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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토의 땅, 연해주에서 ‘가난한 씨앗’을 심는 사람들평화통일연대 평화칼럼 - 연해주 단상

최근 전 정권의 그릇된 공영방송 장악 사태를 바로잡기 위해 계속된 KBS와 MBC 노조의 파업으로 망외(望外)의 소득을 얻었다. 평소 유익한 프로그램보다는 상업적 또는 선정적인 드라마와 예능물 및 편향적인 뉴스 정보 탓에 ‘바보상자’라 치부하던 TV에서, 파업사태에 따른 공백을 메우기 위해 ‘휴먼 다큐’와 ‘자연 다큐’들을 재방송한 탓에 정말 오랜만에 유익한 프로그램들을 많이 접할 수 있었다.

또한 며칠 전 EBS에서는 몽골 고비(사막)의 야생동물들이 먹이를 찾아 멀리 아프간 국경까지 이동을 하고, 조류들이 월동을 위해 히말라야를 넘는 모습이 방영되는 가운데 “국경은 단지 인간들의 경계선일 뿐”이라는 멘트를 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쩌면 21세기 현재의 시각일 뿐,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우리의 선조들은 마치 야생동물과 조류들처럼 자연스럽게 국경에 구애됨 없이 중국이나 러시아를 무시로 넘나들었으며, 애초부터 그들은 그 땅을 우리 모두의 삶의 터전으로 동일시했는지도 모른다.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고 노래했던 이상화의 시를 새삼 들먹일 필요도 없이, 북한의 핵미사일과 미국의 선제공격 위협이 첨예하고 대치하고 있는 한반도의 지금은 봄을 노래할 시기가 아닌 엄동설한 동토(凍土)의 계절. 작년에 이어 연해주 크라스키노에 있는 안중근 의사와 그의 11명 동지들의 단지동맹(斷指同盟) 기념비를 찾은 날은 마침 1905년에 을사늑약이 체결된 지 112주년이 되는 날이었고, 그 기념비 인근에는 연해주에 진출한 한 한국기업이 젖소농장을 운영하고 있었으며 거기서 한 시간 여 떨어진 곳에는 또 다른 기업이 배추농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 농장에서 재배한 유기농산물로 푸짐한 점심식사를 대접받는 동안 흩뿌리기 시작한 눈발은 한 식경이 채 지나기 전에 온 시야를 하얗게 물들였고, 다음날 귀국길을 염려한 우리 일행은 서둘러 숙소로 돌아가 블라디보스토크까지 평소에는 3시간이면 올 수 있는 길을 장장 12시간에 걸친 눈 속 강행군으로 새벽녘에나 도착해 여장을 풀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또는 러시아와의 정상회담 때마다 등장했던 허다한 선언과 비전과 정책들 – 그러나 그러한 말의 성찬(盛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도 유라시아 대륙과 단절된 채, 실핏줄 같은 철도 한 가닥조차 연결시키지 못하고 있다. 복잡다단한 국제정치의 역학 속에서 하나로 뜻을 모아도 부족할 정치권이 끝이 보이지 않는 보혁(保革)갈등과 이합집산(離合集散)으로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면, 정녕 우리에게 통일은 신기루와 같은 환상으로 끝날 것인가?

안중근 의사와 그 동지들은 일제의 국권침탈에 결기를 세우고 저항이라도 했었지만, 풍요를 약속하는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의 허상에 취하고 몽롱함에 빠져 민족분단의 폐해조차 의식하지 못하고 하루하루의 삶을 꾸려가기에 급급한 오늘의 우리에게 과연 통일된 조국의 내일은 정녕 꿈꾸며 이룰 수 있는 것일까? 언제까지나 ‘지금은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라는 자조적인 음률을 읊조리고 있는 한, 우리는 감상(感傷) 이상을 기대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에겐 ‘광야’를 노래한 이육사라는 또 다른 시인이 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남북한 전체 면적의 7할에 육박하는 광활한 땅에 인구라야 고작 200만밖에 안 되어 작물을 경작하지 못하고 방치되어 있는 그 드넓은 연해주의 땅에 선각자의 손길로 대규모 농장을 일구어냄으로써, 가깝게는 남북한의 식량기지를 건설하고 나아가서는 동아시아 전체의 먹거리를 책임지겠다는 원대한 포부로 광야를 가꾸는 사람과 기업들이 있다. 이들이야말로 공허한 말잔치가 아닌 진정한 통일의 씨앗을 심는 주인공들이다.

연해주에서 만났던 한 농장주가 서울에 나왔다기에 다시 만나 “그렇게 열심히 농장을 일구는데 만약 1937년 스탈린이 우리 민족을 강제로 중앙아시아에 이주시켰던 것처럼, 나중에라도 러시아 정부가 우리 기업에 어떤 불리한 제재를 가하면 어떻게 합니까?”라고 조심스레 묻자 우문(愚問)에 현답(賢答)이 돌아왔다. “우리가 혼자 먹지 않고 같이 나누면 됩니다. 남북한뿐 아니라 러시아, 일본, 중국, 대만을 포함한 동남아 지역까지 모두가 그 혜택을 골고루 나누면 됩니다.”

나는 오늘도 인천에 있는 KORAIL 역사(驛舍)의 ‘이음’ 카페에서 따뜻한 남쪽 나라를 찾아온 북녘 출신 바리스타가 내려준 따뜻한 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단절’된 철마(鐵馬)가 사통팔달(四通八達) 유라시아 대륙과 이어지는 꿈을 꾼다. 그리고 동토의 땅일망정 우직한 자세로 ‘가난한 씨앗을 심는’ 일이야말로 ‘분단’된 민족의 ‘통일’을 이루는 길이라 믿기에,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는 시 구절을 되 뇌여 본다.

신영욱 / 예사랑교회 목사, 평화통일연대 운영위원

* 이 칼럼은 평화통일연대에서 제공했습니다. (평화통일연대 홈페이지 바로가기)

신영욱  ywshee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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