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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규 목사와 김찬국 교수를 추모하며

지난 주간은 한국의 민주화와 관련하여 기억할 분들이 많았다. 특히 어제와 오늘은 한국 현대사에서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분들의 기일이 계속되면서 새삼 이런 분들의 행적을 생각하게 된다. 엊그제는 김대중 대통령의 8주기여서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현충원에서 대통령과 정당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김대중 대통령 서거 8주기 추도식>이 거행되었고, 오후에는 김대중 도서관에서 이를 기념하는 <한국민주주의와 평화>라는 제목의 학술회의도 있었다.

그제는 또 박형규(1923-2016) 목사의 1주기 추도식이 있었다. 그는 일본(동경신학대학)과 미국(유니언신학교)에서 공부하고 귀국한 후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KSCF)의 총무와 <기독교사상> 주간을 거쳐 서울제일교회 담임목사로 목회 일선에 나섰다. 유신정권 하에서 1973년 4월 남산부활절사건에 깊이 관여, 내란예비음모로 구속되었고, 그 이듬해에는 민청학련사건에 연루, 15년의 형을 선고받았다. 1983년부터는 그가 목회하던 서울제일교회에 ‘예배방해사건’이 일어나 중부경찰서 앞에서 몇 년간 노상예배를 드리기도 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설립(2002)되자 초대 이사장에 취임, 한국민주화운동 기념사업의 기틀을 닦았다.

박형규 목사는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 소속으로 그 교단의 총회장까지 역임했다. 기장은 김재준 목사를 정점으로 안병무 김관석 서남동 문익환 등 쟁쟁한 인물들을 배출했다. 그들은 한국의 인권·민주화·통일 운동에 진력하는 한편 한국교회의 예언자적인 역할도 강조했다. 박 목사가 인권과 사회정의에 눈뜨게 된 것은 4·19혁명이 계기가 되었는데, 이는 뜻있는 기독교인들이 1960년대를 계기로 하여 사회의식에 눈뜨게 된 것과 거의 궤를 같이 했다. 

이승만 정권 하에서는 한국교회가 정권과 결탁하여 분단문제와 식민잔재 청산에 둔감했고, 심지어는 장로대통령을 선출한다는 명분으로 부정선거에도 가담했다. 기장이 진보적인 교단으로 주목받게 된 것은 이 부끄러운 역사에 자기비판을 가하고 자기 신학을 수립하여 상황 속의 교회로 탈바꿈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는 때로는 감옥행을 의미했고 박형규 목사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가 민주화운동의 대부처럼 인식되고 추앙받는 것은 감옥조차 불사하는 예언자적 자기희생에 주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엊그제 저녁에는 김찬국(1927-2009) 교수의 제8주기 추모예배가 연세대 동문회관에서 있었다. 약 30여명의 제자들과 지인들이 모여 생전의 그의 모습을 추모했다. 김 교수의 제자이며 대한성공회 전 대주교 관구장이었던 정철범 신부는 “영원한 사표이신 스승님”이라는 강론을 통해 김 교수는 연세신학의 초석을 놓은 한분으로 군사정권을 비판했던 예언자였으며, 항상 온화한 미소를 띤 따뜻한 목회자였으며 한국인의 민족정신과 연세인의 얼을 강조했다고 지적했다. 특히 연세대학의 정신적 맥락을 이어온 정인보 최현배 김윤경 선생의 민족사랑의 전통을 잇게 하는 데도 노력했다고 했다. 최민화 동문은 스승으로서의 김 교수의 인간미를 소개하여 듣는 이들의 눈시울을 뜨겁게 했다.

박형규 목사(왼쪽)와 김찬국 교수

김 교수는 학자로서뿐만 아니라 인간미 넘치는 매우 자상한 분이었다. 유머가 넘치며 제자들의 학문과 진로에까지 깊은 관심을 가졌던 스승이었다. ‘김찬국’이라는 자기 이름을 스스로 “김도 있고 찬도 있고 국도 있다”고 희화화한 데서 보여주듯이, 격의없이 좌중에 활력을 불어넣어주는 스승이었다. 너무 부드럽다고 할 정도로 나약하게 보였던 그가 유신정권과 신군부하에서 민주화운동의 선봉에 서게 된 것은 아마도 그가 구약을 전공했기 때문일 것이다. 자기 시대의 불의에 추상같이 임했던 구약의 예언자들의 삶이 그를 그런 용장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그는 유신정권 때 긴급조치로 구속, 1차로 해직되었고 신군부가 들어서자 다시 2차로 해직되어 전후 9년간 무직자로서 생활했다. 그러나 오히려 고난받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의연한 지성인의 모습을 보였다. 유약하게 보이는 그에게서 어떻게 저런 용기가 나왔을까, 신앙과 지성의 힘이 아니면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다.

필자는 연배로 봐서 부형과도 같은 두 분을 생존시에 비교적 자주 뵐 수 있었다. 중요한 행사나 모임에는 두 분이 나타났다. 기억력이 거의 상실되고 거동이 불편한 때에도 노구를 끌고 참석, 후배들을 격려했다. 그들이 염원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한국의 민주화요 한반도의 평화였다. 두 분을 생각하면서, 그들이 심고 애써 가꾼 민주화와 평화의 씨앗이 더 활짝 피고 더 튼실하게 열매맺기를 기원한다. 

두 분을 추모하면서 후학으로서 빚진 것이 너무 많다는 생각이다. 한국이 이만큼 민주화된 것은, 촛불 혁명에 앞서 저 유신·군사 독재의 암울함 속에서도, 불굴의 의지로 싸운 두 분 같은 선배들 덕분이다. 그걸 생각하면서 우리는 그 선배들에 값하는 어떤 헌신과 희생을 하고 있는가 자책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누리는 현재는 바로 이런 선배들과 이름 없이 사라져간 분들의 희생 덕분이다. 그들의 희생과 헌신으로 이룩해 놓은 ‘오늘’을 누리면서 그 열매만 따먹는 무임승차는 하지 않아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이만열 / 숙명여대 명예교수, 전 역사편찬위원장

이만열  mahnyo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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