교수, 전 역사편찬위원장

이만열  mahnyo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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