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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릉 앞에서 화가 나는 이유중국 평화발걸음 동행기(5)

8월 6일 셋째날.

집안 시내에서 약간 떨어진 광개토대왕비로 가는 버스. 일행은 모두 벅찬 감격에 젖었다. 그리고 일행이 믿는 주님이 민족의 주인, 고대사의 주인, 미래 한민족의 주인임을 선포했다.

큰길에서 작은 골목으로 접어든 버스 차창으로 이내 ‘음료수’ ‘혼타(환타)’ 등 한글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호태왕(광개토대왕)비가 있는 곳이다. 아침 8시가 막 넘은 시각. 우리 일행이 가장 먼저 도착했다. 중국 관리인들도 그제야 손님 맞을 준비를 했다. 입장료는 1인당 25위안(약 3700원).

입구 오른편에 눈에 띄는 영어와 중국어로 된 글씨. 2004년 유네스코에 등록됐다는 글귀다. 얼핏 보면 자랑스럽기도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니 우리 조상의 것을 남의 나라가 자기의 재산으로 삼은 것 같아 몹시 불쾌했다.

   
▲ 들판에서 바라본 광개토왕릉. 뒷편 멀찍이 보이는 산은 북한 만포시의 모습이다. ⓒ유코리아뉴스 김성원
광개토대왕비가 있는 건물은 너른 들판에 우뚝 솟아 멀리서도 쉽게 눈에 띄었다. 비석 내부는 에어컨 시설도 되어 있다. 이른 아침이지만 속속 다른 일행들이 건물로 들어온다. 그중엔 중국인들도, 한국인들도 있었다. 사진 촬영은 엄격히 제한하고 있었다. 비는 1882년 일본군 대위가 밀정을 나왔다가 한 숲에서 발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비문은 고구려 개국 시조, 광개토대왕의 업적 등을 상세히 담고 있다. 이 비석을 통해 고구려의 기원, 이상, 지향을 모두 알게 된다는 게 가이드의 설명이다.

광개토대왕은 18세 때 태자가 되자마자 국토 확장에 박차를 가했다. 당시 고구려의 이념은 다물, 즉 고조선의 고토를 회복해 옛 명성을 되찾겠다는 거였다. 이 비석 하나가 고구려의 엄청난 기상을 그대로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가이드 최 선교사는 이것을 ‘십계명과 같다’고 했다. 광개토대왕을 성서의 다윗 왕에 비유하기도 했다. 나라의 기틀을 만들었을 뿐 아니라 우리 민족에게 주신 땅을 다 회복한 점이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 가나안을 다 정복했던 다윗과 무척 닮았다는 것이다. 아들 장수왕 대에 이르러 평화를 누리고, 아들 솔로몬 대에 태평성대를 누렸던 점 또한 흡사하다는 것이다.

너른 들판엔 한국에서는 보지 못했던 제비들이 활개치며 날고 있다. 풀벌레도 제법 요란을 떨며 가을을 재촉하고 있다. 비로소 거대한 돌무덤, 광개토대왕릉이 앞에 나타났다. 작은 돌들이 무덤을 이루고 있고, 그 사이로 석실까지 연결된 계단이 놓여 있다. 돌로 된 대왕의 무덤을 보며 화가 나고 안타까운 마음이 먼저 들었다. 남의 나라 대왕의 무덤을 함부로 관리하는 이 나라에 대해, 그리고 남의 나라에 우리 조상의 왕릉을 맡기고 있는 몹쓸 후손인 나 자신에 대해.

광개토대왕릉 위에 올라간 김에 일행은 찬양을 했다. 그리고 복음과 평화로 이 고토(故土)를 회복해 달라고 간구했다. 찬양과 기도를 끝내고 내려가는데 관리인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원래 이곳에서 노래를 부른다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라는 것이다. 첫 손님이기에 관리에 방심했고, 그것이 우리 일행에겐 의미있는 시간을 제공했던 것이다.

왕릉 아래에서 한 줌 흙을 손에 쥐었다. 만감이 교차했다. 고토 회복을 꿈꿨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이루었던 광개토대왕, 그 힘찬 기상으로 만주를 누볐을 민족 선배들의 맥박이 몸속으로 전해져 오는 것 같았다.

   
▲ 광개토대왕릉 위에서 바라본 옛 고구려 국내성 터전. ⓒ유코리아뉴스

장수왕이 묻힌 것으로 추정되는 장군총은 바위 하나하나의 웅장함이 일행을 압도했다. 고구려의 어떠함을 웅변하고 있는 것이다. 장군총을 끝으로 일행은 버스에 올랐다. 풀밭 사이로 멀어지는 장군총이 우리에게 간곡히 외치는 것만 같다. 쿨룩쿨룩 목 쉰 소리로 말이다. “고조선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이렇게 중국 땅을 제 집 삼아 누볐건만 너희는 왜 한반도 이남에 찌그러져 아웅다웅 싸우며 삶 같지 않은 삶을 살고 있는거냐”고.

고구려의 수도였던 국내성(집안)을 버스로 넘는다. 북숭아밭, 옥수수밭이 이어졌다. 골짝골짝 산이며 강이 정겨워 보였다. 우리네 강원도, 충청도 여느 골짜기와 닮았다. 이 길을 말로 누볐을 민족 선배들의 기상을 다시 가슴에 꾹꾹 새겼다.

버스는 약 2시간 반을 달려 통화시에 도착했다. 조선족이 운영하는 한 식당엔 우리 일행을 위해 콩나물무침, 묵은지, 미역국, 만두 등이 갖춰져 있었다. 모든 게 한국인의 입맛에 딱 맞았다. 일행을 배웅하던 30대 초반의 여성 종업원이 “여기 젊은이들이 다 돈 벌러 한국에 갔다. 내 친척도 인천서 일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중국 조선족 사회의 위기의 단면을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아 씁쓸했다.

통화시는 시내를 관통하는 혼강을 사이에 두고 너른 구릉지가 펼쳐져 있다. 이곳이 바로 고구려, 발해의 터전이었고, 일제 시대에는 신흥무관학교 등 항일운동의 본거지였다. 길거리엔 일본 자동차회사 니싼의 간판은 보였지만 한국 자동차 회사의 간판은 찾아볼 수 없었다.

   
▲ 통화시를 관통해서 흐르는 혼강. 혼강 옆으로 펼쳐진 구릉지는 고구려, 발해의 터전이자 일제 당시에는 독립운동의 본거지였다. ⓒ유코리아뉴스

빠듯한 일정이어서 곧바로 버스는 달렸다. 여기서는 압록강을 따라갈 수가 없어서 내륙 쪽 길을 따라 림강으로 가서 장백으로 가는 길을 택했다. 통화에서 출발한 지 2시간만에 압록강을 끼고 있는 도시 림강에 잠시 내렸다. 건너편이 북한 자강도의 중강군이다. 아이들이 신나게 멱을 감고 있다.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건너올 수 있는 거리건만 아이들은 이쪽을 쳐다보지도 않는다. 철조망도 없다. 그냥 강만 있을 뿐이다. 건너편은 약간의 건물, 그리고 그 옆, 뒤로는 온통 옥수수 밭이다. 지금은 푸르른 생명력으로 덮여 있지만 겨울에 오면 너무 삭막해 저쪽 사람들을 부여안고 울고 싶어진다는 게 최 선교사의 설명이다. 구한 말, 존 로스 선교사가 북한을 바라보며 ‘복음의 문을 열어주소서’라고 기도했다는 곳. 100년도 훨씬 넘어 똑같은 내용으로 기도해야 하는 현실이 안타깝기만 했다.

   
▲ 중국 림강 쪽에서 바라본 북한 중강군. 북한 아이들이 천진난만하게 물놀이를 하고 있다. ⓒ유코리아뉴스

림강을 지나면서 압록강 물살이 빨라졌다. 본격적인 상류가 시작된 셈이다. 북쪽 산은 멀리서 보면 민둥산을 덮은 푸른 옥수수 때문에 마치 알프스산 같다. 일행은 ‘이곳에 북한과 합작해 리조트를 개발하면 얼마든지 사람들이 찾을 것’이라며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상류로 갈수록 강폭이 좁아졌다. 철조망도, 초소도, 담벼락도 없는 길이가 꽤 됐다. 굽이굽이 압록강이 만들어내는 조그만 삼각지의 동네들은 마치 한 폭의 그림 같다.

북한 쪽 산 중턱 여기저기엔 ‘선군조선의 태양 김정은 장군 만세’ ‘선군조선의 희망 위대한 김정은 장군 만세’ 등의 구호가 걸려 있다. 해질녘, 김형직군에 잠깐 버스가 멈췄다. 김일성 아버지가 태어난 곳이기에 다들 카메라 셔트를 누르느라 여념이 없다. 다시 버스가 조금 달리더니 김정숙군을 가리켰다. 비로소 집집마다 불이 들어왔다. ‘천일봉호텔’이란 간판도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 압록강 상류 양강도에 위치한 김형직군(왼쪽). 압록강 상류로 올라갈수록 굽이굽이 물결이 이처럼 그림같은 삼각지를 이룬다. ⓒ유코리아뉴스

이제 길은 어두워졌다. 혜산시가 가까워오자 북한 쪽 불빛이 훨씬 많아졌다. 국경지역인 만큼 형편이 그만큼 낫다는 뜻이다. 여기저기 서치라이트를 비추는 모습도 목격됐다. 주요 탈북 루트인 만큼 철저히 감시하고 있는 것이다. 최 선교사는 “장백은 남한 사람이 일생 한번 올까말까 한 곳”이라며 “남한 사람 중에도 북한 대상 사역자 외에는 찾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만큼 외지고 위험한 곳이란 얘기다. 인구 10만명이 채 안되는 이곳은 역시 조선족 자치현. 하지만 밤 사이 외출은 절대 금지였다. 북한 보위부요원들이 다니기 때문이다. 일행은 늦은 저녁식사와 함께 꼼짝없이 숙소에서 잠을 청해야 했다.

김성원 기자  op_kim@ukorea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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