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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100주년, 부끄럽기 짝이 없다[평화통일연대 평화칼럼] 유시경 신부 - 평양, 윤동주의 ‘서시’

올해는 시인 윤동주의 탄생 100주년이다.(1917-2017) 나는 2000년부터 2010년까지 10년간 윤동주의 첫 일본 유학지인 동경의 릿쿄대학에서 교목으로 일했다.

윤동주(뒷줄 맨 오른쪽)와 송몽규(앞줄 가운데). 자료사진.

재직 중에 알게 된 사실은, 한국에서는 유치원생도 알 정도로 유명한 시인이지만, 일본에서는 아주 일부 일본인들을 제외하고는 시인의 존재가 전혀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다. 다만, 윤동주 시인을 기억하는 극소수의 일본인은 시인의 오늘날 위상에 큰 공적을 남겼다.

이 중에는 70년대에 시인의 존재를 수필로 알려 교과서에 실리게 한 분, 유학생 독립운동 취조와 재판 기록을 발굴한 분, 80년대에 시인의 시집을 일본어로 번역한 분, 아직 한국이 중국과 수교되기 전에 고향에서 묘소를 발견한 분, 90년대 들어 광복 50주년의 해인 1995년에 KBS와 NHK 공동으로 다큐멘터리를 만든 분, 고향방문단을 조직하고 이후 줄곧 윤동주 연구에 헌신한 분, 두 번째 유학지인 쿄토 동지사대학에 시비를 세운 분들, 20년 이상 후쿠오카 형무소 유적지에서 시 낭독 모임을 해온 분들, 쿄토 우지강가에 시비를 세운 분들 등, 결코 적지 않은 분이 있었다.

이 분들과 연결되면서, 동경에서도 윤동주 추모회를 조직하고 2007년부터 매년 시인의 기일에 맞춰 동경 릿쿄대학에서 추모집회를 10년간 개최하고 윤동주 장학금을 만들었다. 이렇게 시인을 기억하고 조금씩 배움과 깨달음이 늘어가는 가운데, 뒤늦게 다시 알게 된 중요한 사실이 있다. 연변 조선족 자치주의 윤동주 연구가들을 통해 북한에서도 90년대에 윤동주 시인이 재평가되고 있다는 점이다.

“일제시대 식민지 통치의 가장 포악하고 암담한 그 마지막 시기 조선문학 발전 역사에서 특기할만한 사실 중의 하나는 시인 윤동주의 출현이다.” (박종식 ‘통일문학’)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고 문익환 목사가 1989년 3월 평양 방문 때에, 환영 인파 앞에서 연설 중에 윤동주의 서시를 인용한 일이다.

1933년 숭실중학 시절. 장준하, 문익환, 윤동주 (뒷줄 왼쪽부터). 자료사진.

문익환 목사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윤동주와, “모든 통일은 선”이라고 외친 장준하의 마음으로 대화하러 왔노라고 선언했다. 윤동주도 장준하도 문 목사의 용정 명동초등학교의 동창이었다.

동주가 비운의 죽음을 맞이한 것은 해방을 반년 앞둔 1945년 2월 16일이다. 시인의 가슴 속에는 오로지 분단 이전의 “통일한국”만이 존재했다. 1936년 평양 숭실고가 신사참배 거부로 폐교를 당해 고향으로 돌아와 광명중학교에 다니던 시인은 수학여행으로 금강산에 다녀왔고, 시를 한 수 읊었다.

 

만상을

굽어 보기란-----
 

무릎이

오들오들 떨린다.
 

백화

어려서 늙었다.
 

새가

나비가 된다.


정말 구름이

비가 된다.
 

옷 자락이

춥다.
 

- 비로봉, (1937.9)

 

지금 통일의 꿈이 멀어지고 작아지는 듯한 어려운 때이지만, 시인 윤동주가 걸었던 금강산 등산로를 남과 북의 젊은이들이 함께 오르는 평화통일 시대를 꼭 열고 싶다. 북의 청년들이 한라산 백록담을 보고, 남의 처녀들이 백두산 천지를 함께 노래하는 때를 앞당기고 싶다. 윤동주의 100주년에 부끄럽기 짝이 없다.

유시경 신부 / 평화통일연대 운영위원·성공회 교무원장

* 이 칼럼 평화통일연대에서 제공했습니다. (평화통일연대 홈페이지 바로가기)

유시경  08skyo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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