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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평화체제: 어떤 시퀀스가 현실적일까?동아시아재단 정책논쟁 제96호

종전선언, 평화협정, 그리고 평화체제

비핵화 과정에서 평화체제는 얼마나 중요한가? 북한은 핵무장의 완성을 선언한 후, 비핵화 의지를 밝혔다. 핵무장과 비핵화는 충돌하는 목표다. 북한은 논리적 충돌을 해소하기 위해 ‘비핵화를 위한 핵무장’이라는 역설을 주장한다. ‘핵무기를 가졌기 때문에 미국이 협상 상대로 인정하고, 미국과의 관계가 정상화되면 핵무기를 가질 이유가 없다’는 것이 북한의 주장이다.

북한은 전통적으로 ‘핵무기는 적대정책의 산물’이라고 주장한다. 북한이 주장하는 ‘적대정책의 전환’은 ‘체제보장’ 혹은 ‘안보위협 해소’라는 말과 같은 뜻이다. 북한이 주장하는 체제보장은 구체적으로 두 가지 요소를 포함한다. 하나는 북한과 미국의 ‘관계정상화’이고, 다른 하나는 평화체제다. 관계 정상화는 구체적으로 외교관계 정상화와 경제관계 정상화(제재 해제)를 포함한다.

평화체제는 비핵화에 따른 보상조치가 아니라, 비핵화와 동전의 양면이다. 북한은 제3세계 국가와 마찬가지로 재래식 군비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대량살상무기를 ‘억지수단’으로 선택했다. 재래식 군비경쟁의 구조를 유지하면, 북한은 핵무기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북한이 핵무기를 포기하려면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구조를 근원적으로 해소하고, 현재의 불안정한 정전체제를 항구적인 평화체제로 전환해야 한다.

현재 상황에서 ‘완전한 비핵화’의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징검다리가 필요하듯이, 평화체제라는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잠정조치’가 필요하다. 우선적으로 고려해 볼 수 있는 조치는 ‘종전선언’이다. 종전선언은 ‘한반도에서 전쟁이 끝났다’는 정치적 선언이며, 평화협정은 평화를 만들어가기 위한 관련 당사자들의 법적인 약속이고, 평화체제는 약속이 이행된 ‘사실상의 평화’의 완성을 의미한다.

종전선언, 평화협정, 그리고 평화체제의 세 가지 개념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종전선언은 일반적인 분쟁해결 과정에서 보기 어렵다. 일반적으로 전쟁을 종결하고 평화조약을 맺을 때, 그 안에는 ‘종전’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그러나 1953년 7월 27일 유엔군과 북한·중국이 맺은 협정은 종전이 아니라 정전이었다. 전쟁은 끝나지 않았고, 다만 ‘일시적으로 중단’되었다.

종전선언은 한반도의 불안정한 정전협정이 낳은 산물이다. 물론 종전선언의 필요성은 ‘끝내야 할 전쟁을 끝내지 않은 역사’ 때문만은 아니다. 정전상태를 관리하기 위한 정전체제는 북한이 1991년 이후 군사정전위원회를 거부하면서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 폴란드와 체코라는 공산 측의 중립국 감독위원회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1953년 7월 27일 맺은 정전협정이 잘 지켜지지도 않는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바로 비무장지대다. 한반도의 비무장지대는 중무장지대로 변했다.

작동하지 않는 정전체제를 대체할 필요성은 그동안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1996년 클린턴 대통령과 김영삼 대통령이 <제주 선언>을 통해 ‘한반도 평화체제 논의를 위한 4자회담’을 제안했고, 1997년부터 1998년까지 제네바에서 6차례의 본회담을 열었다. 2005년 9.19 공동선언을 채택할 때도 ‘한반도 평화체제 논의를 위한 별도포럼’(즉 4자회담)을 합의했다. 한반도에서 평화체제 논의의 지체는 핵문제의 교착과 연결되어 있다.

종전선언과 평화협정의 참여자는 전쟁 당사자인 남북한과 미국·중국의 4자가 바람직하다. 4자회담의 역사적 사례 역시 참여 당사자를 결정하는 근거다. 다만 종전선언의 경우 북미 정상회담 장소에 따라 편의적으로 남북미 3자 사이에 추진될 수 있으나, 한반도 평화협정은 반드시 4자의 포괄협정으로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평화협정의 경우는 4자의 포괄합의를 우산으로 하고, 의제별로 남북, 북미, 남북미 등 다양한 방식으로 별도의 의정서를 맺을 수도 있다. 대체로 한반도에 군대를 주둔하고 있는 남북미 3자의 역할이 큰 것은 당연하다.

종전선언과 평화협정의 간격

종전선언과 평화협정의 간격을 어떻게 배열할 것인가? 대체로 세 가지의 선택이 있을 수 있다. 첫째는 북미 정상회담 직후 종전선언을 하고, 관계진전의 수준을 고려하여 평화협정을 체결하는 방안이다. 둘째, 종전선언에 평화정착 방안을 포함하는 방안이다. 셋째, 종전선언을 하지 않고, 종전의 의미를 포함하는 평화협정을 곧바로 체결하는 방안이다.

비핵화의 압축적 속도를 고려하면 세 번째 방안을 고려할 수 있다. 종전선언 자체를 매우 초보적인 평화협정으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와 세 번째 방안은 내용적으로 유사할 수 있으나, ‘풍부한 종전선언’보다는 ‘초보적인 평화협정’이 비핵화의 환경을 조성하는 데 훨씬 효과적이다.

그러나 평화 프로세스를 비핵화의 상응조치로 고려하면, 첫 번째 방안이 가장 효과적이다. 비핵화의 길과 마찬가지로 평화프로세스에서도 잠정적인 목표가 필요하다. 또한 종전은 전쟁이 끝났다는 정치적 선언과 더불어, 관계의 성격 전환을 의미한다. 종전선언 자체의 긴장완화 효과도 무시할 수 없다. 종전선언은 또한 ‘잠정협정’(Modus Vivendi)의 효과가 있다. 평화협정에 담을 내용들 중에는 북한과 한미 양국 사이의 입장차이가 큰 쟁점들이 적지 않기 때문에, 합의가 가능한 수준으로 관계 진전을 진행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종전선언 이후 평화협정을 체결할 때까지 정치적 관계 정상화와 더불어 군사적 신뢰구축 조치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이미 4월 27일 판문점 선언에서 남북한은 적대행위의 중단, 비무장지대의 평화지대화, 서해 평화정착 방안 등을 합의했다. 남북한의 군사적 신뢰구축을 위한 실질적인 협력은 평화협정의 내용을 구체화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사실상의 평화는 결국 법적인 평화의 모호성을 줄이는 역할을 할 것이다.

평화협정의 체결 시점도 중요한 쟁점이다. 비핵화가 최종목표라면, 평화의 최종 목표는 평화협정이 아니라 평화체제다. 약속과 이행은 다르다. 평화협정은 약속이고, 그것이 이행되어야 평화체제가 된다. 약속은 약속과 조응되어야 하며, 그런 차원에서 평화협정은 비핵화가 이행된 상태에서의 상응조치가 아니라, 비핵화 약속에 상응하는 조치다.

평화협정은 관계의 수준을 반영하여 다양한 수준으로 맺을 수 있다. 관계개선의 초기에 평화협정을 맺는다면, 매우 원칙적이고 추상적인 내용을 담을 것이다. 비핵화 수준이 높고 관계정상화의 중요조치가 달성된 상태에서 평화협정을 맺는다면, 협정의 내용은 매우 구체적일 수 있다.

북아일랜드 평화협정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평화협정은 민감한 쟁점에 대해 창의적 모호성(creative ambiguity)으로 처리한다. 포괄적인 합의에서 ‘모호성’은 불가피하지만, 때로는 새로운 분쟁을 예고한다. 대부분의 평화협정이 잉크도 마르기 전에 새로운 분쟁을 불러오는 이유는 모호성을 둘러싼 상이한 해석 때문이다. 평화협정의 이행은 결국 모호성의 관리 능력에 달렸다. 평화협정 체결 이전에 달성할 수 있는 군사적 신뢰구축의 수준이 평화협정의 구체화 수준을 결정할 것이다. 이후 평화협정의 이행과정을 통해 모호한 합의를 구체화하는 과정이 곧 평화 만들기(peace making)의 과정이다.

‘되돌릴 수 없는 평화’

남북미 3국 모두 압축적인 비핵화를 강조한다. 과거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다. 그러기 위해서는 트럼프 대통령 임기 내에 ‘되돌릴 수 없는 수준’에 도달하는 것이 중요하다. ‘되돌릴 수 없는 비핵화 수준’은 모호하고 논쟁적이지만, 상당한 수준의 비핵화의 이행을 의미한다. 물론 ‘되돌릴 수 없는 수준’은 단순히 비확산체제에서 사용하는 기술적 용어의 의미를 넘어선다.

‘되돌릴 수 없는 평화’도 마찬가지다. 군비통제의 기술적 기준을 제시하는 방안을 고려할 수 있으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적대행위의 중단, 상당한 수준의 군사적 신뢰구축 조치의 이행, 그리고 평화협정의 일부 이행까지를 포함하는 개념이다. 쉽지 않은 과제지만, ‘되돌릴 수 없는 평화’가 ‘되돌릴 수 없는 비핵화’를 만들어 낼 것이다.

---이 기고문의 견해는 필자의 개인 의견이지 동아시아재단의 공식 입장을 반영하는 것이 아님을 밝힙니다.

필자 소개

김연철은 현재 통일연구원 원장으로 재직하고 있으며 1996년 성균관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서 ‘북한의 산업화와 공장관리의 정치(1953~70)’로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삼성경제연구소 북한연구팀 수석연구원(1997~2002), 통일부 장관 정책보좌관(2004~2005) 등을 역임했고 인제대 통일학부 교수(2010~2018)로 재직하였다. 주요 저서로 『냉전의 추억』(2009), 『북한의 산업화와 경제정책』(2001) 등 다수가 있다.

*본 칼럼의 저작권은 동아시아재단에 있습니다.

김연철  mail@keaf.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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