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11월, 김일성 주석과의 만남

해외 기독학자들의 통일 대화와 통일신학동지회 조직

나는 20세기 서구 열강들이 벌인 전쟁 역사의 최대 피해 민족인 우리 한민족의 분단을 극복하고 민족과 교회의 관계를 성서적 근거 위에서 회복하기 위한 ‘민족통일신학’ 정립을 희망했다. 1981년, 전 숭실대학교 총장 김성락 박사가 성경과 찬송을 가지고 평양을 방문한 후, 나는 그를 꼭 만나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와 한 고향 피현 사람으로 평양을 방문하였던 홍동근 목사까지 로스앤젤레스로 초대해, 통일을 바라는 우리의 소원과, 분단의 아픔과,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민족을 위하여 마땅히 해야만 할 사명에 대하여 그칠 줄 모르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홍동근 목사를 윌리암케리대학교 고려연구소 북한연구실장으로 초청했고 학교도 이것을 기쁘게 승낙했다. 그도 통일신학동지회에 내가 참가해 주기를 요청했다. 나는 회계로 선정되어 통일신학동지회의 임원이 되었다. 그리고 「통일신학」이라는 제목의 기관지를 발행하는 데 편집인 노릇을 했다. 이런 연유로 나는 통일신학동지회 임원의 자격으로 1988년 7월 14일에서 19일까지 핀란드 헬싱키에서 개최된 <북과 해외동포 기독학자간의 대화>에 초청됨으로써 북녘 사람들과의 첫 만남을 이룰 수 있었다.

1988년의 남과 북, 해외 기독자들의 헬싱키 모임까지의 역사는 10년의 길고 지루하고 간고한 세월의 연속이었다. 북미주와 유럽의 소수의 학자, 목사, 실업인들이 북녘의 통일 관련 전문가, 기독자들과 유럽의 동서 관계 중립국 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엔나에서 모여 통일 대화를 시작한 것은 1981년부터였고, 1986년까지 네 번 이어진 후, 1988년 핀란드의 수도 헬싱키에서 모이게 된 이 회의에 내가 참석한 것이다.

나는 ‘통일 신학 운동’에 이렇게 참여하면서 나의 정치적․신학적 입장을 분명히 했다.

“통일 운동은 민족 운동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민족 운동은 남북대화와 좌우합작을 외치던 해방 초기 민족 운동 주체들의 뒤를 따라야 합니다.”

“나는 이승만의 반쪽 대한민국이 아닌 김구 주석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통일정부 수립 정책의 뒤를 따르렵니다.”

“나는 친북도 친남도 아닙니다. 다만 자주적이며 평화적인 민족 통일과 민족교회 형성만이 나의 소원입니다.”

조동진 박사 ⓒ이상범

평양 방문 및 가족들과의 만남

이후 헬싱키에서 돌아간 전금철, 안병수 두 북한 대표는 나에게 초청장을 보내왔다. 1988년 8월 5일부로 되어 있는 이 초청장은 ‘조선해외동포원호위원회 위원장’ 이름으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방북 일정은 내가 ‘편리한 가장 가까운 시일 안에’ 방문해 달라고 되어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넉 달이 지난 1989년 1월 22일에 평양에 도착한 나는 첫날 해외동포원호회의 공식 환영만찬회에 참석하고 새로 지은 봉수교회와 천주교 장충성당을 방문하였으며 기독교도연맹 간부들과 대화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 후, 고향인 평안북도 피현군을 방문하여 3박 4일 정도 그곳의 가족, 친족들과 만날 수 있었다.

내가 피현을 떠난 것은 1946년 2월 15일이었다. 그리고 1989년 1월 22일에 또 다시 피현 땅을 밟았으니까 햇수로는 44년, 만으로는 43년이 된다. 1월 22일 낮 12시 15분에 평양역을 떠난 급행국제열차는 신의주를 거쳐 중국 북경까지 가는 고급 열차였다. 내가 탄 특실의 승객들은 대부분 군장성들과 고위 공직자들이었다. 나보다 2년 아래로 어렸을 때 한방에서 자라던 사촌동생 덕룡이가 평안북도 교포국 대표들과 함께 나를 맞이했다.

미리부터 와서 기다리던 동생들, 조카들, 그리고 손자손녀들이 줄을 지어서 나를 맞아주었다. 키가 큰 대일이 형이 내 손을 꽉 잡고 눈시울을 적셨다. 평양까지 와서 나를 맞았던 덕산이가 먼저 돌아와서 동생들과 친척들을 한 사람씩 소개해 주었다. 덕승이와 덕현이, 덕연이, 영일이, 원일이까지는 내가 기억하는 얼굴들이지만 그밖의 40대 이하의 얼굴들은 모두 처음 보는 가족들이었다.

나의 할아버지, 할머니께서는 아들만 여섯을 두셨다. 우리는 여섯 아들의 자녀들로 해방될 때까지 한 집에서 살거나 한 동리에서 살았다. 그런데 44년 만에 내 앞에 나타난 한 할아버지의 자손만 50여명이 넘게 내 앞에 모인 것이다. 고향의 가족들을 돌보고 집안의 어른 노릇을 한 것은 사촌동생 덕룡이었다. 덕룡이는 나에게 고향 식구들(할아버지의 자손들)의 이름과 나이와 지금 살고 있는 주소를 자세히 적은 종이를 내 손에 쥐어주었다. 나의 할아버지의 자손으로 고향 땅에 살고 있는 가족의 수는 놀랍게도 150명이 넘었다. 더 놀란 것은 그 무서운 전쟁을 겪었는데도 전쟁 중에 희생된 사람은 평양 폭격 때 파편에 맞아 돌아가신 막내 삼촌 단 한 분뿐이었다. 한 할아버지의 자손이 지금은 북과 남과 미국에 흩어져서 서로가 서로를 알지도 못하고 살아야 하는 이 민족의 아픔과 분단의 슬픔이 내 가슴속에 되살아나면서 나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은 고통을 그날 밤새도록 겪었다.

나는 지금도 고향집에서 지낸 나흘 동안에 이루어진 모든 일을 잊을 수가 없다. 특히 두 가지 일만은 꼭 이 글에 남겨야 한다. 그 첫째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산소를 찾아 온 가족이 함께 찬송을 부르고 기도를 드린 일이다. 44년 만의 성묘길에 오르게 된 1월 23일 월요일 아침 나를 만나기 위해 모여든 가족과 친척과 문중들이 지난밤을 사촌동생 덕룡이의 집과 덕산이 집에 나누어져 밤을 지내고 모두 덕룡이 집으로 다시 모였다. 모두가 생소한 얼굴들이었다. 그러나 모두가 함께 둘러앉아 머리를 숙이게 하고 간절한 기도를 올렸다. 그들은 모두 감격한 모습들이었다. 6․25가 일어났던 1950년 이후 처음 드리는 가족기도였다.

이렇게 세 밤을 지내는 동안 나는 고향에 남았던 사촌동생들이 전쟁 중에 겪은 이야기며, 얼마 되지도 않는 땅을 가졌는데도 그 땅이 5정보가 넘었기 때문에 지주로 숙청을 당한 넷째 작은 아버지 이야기도 들었다. 유복자로 태어난 다섯째 작은 아버지의 막내아들 덕승이는 전쟁에 나가자마자 포로가 되어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있다가 포로 교환 때 ‘귀환병’으로 고향에 돌아왔다고 했다. 넷째 작은아버지의 셋째 아들인 덕현이는 인민군 소좌로 강원도 양양까지 내려갔다가 살아 돌아왔다고 했다. 다섯째 작은 아버지의 맏아들 덕룡이와 둘째 아들 덕산이는 육군 소좌와 중좌가 되어, 형은 군관학교 교관으로 동생은 탱크부대 부대장으로 낙동강까지 내려갔다가 살아왔다고 했다. 나와 상반된 처지에 있던 이들의 과거를 듣고 있던 나는 또다시 분단과 민족의 분열의 슬픈 운명에 가슴을 치며 괴로워했다.

인민학교에 다니는 어린 손자가 내 앞에서 떠나지 않고 내내 따라다녔다.

“학교는 안 가도 되니?”

“네, 선생님께 말씀드렸어요.”

“뭐라고 말했는데?”

“미국에서 할아버지가 오셔서 학교 못 오겠다고 했디요.”

“선생님이 뭐라더냐?”

“미국 할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학교 나오지 않아도 된 댔어요.”

나는 이 순진한 인민학교 어린이와 선생의 대화에서 통일을 열망하고 분단의 아픔을 나누려는 민족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평양으로 돌아가기 전날 밤 덕룡이는 가족과 친척 모두를 모아놓고 “내일은 형님이 떠나시는데 모두 모여 형님의 말씀을 듣자”고 했다. 나를 시중들던 조카 영란이가 내 팔에 매달려 울음을 터뜨렸다. 모두가 머리를 떨구고 흐느꼈다. 나는 “통일의 날은 멀지 않다. 국제 환경이 그렇고 민족의 소원이 그렇다. 이 단절(斷切)의 아픔이 더 가지 않도록 기도하고 간구하며 기다리자”고 위로했다. 그리고 나서 다 같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나의 살던 고향은 .......”

“우리의 소원은 통일 ......”

이런 노래를 계속 부르는데 동생 중 하나가 갑자기 어릴 때 어머니와 함께 부르던 찬송을 부르겠다고 했다.

“예수 사랑하심은 거룩하신 말일세 ......” 모두가 눈을 반짝이며 함께 불렀다. 그리고 40이 갓 넘어 보이는 먼 친척 조카 한 사람이 일어서서 다른 찬송을 불렀다.

“저 좋은 낙원 이르니 그 쾌락 내 쾌락일세. 이 세상 추운 일기가 화창한 춘일 되도다......”

그는 3절까지 글자 하나도 틀리지 않고 불렀다. 나는 그에게 어떻게 그 찬송을 아느냐고 물었다.

“어머니가 날마다 나를 품에 안고 젖을 먹이면서 부르시던 찬송입니다”고 대답했다. 나는 그의 손을 마주잡고 한없이 울었다. 나는, 북녘 땅에는 보이는 교회는 없었어도 믿음의 뿌리는 이렇게 살아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고향 땅 피현을 떠났다.

김일성 주석과의 만남

그리고 나는 1990년 11월에도 평양을 방문할 수 있었다. 그동안 나는 민족 화해를 위한 대북 활동을 나의 믿음의 틀 안에서만 실천했고, 북녘의 노동당 간부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도 공산당이 될 가능성은 없다. 그러나 해방과 통일을 위해서는 나와 이데올로기를 달리하는 우리 민족의 어느 누구와도 화해할 수 있다.”

나의 이런 입장은 나의 대북 활동에서 구체적으로 북녘의 지도층을 만나기 위하여 핀란드 헬싱키로 간 일이나, 한시해 대사를 비롯 북녘의 고위 관리들을 미국으로 초청하고 카터 대통령을 방문한 일 등으로 실천되었다. 특히, 북한 UN대사 한시해 일행을 우리 연구소가 미국으로 초청했을 때 나는 그를 통하여 김일성종합대학과의 ‘종교학과 발전을 위한 학사 교류’를 발전시키겠다고 약속했다. 나는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김일성종합대학 종교학과 교재의 출판과 도서의 기증을 약속했다. 이러한 약속은 공식 문서로 김일성종합대학에 전달되어 1992년 4월 나는 김일성종합대학 총장 박관오 박사의 공식 초청장을 받았고, 5월 23일 나의 세 번째 평양 방문길에 올랐다. 그리고 내가 약속한 2,517권의 성경과 신학도서와 성경 주석과 각종 신앙도서를 공식적으로 김일성종합대학 대도서관에 기증한 기념으로 오전 10시 정각 ‘금수산 의사당’이라고 불리는 ‘주석궁’에서 김일성 주석을 만나게 되었다.

멀리 접견실 출입문 앞에 김일성 주석이 뒷짐을 지고 서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아내와 함께 서서히 그의 앞까지 걸어가서 정중하게 예를 갖추어 인사를 했다. 그리고는 배석할 윤기복 비서 내외와 여연구 부의장, 그리고 한시해 부위원장이 함께 한 줄로 서서 기념촬영부터 했다. 그 다음 나와 아내는 의전실장의 안내로 접견실에 들어섰다. 접견실은 장엄하고 무게 있게 꾸며져 있었다. 나와 아내는 김 주석의 맞은 편 정면에, 다른 배석자들은 김 주석의 좌우편에 앉았다.

한 시간 이상 계속된 접견장의 대화는 자유롭고 유용했다. 김 주석은 이미 나의 가정 배경과 미국에서의 나의 북미 화해와 관계 정상화를 위한 활동을 소상하게 알고 있었으며, 자기 부모들의 신앙생활과 교회 봉사 이야기와 함께 나의 대미 활동에 대한 감사의 말을 연속하였다. 또한 미국에 대한 정책을 소탈하게 말했다. “40년 전 전쟁의 적국이 지금도 적국은 아니다”, “아시아의 평화를 위하여 미군이 조선 반도에 남아 있을 필요가 있다.” 뿐만 아니라 나의 교회관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히기도 했다. “조 목사의 민족교회사관을 잘 읽었습니다. 그러한 역사관과 교회관은 나의 주장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나는 1994년 4월의 봄 축전에 미국에서 평양을 찾은 유일한 교포로 다시 금수산 주석궁을 방문했다. ‘미국의 세계지도력’을 내세우면서 내치에서 외치에로 정치 방향을 바꾸는 가운데, 미국과 북한의 관계가 핵개발 문제로 끝없이 꼬이기 시작하면서 도리어 미국과 평양의 관계는 한걸음 전진하는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이러한 때에 미국에서 평양에 한 달을 머물면서 날마다 가능하면 많은 사람을 만나야만 했다.

그 해 4월 15일은 김일성 주석의 82회 생일이라 금수산 의사당 주석궁에서 열리는 연회의 초청장을 받고 주석 테이블로 안내되었다. 이 주석 테이블에는 김일성 주석이 앉고 주석 테이블 중심으로 일곱 번째 자리에 내 이름이 있었다. 나는 이날의 금수산 의사당 연회에 나의 자리에 대한 특별한 배려가 미국의 카터 대통령의 평양 방문의 길을 열어준 데 대한 감사의 뜻이 담긴 외교적 배려였다고 생각한다. <계속>

정리: 정소민/ 경희대 국제대학원 국제개발협력학 전공 박사과정

정소민 sominy7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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