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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지에서 ‘한반도 평화’를 묻다‘평화열차 프로젝트’ 답사 동행취재기②

5월 29일(화) 베를린

이른 아침 베를린 거리로 나섰다. 한 시간 정도 숙소 주변을 돌았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베를린의 상징인 곰 조각상이었다. ALEXANDER PLAZA 호텔 앞의 곰은 오른손을 위로 번쩍 들고 멋들어지게 앉아 있었다. 호텔 왼편 공원에는 인간의 고통스러운 삶, 화해와 용서를 의미하는 듯한 석상이 자리잡고 있었다. 큰길은 카를 리브크네히트 거리였다. 대로 맞은편에는 청록색 종탑, 흙벽돌, 붉은 지붕으로 건축된 성모마리아교회가 멋스럽게 자태를 뽐냈다. 13세기에 지어진 것으로 전해진 이 교회는 시내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다. 교회 내부에 ‘죽음의 춤’이라는 프레스코화가 있다고 한다. 이른 아침이어서 들어가 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성모마리아교회 뒤편에는 365m 높이의 텔레비전탑이 있는데, 시내 어디에서든지 이 탑을 기준으로 목적지를 가늠할 수 있을 만큼 솟아 있다. 탑 가운데 원형 공간에는 레스토랑이 있다. 이 원형 공간은 조금씩 회전하는데, 식사를 하는 동안에 시내 전체를 한눈에 볼 수 있다고 한다.

   
▲ 구 베를린 국립박물관 모습. ⓒ최창민 기자

조금 더 걸었더니 슈프레(Spree)강이 보였다. 강 주변에는 아침부터 운동복 차림으로 조깅을 하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슈프레강에 떠 있는 유람선은 아침부터 출항을 준비하고 있었다. 리브크네히트 다리를 건너 베를린 대성당에 도착했다. 거대한 성당의 지붕은 화려한 청록빛 조각상이 곳곳을 장식하고 있었다. 천사, 성인 등이 조각된 듯 했다. 대성당은 1905년에 현재의 모습을 갖췄다고 한다. 성당 내부에는 높이 114m, 폭 73m의 거대한 천정 돔이 인상적이라고 한다. 또 7269개나 되는 관으로 이루어진 독일 최대의 파이프 오르간이 설치돼 있다고 한다. 베를린 대성당 주변에는 이집트 박물관, 신 박물관, 구 내셔널갤러리, 독일 역사박물관, 페르가몬 박물관 등이 있었다. 이 중 한 곳도 들어가 보지 못한 것이 몹시 아쉬웠다. 주위를 돌아본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비텐베르크

 

답사팀은 베를린의 종교유적지 비텐베르크(Wittenberg)를 방문하기로 했다. 종교개혁자 루터의 흔적이 있는 곳이다. 조성호 목사의 인도를 따라 전철을 타고 이동했다. 한 시간 가량 걸려 도착한 곳은 토속적인 향취가 물씬 풍기는 시골 마을이었다. 알록달록 색깔의 건물들이 우리를 반겼다. 맑고 쾌청한 하늘을 두 대의 비행기가 엇갈려 지나갔다. 비행기가 남긴 흔적은 십자가 모양으로 보였다. 십여 분을 걸었다. 마을 어귀에 새카맣게 탄 듯한 나무가 보였다. 1520년 12월 10일 오전, 이곳에서 함께 걷던 친구가 번개를 맞고 죽는 모습을 본 루터가 회심을 했다고 한다. 사람들은 ‘루터의 나무’로 불렀다. 실제로 그러한 일이 있었는지, 그리고 그 나무가 이것인지에 대해서는 누구도 확언할 수 없을 것 같다. 다만 죽음이라는 경험은 한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수 있는 큰 충격과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 잘 정돈되어 있는 비텐베르크 거리 풍경. ⓒ최창민 기자

비텐베르크는 작은 시골마을이었다. 마르틴 루터(1483-1546)는 아이스레벤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그러나 1508년부터 약 35년 동안, 생의 대부분을 이곳 비텐베르크에서 보냈다. 그는 수도사였고, 한 가정의 가장이었으며, 대학교수였다. 그의 이름으로 대표되는 종교개혁은 단순히 교회의 분열을 의미하지 않는다. 근대화 과정의 결정적인 진보이며, 교회의 존재와 의미를 되찾는 혁명적인 과정이었다.

비텐베르크는 1180년, 역사적 사료에 처음 등장한다. 1293년 시로 승격되었으며, 16세기 초 3만 2천5백여 명이 거주하는 중소도시였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3세가 작센의 도읍을 비텐베르크로 옮긴 이후 시의 모습은 급격하게 변화했다. 시 북부에는 성이 생겼고,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는 프리드리히의 뜻에 따라 이곳에 수도원을 건립했다. 수도사 복장의 색깔을 따서 ‘검은 수도원’이라고 불렸던 이곳이 루터가 수도사로 생활했던 곳이다.

프리드리히는 1502년 이곳에 대학을 신설했다. 루터는 1508년부터 그 대학의 교수로 활동했다. 루터는 1513년부터 1518년까지 네 번의 성서강의를 했다. 그는 로마서를 읽고 중요한 깨달음을 얻었다. 기독교인은 오로지 신앙을 통해, 즉 하나님의 의(義)를 믿음으로써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었다. 이는 당시 기존관념을 혁파하는 사상이 되었다. 인간의 구원을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은, 경건이나 선행 등 인간들의 노력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뜻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상은 당대의 궁정화가였던 루카스 크라낫흐의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작품에도 잘 표현되어 있다. 그림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는 홀로 등장한다. 그림에 적힌 라틴어 텍스트는 십자가의 죽음으로부터 자신의 죄를 깨달으라고 종용하고 있다. 또 십자가의 죽음만이 죄인에게 영생을 주는 유일한 구원의 길임을 밝히고 있다. 이 작품 외에도 루카스 크라낫흐는 루터의 젊은 시절부터 노년까지 다양한 모습의 초상화를 남겼다. 이 작품들은 모두 ‘루터하우스’ 박물관에 잘 전시돼 있다.

루터하우스

루터하우스는 1508년 루터가 비텐베르크에 도착한 이후 처음에는 수도사로, 1525년부터는 가정 집으로 꾸려 직접 살았던 집이다. 이곳이 관람객에게 공개된 것은 1883년부터이며 오늘날에 와서는 종교개혁사를 증언하는 박물관으로 자리 잡았다. 특히 루터의 생애와 관련한 약 1000여 점의 원본 전시물이 당대의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 루터가 직접 가정집을 꾸며 살았던 곳 루터하우스. ⓒ최창민 기자

루터하우스는 정원으로 꾸며진 앞마당을 가지고 있는데, 여기에는 루터의 아내이자 전직 수녀였던 카타리나 폰 보라의 조각상이 서 있다. 두 사람의 결혼은 루터의 친구였던 필립 멜란히톤도 반대했을 정도로 많은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역사가들은 루터의 종교개혁 이면에는 아내였던 카타리나의 극진한 내조가 있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실제로 루터는 카타리나에게 종종 성경에 관한 해석은 물론, 설교에 대한 평가, 종교적 신념과 관련한 다양한 조언을 들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루터하우스에는 ‘카타리나의 대문’이라고 불리는 독특한 양식의 문이 있다. 1540년 사암(沙巖)으로 만들어진 이 대문은 루터시대의 건축유산이며, 루터의 아내가 주문해 제작한 것으로 전해진다. 문 오른쪽은 루터의 조각상이 있고, 왼쪽에는 ‘루터의 장미’라고 불리는 문장(紋章)이 있다.

루터하우스에는 16세기에 벌어졌던 농민전쟁 당시의 무기가 전시돼 있다. 루터의 개혁에 대한 비판 가운데 하나는 그가 1525년 초 독일남부와 튀링엔에서 벌어진 농민봉기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것이다. 특히 종교개혁의 과정에서 루터는 봉건 영주들과 손 잡았고, 농민을 비롯한 기층 민중들의 의지보다는 영주들의 정치력에 기댄 개혁이었다고 지적한다. 이 같은 점들을 루터 종교개혁의 한계로 꼽는 것이다. 반면 루터와 달리 농민들과 함께했던 설교가 토마스 뮌처를 진정한 개혁운동가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토마스 뮌처는 농민봉기가 실패하면서 처형됐다.

나는 루터의 종교개혁 당시 그가 가졌던 생각이나 판단을 깊이 있게 고찰해볼 기회를 갖지 못했다. 따라서 그가 가졌던 태도-루터는 기존권력에 대한 백성의 폭동을 성서에 근거해 금지된 행위로 여겼다고 한다-가 어떤 과정을 통해 정립됐는지 평가할 근거가 없다. 다만, 개혁 또는 혁명이 기층 민중들의 의지를 반영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할지라도, 실제로 그것이 실현되기 위해서 일정부분 중간층 혹은 정치적 저항세력의 도움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것 또한 역사가 가르쳐준 교훈이다. 루터가 종교개혁자로서 자신이 처한 환경과 상황 속에서 가졌던 판단이나 행동이 영주들의 정치적 이익과 부합했다고 하더라도, 그것만으로 그의 종교개혁이 평가절하 되어서는 안 된다고 여겨진다. 오히려 영주들의 지지와 후원이 없었더라면 루터 이전의 수많은 종교개혁 시도가 불발에 그쳤던 것처럼, 그의 열정과 단호한 호소도 빛을 보지 못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비텐베르크는 동화 속에서나 등장할 법한 아름다운 도시다. 루터하우스를 시작으로 비텐베르크 성교회까지 약 500m에 달하는 거리는 8m 폭의 길을 두고 양 옆으로 건물들이 늘어서 있다. 대다수 건물이 16세기 당시의 건축 양식으로 보존되고 있다. 또 파스텔 색깔로 표현된 형형색색 건물들은 저마다의 개성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건물과 건물이 서로 대치하지 않으면서도 다르고, 구별되면서도 조화를 이루고 있다.

   
▲ 1517년 10월, 당시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교회 대문에 내걸었던 95개조의 반박문. ⓒ최창민 기자

길 막바지에 서 있는 비텐베르크 성교회에는 1517년 10월 31일 마르틴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내걸었던 대문이 자리 잡고 있다. 오늘날 개신교회 운동이 이곳에서 시작됐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벅찼다. 당시 종교개혁의 배경에는 영주들의 불만, 인쇄술의 발달, 민족 언어로 번역된 성경의 보급 등 다양한 요소가 존재했다. 하지만 이 작은 마을에 위치했던 그리 크지 않은 성당에 내걸렸던 한 신학자의 의견이 큰 파장을 일으켜 교회의 균열을 가져왔고, 새로운 교회 운동으로 자리매김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위기를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교황청이 면죄부를 판매하는 것에 거세게 저항했던 루터의 종교개혁 정신. 행위로 인한 구원을 부정하고 ‘오직 믿음’을 강조했던 루터는 기복적 신앙과 자본에 물든 오늘 우리 교회에도 큰 울림을 준다.

루터는 익숙한 곳에서 떠나 익숙하지 않은 길로 갔다. 그리고 그 길은 지금 개신교회의 시작이 됐다. 답사팀이 떠난 길은 생각하기에 따라서 무모한 계획처럼 보였다. 하지만 답사팀은 이 길이 한반도 평화의 길이고 통일 한국의 시작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기독교연합신문 기자>

최창민  nrprinc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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