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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러시아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동아시아재단 정책논쟁 제91호

‘강대국 러시아,’ 그 역사적 열망

1990년대 사회주의 체제전환이라는 혼란기를 거쳐서 금세기 들어 러시아는 다시금 강대국으로서의 부활을 꿈꾸고 있다. 이 와중에 러시아는 세 번째 아시아로의 회귀를 시도하고 있다. 그러나 그 지정학적 맥락과 러시아의 자기 정체성은 과거와는 사뭇 다르다. 19세기 중반 이래 지난 20세기 말까지 러시아는 두 번의 아시아로의 진출을 시도했다. 그 첫 번째는 영토 확장과 제국 건설이 국가의 속성상 ‘자연시’되었던 19세기 민족주의 지정학 경쟁의 시대에,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와중에서 제정 러시아 역시 팽창적인 동방정책을 펼친 것이다. 니콜라이 2세(Nikolai Aleksandrovich Romanov)의 이른바 “원대한 아시아 계획”이었다. 청국에 대한 열강들의 경쟁에서 청국이 무릎을 꿇은 틈을 타서 러시아는 만주와 한반도에까지 그 영향권을 넓히고자 했고, 아시아의 새로운 제국주의 세력인 일본과 한반도의 분할을 논하기도 했다. 그러나 제정 러시아의 아시아 야심은 러·일 전쟁에서의 패배로 참담하게 좌절되었다.

2차 세계대전에서의 승리로 1945년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의 38도선 분할에 합의하고 북쪽에 북한이 들어서면서 러시아는 과거의 치욕을 씻고 아시아 진출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는 듯 했다. 스탈린(Joseph Stalin)은 “소련 인민들은 일본이 패퇴하고 40년 전 역사의 오점이 지워질 그날이 올 것임을 확신하고 지난 40년간 이날이 오기를 고대해왔다”고 했다. 19세기의 지정학적 경쟁은 이제 어떻게 정치경제를 조직하느냐 하는 이념에 따라 세계를 공간화하는 이데올로기 지정학으로 그 모습을 바꾸었다. 소련은 이념에 따라 공간화된 세계 진영의 한 패권국으로서 초강대국의 지위를 차지했지만, 이 역시 1991년 소련의 붕괴로 스러졌다.

18세기 피터 대제(Peter Alekseevich)가 러시아제국을 성립한 이래 소비에트 러시아에 이르기까지 ‘강대국 러시아’의 열망과 실천이 러시아 외교정책의 근간을 이루었고, 다른 강대국들과의 지정학적 경쟁과 대립이 러시아의 국내적 요소와 더불어 제국의 부침을 가름하는 결정요인이 되었다.

‘유라시아 강대국’ 러시아의 정체성과 아시아 회귀

금세기 들어 중국의 급부상에 따른 세력 전이(power transition)의 와중에서 동북아에서 미·중을 중심으로 한 지정학적 경쟁이 심화되고 있다. 트럼프(Donald Trump) 대통령 하의 미국은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우면서 2차 대전 이래 형성된 자유주의적 국제질서에 대한 세계의 우려를 자아내고 있고, 일본은 ‘적극적 평화주의’의 기치 하에 전쟁을 할 수 있는 ‘보통국가화’를 지향하고 있다. 시진핑(習近平)의 중국은 ‘중국의 위대한 부흥’을 의미하는 ‘중국몽’을 내세우면서 2013년 이래 ‘일대일로(一帶一路)’라는 지정학적 공간 전략을 추진하고 있고, 이에 대해서 미국과 일본은 ‘인도·태평양 전략’을 천명하고 있다. 강대국들은 다시금 자국의 정체성과 담론을 기반으로 세계정치를 공간화하고 있고, 러시아의 세 번째 아시아로의 회귀는 이러한 새로운 정체성의 지정학의 맥락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소련의 해체와 체제전환기의 혼란, 그리고 미국 및 서방에 대한 실망과 반작용으로 러시아 역시 새로운 정체성을 갈망하고 있다. 소련의 붕괴 이래 러시아를 비롯한 포스트 소비에트 공간에서는 유럽 및 아시아와 구분되는 유라시아 공간의 독자적 문명성과 정체성을 강조하는 ‘유라시아주의(Eurasianism)’가 급부상하고 있다. 특히 두긴(Aleksandr Dugin)으로 대표되는 우파 신 유라시아주의는 러시아 중심적인 반서구적 대안 가치를 제시하면서 서구(“Atlanticism”)와의 지정학적 대결구도를 강조하고 있고, 이들 중 핵심 요소들은 푸틴(Vladimir Putin) 대통령 집권 3기의 공세적 대외정책에 반영되고 있다. 발트 지역을 제외한 구 소련권을 의미하는 유라시아는 ‘근외(Near Abroad)’라는 명칭으로 이미 러시아 대외정책의 최우선순위 공간으로 자리매김했다. 2015년 1월 공식적으로 출범한 유라시아경제연합(Eurasian Economic Union)은 푸틴이 추진하는 유라시아주의 정책의 대표적인 구현체이지만, 이는 정치적으로 보다 통합된 유라시아 공동체(Eurasian Union)를 지향하고 있다. 2013년 발다이 클럽(Valdai Discussion Club) 연설에서 푸틴은 유라시아연합은 “새로운 국가, 새로운 세계에서 역사적인 유라시아 공간 민족들의 정체성을 유지하고자 하는 프로젝트”이며, “유라시아 통합은 포스트 소비에트 공간 전체가 유럽 또는 아시아의 변방이 아니라, 세계 발전의 독립적인 중심이 되는 기회”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러시아의 아시아로의 회귀는 이미 1990년대부터 거론되기 시작했지만, 유라시아 정체성의 부상과 더불어 푸틴 집권 3기에 들어서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2012년 국정연설에서 푸틴은 21세기 러시아 발전의 방향은 동쪽을 향하고 있고, “시베리아와 극동의 발전은 러시아의 국가적 우선순위인 동시에 가장 중요한 지정학적 과업”이라고 강조하였다. 또한 이를 통해서 아·태 지역에서 러시아가 “합당한 지위”를 차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물론 아시아는 러시아의 새로운 유라시아 정체성과 연계된 공간의 밖이지만, 푸틴의 말에서 드러난 것처럼 두 가지 이유로 주목을 받고 있다. ‘유라시아 강대국’으로서 러시아의 지위 회복을 위해서는 내적인 경제발전이 필수적이고, 이를 위해서는 시베리아와 극동지역 개발을 통해서 급부상하는 아시아 경제권과의 통합이 요체라는 인식이 그 하나이다. 또 다른 하나는 아시아에서 러시아의 ‘강대국 지위’를 인정받고자 함이다. 극동지방과 아시아는 러시아의 유라시아 강대국 열망을 실현시켜주는 핵심 공간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중국으로의 회귀?

이를 위해서 러시아는 2012년 이래 연방 극동개발부 설립, APEC 정상회의 블라디보스톡 개최, 극동·바이칼지역 사회경제발전 프로그램의 가동, 극동 15개 개발선도구 선정, 블라디보스톡 5개 자유항 지정, 동방경제포럼의 개최 등 일련의 조치들을 취해오고 있다. 그러나 지난 5년에 걸친 러시아 아시아 회귀는 중국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그 내실에 있어서 한국을 비롯한 다른 국가와의 관계는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미국의 지배적 지위에 대한 대항이라는 공동의 목표 하에 중국과는 안보, 군사 및 경제 협력이 꾸준히 진행되고 있다. 2014년에는 이른바 ‘세기의 딜’이라 일컬어졌던 연간 380억㎥의 대중국 천연가스 수출 및 파이프라인 건설 계약이 이루어졌고, 중국은 러시아 원유의 최대 고객으로 부상했다. 2015년에는 중국이 러시아의 S-400 미사일 방어체계와 SU-35 전투기 및 아무르급 잠수함을 구매하였고, 푸틴과 시진핑의 정상회담에서 유라시아경제연합과 일대일로의 연계 하에 공동 개발 프로젝트를 추진하기로 합의하였다. 2016년 양국 무역은 690억 달러로서 일본과의 무역의 세 배(200억 달러), 한국과의 무역의 네 배(160억 달러)에 달하고 있다.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과 우크라이나 사태로 서방과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러시아의 아시아 회귀는 더욱 가속화되고 있지만, 급증하는 중국의 힘과 영향력으로 인해서 러시아는 양자관계에서 ‘주니어 파트너’에 머무르는 비대칭성의 한계가 드러나고 있다. 러시아 내부에서는 양국 무역관계에서 러시아가 주로 에너지 자원 및 원자재를 수출하고 중국의 자본재와 소비재를 수입함으로써 중국의 ‘자원 부속국(resource appendage)’으로 전락하는 것에 대한 우려가 일고 있다. 인구 640만 명에 불과한 러시아 극동지역에 대한 중국의 물적, 인적 공세는 “황색 공포(yellow peril)”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또한 중앙아시아에서 러시아의 지위가 중국의 점증하는 영향력으로 잠식당하고 있는 현실이다. 중국의 일대일로 이니셔티브가 구체화될수록 중앙아시아에서 양국의 영향력 격차는 더욱 커질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비대칭적 파트너십은 러시아가 독자적인 강대국으로서 활동할 수 있는 여지를 제약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여타 동아시아 국가들과의 양자관계에서 러시아가 중국의 디자인에 복속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미완의 북방정책

1990년 한·소 수교 이래 한국과 러시아 양국 관계는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로 격상되었지만, 그 내실은 이러한 외교 수사에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냉전기로부터 한국의 소련/러시아에 대한 접근은 북방정책의 맥락에서 이루어져왔다. 한국 역대 정부의 북방정책은 한반도 분단체제의 극복을 위해 평화 및 안보 강화와 더불어, 유라시아 대륙에 대한 경제적 진출이라는 두 가지 핵심 목표를 추구해왔다. 이 두 가지를 공히 추구하면서도 상대적인 강조점에 있어서는 특히 경제에 초점을 맞춘 ‘시장 중심적 접근’과 북한 문제에 초점을 맞춘 ‘평화·안보 중심적 접근’으로 대별할 수 있다. 박정희, 노태우, 김대중 정부가 평화·안보 중심적 접근을 택한 데 반해서, 김영삼, 이명박, 박근혜 정부는 시장 중심적 접근을 취했고, 노무현 정부는 비교적 이 양자간 균형을 취했다.

그러나 역대 북방정책은 누적된 성과의 측면에서 단지 절반의 성공만을 거두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꾸준한 결실을 맺어왔던 것이 사실이지만, 러시아의 경제적 잠재성과 한국 경제와의 상호보완성을 감안해보면 아직도 크게 아쉬운 점이 있다. 과거 북방정책과 러시아 정책에서 드러나는 제약요인은 명확하다. 북한 변수와 한국의 대북정책이 러시아에 대한 정책을 형성하고 제약하는 주요 요인이 되어왔다는 점이다. 특히 소련의 해체 이래 평화·안보와 경제 양 측면에 있어서 공히 러시아는 급격히 부상하는 중국의 그늘에 가려져서 한국의 주 관심 대상이 아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균형자, 중재자로서의 러시아

동북아시아와 한반도가 러시아의 새로운 유라시아 정체성과 결합된 치명적 이해의 공간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의 ‘유라시아 강대국’ 열망 실현에 중요한 공간임에는 틀림이 없다. 이러한 점에서 오늘날 러시아의 아시아 회귀는 적어도 세 가지 측면에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

첫째, 러시아는 오늘날 미·중 경쟁관계에 있어서 전략적 균형자로서의 잠재력을 지닌다. 과거 1970년대 초 닉슨(Richard Nixon)–키신저(Henry Kissinger)가 소련과 중국간 불화를 틈타 중국과의 화해를 통해서 소련을 견제했듯, 트럼프는 러시아를 끌어안음으로써 중국을 견제하고자 했다. 물론 이러한 후보자 시절의 구상은 러시아의 미국 대선 개입 사건, 시리아 바사르 알 아사드(Bashar al-Assad) 정권에 대한 지지, 크림반도 및 우크라이나 사태로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과 러시아의 비대칭적 파트너십은 양국 관계에 균열의 불씨가 될 수 있으며, 이러한 점에서 미완의 강대국 러시아는 여전히 전략적 균형자로서의 가치를 보유하고 있다.

둘째, 전략적 균형자로서 러시아의 잠재성은 보다 현실적으로 동북아 안보 현안의 중재자로서의 역할로 이어질 수 있다. 남북대화와 6자회담의 재가동, 그리고 평화체제 논의 등 일련의 평화프로세스는 결국 한반도 평화체제를 완성하는 종착역으로서 동북아 지역안보협력체제로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이 러시아의 일관된 입장이었다. 작년 9월 블라디보스톡 동방경제포럼을 계기로 개최된 한·러 정상회담에서 푸틴 대통령은 문재인 대통령에게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3단계 해법’을 제시한 바 있다. 동북아에서 미·일 대 중·러 라는 신 냉전 대립구도가 고개를 들고 있는 와중에, 러시아는 북핵 문제의 평화적 중재, 지역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중재 역할을 통해서 국가적 위상의 회복을 도모할 수 있다. 한국은 이러한 러시아의 중재 역할 가능성에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

셋째, 러시아는 시베리아 및 극동지역 개발과 아·태 지역 경제와의 통합이라는 맥락에서 2000년대부터 이른바 3대 메가 프로젝트(남·북·러 가스관 연결, 북한을 통한 전력망 연계, 한반도종단철도(TKR)와 시베리아횡단철도(TSR)의 연결)를 추구해왔다. 그러나 이들 구상은 한국의 대북정책 변화와 무엇보다도 악화일로에 있는 북핵 문제로 인해서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 과거 한국의 북방정책이 남북관계와 북한 변수에 종속되어 큰 진전을 이룰 수 없었던 점을 감안, 이제는 한·러 협력을 대북 경제협력과 분리하여 추진하는 것이 필요한 시점이다. 한·러 경제협력을 포함한 극동지역에서 동북아 국가들의 다변적 경제협력의 결실이 역으로 북한에 참여와 개방의 인센티브를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완의 강대국 러시아가 오고 있다. 강대국 열망에는 중재자 역할 부여로, 경제적 이익에는 보다 구체적인 상호성으로 응답할 필요가 있다.

---이 기고문의 견해는 필자의 개인 의견이지 동아시아 재단의 공식 입장을 반영하는 것이 아님을 밝힙니다.

필자 소개

김태환은 현재 국립외교원 부교수로 재직 중이다. 2008년부터 2013년까지 한국국제교류재단 정책연구실장을 거쳐 공공외교사업부장으로 재임하였다. 미국 콜럼비아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연세대학교 연구교수, 한국정치학회 이사 및 한국슬라브학회 연구이사를 역임하였다. 동아시아재단에서 발간하는 Global Asia의 서평 편집인이다. 

주 관심분야는 ‘탈사회주의 경제변혁’과 ‘공공외교’이다. 최근의 저작으로는 「지정학, 탈지정학, 대항지정학: 평화와 공존의 한국 외교정책 정체성을 향하여」, 「정체성의 정치와 중견국 공공외교의 유형 비교」, “Authoritarian PostCommunist Transition and Its Future in China, Vietnam, and North Korea,” “Beyond Geopolitics: South Korea’s Eurasia Initiative as a New Nordpolitik,” “Paradigm Shift in Diplomacy: A Conceptual Model for Korea’s New Public Diplomacy” 등이 있다.

*본 칼럼의 저작권은 동아시아재단에 있습니다.

김태환  tk41@mofa.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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