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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한동대 학생의 소회 '지진이 지나고 남은 것'

늘 굳건히 변치 않으리라 생각했던 어떤 것, 이를테면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땅, 조금 더 확장시켜보자면 나의 세계 전체가 흔들리고, 무너지는 경험은, 평소에는 잊고 있었던 본능에 가까운 공포심을 일깨웠다.

수요일(15일) 오전 수업을 마치고 편안한 복장으로 혼자 쉬고 있던 나는 대수롭지 않게 넘긴 잠깐의 여진에 뒤따른 10초 정도 되는 본진에 혼비백산하여 패딩만 걸쳐 입고 잠옷을 입은 그 상태로 원룸을 뛰쳐나왔다. 집 뒤에 자리잡은 유치원에서는 운동장으로 탈출한 아이들이 소리지르며 울고 있고, 집에서 쉬다 나온 자취생 대부분이 나처럼 수면잠옷을 입고 있었다. 잠깐 살짝 흔들린 것이었다면 꾀나 재미난 광경이 연출된 것일 수도 있었겠지만, 현장에 있던 우리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고 후들거리던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새 없이 계속하여 여진이 왔고, 이런 상황에 대비되어 있지 않은 채, 어디로 가야 할지 길을 잃은 채, 위험한 도로와 길들에서 헤매었다.

나는 가족들의 전화에 애써 태연한 척 하며, 연락 온 많은 사람들에게 괜찮다고 생존소식을 보냈지만, 여진이 날 때마다 너무 무섭고 울고 싶었다. 그 날은 포항의 모두가 하루 반나절을 추위에 떨며 공터로 모여들었다. 재난 영화의 한 씬 같기도 하고 겪으면서도 내가 무엇을 겪고 있는지 실감이 잘 나지 않았다. 상황의 모든 요소 중 가장 나를 두렵게 한 것은 ‘불확실성’이었다. 앞으로 언제, 얼마나 땅이 더 흔들릴지 모른다는 것, 언제 다시 집에 들어가도 되는 지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진원지가 가까워 피해가 더 심각했던 학교는 휴교령을 내렸고, 결국 나는 학교에서 지진을 겪고 나온 룸메이트와 심야버스를 타고 서울에 있는 집으로 갔다.

지진이 심어준, 혹은 일깨워준 근원적 공포에는 후유증이 뒤따랐다. 서울에 오고 나서도 아이들이 쿵쿵거리며 뛰는 진동에, 혹은 사이렌이나 경보음 소리에 깜짝깜짝 놀라게 되었고, 친구들은 집과 건물이 무너져 내리는 꿈으로 잠을 설쳤다. 제대로 공감해주지 못하거나 잘못 공감해주는 주변의 반응, 호기심 어린 악의 없는 질문들에도 우린 마음의 상처를 받았고, 지진을 함께 겪지 않은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이 불편해졌다. 그 중 가장 불편했던 것은 온라인 혹은 오프라인에서 우리에게 일어난 재난에 대해, 너무 섣부르고도 배려심 없는 의미를 부여하고 해석을 하려는 시도들이었다. 가장 대표적으로 일전에 한동의 인권학회에서 주최하려다가 취소된 퀴어신학 세미나를 지진의 원인으로 돌리는, 마치 인간의 이성을 압도하는 자연의 현상에 대한 미분화된 대처로써 인간 재물이나 희생양을 만들려는 시도가 있었다.

이 무례한 가설은 나를 여러 가지 측면에서 화나게 만들었는데 세 가지 정도로 간추려보려고 한다. 첫째로, 고난 중인 사람을 위해 마음 아파하며 위로하기는커녕, ‘네가 모르고 지은 죄에 대한 결과’라며 욥을 정죄했던 욥의 친구들처럼, 고난의 당사자이기도 한 그들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상처를 가중시키고, 또 다른 상처를 만드는 잔인하고 근거 없는 비난이었다. 둘째로, 어떤 결과의 원인을 죄로 돌리는 것은 노아의 방주 뒤에 무지개를 띄어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으신 그리스도의 구원의 의미와 값어치를 퇴색시키는 동시에, 인간으로서는 함부로 이렇다 저렇다 단정지어서는 안 되는 하나님의 뜻의 영역을 침범한 신성모독적인 발언이었다. 마지막으로, 함께 겪은 고난에 의해 심령이 가난해져 있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최악의 일은, 마치 동일본 대지진의 원인을 조선인에게 돌리고 학살하였던 것처럼 또 다른 사회적 소수자를 타깃 삼아 그들을 핍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욥기를 한동안 묵상한 적이 있었다. 평소엔 너무 게을러서, 혹은 관심 자체가 없어서 펼치지 않았던 성경책인데, 개인적인 삶의 고난 가운데, 욥기의 말씀에 어떤 해답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책을 펼쳤던 것 같다. 그리고 내가 발견한 것은 나와 놀라울 정도로 닮아있는 욥의 말들, 그리고 세 친구들이 욥에게 하는 말들이었다. 나는 어릴 적부터 짙은 반추적 성향에 의해 자주 우울에 휩싸이곤 했다. 그러면서도 내 스스로를 위로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런 자신을 비난하며 나를 두 번 괴롭혔기 때문에, 그 우울은 남이 알아 줄 수 없을 정도로 깊고, 아마 스스로는 빠져 나오기 힘들었었다. 몇 차례에 걸친 삶의 굴곡 가운데, 나 자신에 대해서 조금 떨어져서 관찰할 수 있게 되고, 나보다 먼저 살았던, 그러나 비슷한 괴로움을 겪었던 사람들의 문학적, 학문적 고민의 결과를 공부하고, 좋은 상담가 분들과 면대 면의 상담 세션들을 거치면서 내가 왜 그렇게 괴로웠었는지, 또 왜 나 자신을 그렇게 괴롭게 만들었는지 조금은 알게 되었다. 도식화된 괴로움의 핵심에는, 정죄함으로써 끊임없이 자신을 깎아 내리던, 안을 향해있던 나의 손가락이 있었다.

그 정죄의 말들은 욥의 친구들의 말들과 소름 끼칠 정도로 닮아 있었다. 욥의 반응 또한 마찬가지였다. 욥의 괴로움이 가중되자 욥은 마침내 탄식하며 세상의 부조리에 대하여 말한다. 남부러울 것 없었던 욥의 인생 와중에도 그는 사회의 불평등에 대한 인식과 질문을 늘 품고 살았던 사람이었던 것 같다. 나 역시 그랬기에 욥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욥과 욥의 친구들 모두에게 하나님께서는, 간단히 말해 이렇게 질문하셨다. “너네가 대체 뭘 아느냐?” 그렇다. 나는 뭣도 모르면서 내가 겪는 괴로움에 대하여 멋대로 해석하고 스스로를 벌주는 오만함에 사로잡혀 있었다. 불완전한 모습 그대로, 언제 어디서 누구를 통해서든 사랑의 손을 내밀어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외면한 채, 나는 나 자신을 탓하고, 이런 나로 태어나게 된 것을 어쩌면 하나님과 세상에 원망하며 많은 세월 우울과 고독에 잠겨 지낸 것일지도 모르겠다.

고난의 의미는, 그 모든 것이 다 지난 다음, 공포와 두려움이 진정되고, 서로의 눈물을 닦아주는 사랑과 치유의 과정이 지난 다음, 우리 스스로가 찾아내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세월호 참사 때 많은 유가족들이 교회의 경솔하고 무신경한 언행에 상처받고 교회를 떠나게 되었다는 말을 세월호 1주기 유가족 간담회에서 들었다. 그 당시에도 경악을 금치 못했던, 뭇 목사들의 발언과, 국민적 참사에 대한 교회의 해석과 대응은, 이해할 수 없는 고난에 함께 절망하고 아파하던 많은 사람들의 분노를 샀다. 인간으로서는 이해 못할, 하늘로 고개를 들고 “왜?”라는 탄식을 자아내게 만드는 큰 고난 앞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그 고난의 중심에 서 있는, 그 고난을 온몸과 온 인생으로 받아들이며 겪고 있는 사람들을 감싸주고 함께 우는 것뿐이다. 혹, 먼 훗날 그분들의 입술로 고백되어질, 그 의미는 본인도 하나님도 아닌 제3자가 부여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많은 인고와 연단의 세월 후에 보석처럼 나타나는 것이다. 혹은 끝까지 그 의미를 찾지 못하더라도, 고난을 딛고 이 아픈 생을 계속해서 살아내는 것 자체가 십자가를 지고 가는 인생일 것이며,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일일 것이다.

십자가 구원의 의미는 맘대로 죄지으며 살던 우리가 일순간 회개하고 죽어서 천국 가는 것에 있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구원이 성립하려면 일단 우리는 우리의 죄 때문에 죽을 지경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죄가 너무 깊고 무거워서 나를 비롯한 그 누구도 이 짐을 짊어질 수 없음을 탄복하며 인정해야 한다. 죄가 좋고 달콤한 상태에서 십자가 앞에 나올 인간이 누가 있겠는가? 그 전제조건 하에, 나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죽도록 괴롭히는 그 죄를 예수께서 대신 짊어지고 가셨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내가 마땅히 지고 가야 할 그 십자가에 죄 없고 흠 없는 그 분이 대신하여 매달려 죽으셨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 우리는 그 믿을 수 없는 은혜 아래 산산이 부서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와중에도 예수를 향해 저주의 말을 퍼붓거나, 혹은 빌라도처럼 손을 씻고 관조하거나, 아니면 베드로처럼 ‘나는 그 분을 모른다’고 하는 그 관중의 사람 모두가 사실 나의 모습임을 알았을 때, 그 분께 너무 죄송하고 면목없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구원의 참 의미는 그 밑바닥에서부터 시작된다. 예수께서는 3일 뒤 부활하셔서 우리 앞에 다시 나타나셨다. 그 분께서는 우리를 용서하시고 영원히 사랑하신다는 하나님의 평화의 메신저이자 하나님 자신으로서 우리에게 나타나시어, 두려워 말라 하시고, 아침을 구워주시고, 나를 사랑하냐고 물으시고, 축복하시고 하늘로 올라가셨다.

우리는 인과응보, 권선징악의 통상적인 관념과 도덕관에 너무 익숙한 나머지, 놀라운 구원의 사건을 마음으로는 잘 이해하지 못하거나, 무심코 평가절하해 버리는 오류를 자주 범하며 산다. 아무리 인류를 구원하시고 용서하셨다고 해도, 나의 원수는 벌해주시길, 내가 싫어하는 사람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지길 바라는 것이 나의 모습이다. 혹은 구원의 소식은 접했지만 그 사실이 잘 믿기지가 않고 와닿지가 않아 계속해서 내 죄 가운데 갇혀서 끊임없이 자신을 정죄하며 하나님께서 주신 인생을 아무렇게나 방치하며 살아가는 죄를 범하기도 한다. 이 글을 적고 있는 나조차도 아직 해결하지 못한 죄책감과 과거의 잘못된 언행의 망령에 사로잡혀 있기에, 자신 있게 나는 용서받았다, 예수께서 나를 구원하셨다, 고백하지 못하는 처지에 놓여있다. 하지만 그런 내 모습 그대로 그 분께서 나를 받아주시고 위로와 평안을 내려주실 때 나는 비로소 내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하염없이 눈물만 떨군다. 그리하여 나는 구원은 한번의 뜨거움에 휩싸이다 끝나는 일회성의 사건도, 천국 가기 위한 면죄부도 아닌, 지금 이 순간에도 시시각각 일어나고 있는 기적 같은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사랑은 모든 허물을 덮는다. 예수께서 하신 모든 말씀에는 사랑이 담겨 있다. 우리에게 하신 유일한 명령도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으로 압축된다. 우리는 우리의 인식의 한계에 갇힌 편협한 질타와 남을 향한 손가락질로 사랑과 용서의 구원의 의미를 저버려서는 안 된다. 홍수 때도 방주를 만들어 노아의 가족을 지켜주셨던 것처럼 나는 심각한 재난상황에도 우리를 지켜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무지개를 띄워주신 하나님의 약속에 소망을 품는다.

우리는 이번 지진의 사건을 통해 우리 자신도 언제든 사회적 약자, 소수자 및 재난 상황의 피해자가 될 수 있음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나와 함께 포항에 있었던 친구와 개인적으로 느낀 점을 나누던 중 그 친구에게서 이런 말을 전해 들었다. 집에 돌아온 후 외출을 삼가다가 나간 교회에서 만난 뭇 사람들의 반응의 대부분이 아픔에 공감해주기보다는, 겪어보기 힘든 희귀한 일이 일어난 것에 대한 장난 섞인 놀라움 혹은 학교가 무너진 것에 대한 조롱에 가까운 희화화 및 사려 깊지 못한 언행으로 인해 상처 입음을 겪으면서, 본인조차 과거에는 다른 사람 일에 많이 아파하지 않았다는 것을 역으로 깨달았다고 한다. 지진 사건 이후로 그는 뉴스에서 나오는 헬기추락 사건이나 다시 나오는 세월호 뉴스에도 펑펑 울며, 지진을 겪지 않았으면 몰랐을 아픔에 대한 공감을 경험했다고 한다.

지진이 우리 개개인에게 주는 메시지는 다양할 것이다. 경주지진은, 우리나라가 더 이상 지진의 안전지대가 아니라는 것을 일깨워줌으로써 이번 포항 지진에 성공적으로 사용된 지진 대응 매뉴얼을 만들 수 있게 해주었다. 지진으로 인해 때 아닌 방학(아닌 방학)을 맞이하게 된 나는 늘 멀리 있어 챙기지 못했던 엄마 생일 및 중요한 가족 행사들에 참여할 수 있게 되어 나름 뜻 깊은 날들을 보내고 있다. 재난을 겪고도 그것으로 주저앉는 것이 아니라, 무너진 것을 복구하고, 서로 위하며, 이런 저런 의미를 또 만들어 내는 인간의 모습이 참 아름답다고 나는 생각했다.

성소수자에 대한 이슈는 한동에서 늘 뜨거운 감자였지만, 지진이 이 특정 논쟁을 이렇게까지 부각시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동성애의 이슈를 부각시켜 한동대 근처에서 일어난 포항 지진을 하나님의 노하심으로 해석한 내용의 글이 한동 안팎의 여러 기독교 관련 단체카톡방에 돌아다닌 것으로 알고 있다. 이미 논란이 되고 있는 시점에서, 또한 기독교 대학의 총학생회장 단독후보라는 사람의 강경하고 폭력적인 발언들과 함께 지진마저 그들의 몫으로 돌리려는 소수의 한동 여론에 나는 경악했다. ‘인류의 역사는 차별과 억압의 역사다’라고 해도 좋을 만큼 실낙원 이후 인간들은 권력을 위해 투쟁하며, 즉 여성이나 이민족 및 각종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 위에 군림하는 역사를 오늘날까지 쓰고 있다. 성전이라 불렸던 십자군 전쟁, 중세의 마녀사냥, 혹은 인종 우월주의처럼 성경의 텍스트를 근거 삼아 소수자를 억압하고 그들에 대한 폭력적 언행을 정당화하는 만행을 우리는 이제 멈춰야 한다. 내가 기독교인으로서 성소수자 인권을 존중하는 이유에 대한 글은 또 다른 주제이고, 그것 역시 써도 써도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은 긴 이야기이기 때문에 생략하도록 하겠다. 하지만 설사 당신이 동성애가 죄라고 믿는 사람일지라도, 지진의 원인을 그들에게 떠넘기는 것이 문제가 된다는 것은 조금의 공감능력과 이성이 있다면 동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왜 우리에게 이 사건을 허락하셨을까. 이 질문을 마음에 품고 우리는 곧 다시 학교로 돌아갈 것이다. 시간이 흘렀지만, 조금의 진동, 혹은 여진에도 우리는 깜짝깜짝 놀라며 함께 불안해 할 것이다. 또 지진이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미래의 불확실성을 함께 감수하며 다시 일상으로 복귀할 것이다. 나는 그 모든 두려움과 떨림 가운데, 우리가 서로의 온기와 존재를 더욱 귀히 여기고 더 깊이 사랑할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한다.

정담은/ 한동대 학생

*위의 동영상은 지난 15일 지진 발생 당일 한동대 건물 외벽이 무너져 학생들이 긴급히 대피하는 장면이다. 출처: 경북일보 유튜브

정담은  ukoreanew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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