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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대에 오른 유럽연합과 한반도의 과제유럽 아카데미 연수기(2)

6월 25일부터 7월 5일, 목회자와 시민단체 활동가, 일반 시민 등 24명이 유럽연합의 현장으로 떠났다. 유럽의 통합과 독일 통일을 통해 한반도 미래를 보는 시각을 넓히고, 상상력을 키우고자 함이었다. 지난 <유럽연합의 현장에서 하나의 유럽을 배우다>에 이어 못다 한 유럽 아카데미 연수 이야기를 전한다.

(사)뉴코리아와 코리아연구원이 공동 주관한 ‘유럽 아카데미 연수’가 6월 25일(월)부터 7월 5일(목)까지 진행됐다. 이번 연수에는 목회자와 시민단체 활동가, 일반 시민 등 24명이 동행했다. 사진은 유럽의 경계를 허문 솅겐협약이 맺어진 모젤강과 이후 이곳에 옮겨온 베를린 장벽 조각 ⓒ유코리아뉴스

'동서독 군대 통합 과정'을 주제로 클라우스 스톨크만 중령이 강의하는 모습 ⓒ유코리아뉴스

“1990년 10월 2일 자정, 동독 군대는 사라졌다.”

‘독일의 재통합’을 주제로 오전 강의를 진행한 클라우스 스톨크만 중령은 이같이 말했다. 동서독 통일 서약서 제정 후, 서독 군대는 편제를 유지했지만 동독 군대는 갑작스럽게 해체된 것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사실상 재통합이라고 보긴 어렵다는 뜻이었다. 그는 “당시 어디에도 마스터플랜이나 매뉴얼은 없었다”고 했다. 그만큼 준비 없이 통일을 맞은 것이다.

“통일을 준비할 시간이 2년 정도는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실제로 주어진 시간은 단 3개월. 한국은 이 점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남북한도 통합 과정에 들어가면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상황이 진행될 수 있다.”

스톨크만 중령은 심각했던 경제적 혼란에 대해서도 짚었다. “(정치적인 이유에서) 동서독 환율을 1:1로 정했다. 처음엔 동독 기업들이 좋아했다. 하지만 하루아침에 자유경쟁 시장에 내몰린 동독 기업들은 1-2년 만에 거의 문을 닫았다. 실업률이 30%에 이르면서 어쩔 수 없이 동독의 많은 젊은이가 군대에 지원했다. 나도 그중 하나다.”

그의 말을 듣고 상상해봤다. 군대에서 해고된 후 망연자실 있는 아버지 앞에 적의 유니폼을 입고 나타난 아들의 모습을. 독일의 통일 과정을 생략한 채 결과만 봐선 분명 놓치는 부분이 많으리라.

 

난민 문제로 시험대에 오른 유럽의 연대

이어진 두 번째 강의는 유럽의회 의원 출신의 도리스 팩 박사가 맡았다. 팩 박사는 주로 브렉시트와 유럽연합의 확대(옛 유고슬라비아 국가들의 유럽연합 가입 문제), 난민 등 유럽연합이 당면한 문제들을 이야기했다. 그중 가장 큰 이슈는 역시 난민.

“난민 문제가 이렇게까지 커질 줄 몰랐다. 처음 이탈리아, 그리스, 몰타로 난민이 몰려왔을 땐, 세 나라의 문제라고만 생각했다. 그래서 세 나라가 유럽연합에 도움을 요청했을 때 외면했다. 결국 지금과 같은 상황을 맞았다.”

이날은 마침 EU 정상들이 벨기에에 모여 난민 문제를 의논하기로 한 날이었다. ‘회의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이라고 보느냐’는 누군가의 물음에 팩 박사는 조심스럽게 “경제적 난민은 수용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에라스무스 정책(유럽연합이 경제·군사·정치에 이어 문화적 유대를 강화하기 위해 마련한 유럽 내 대학교류 프로그램)으로 인해 국가정체성이 약화되진 않느냐’는 물음엔 “(유럽인들은) 에라스무스를 통해 다층적 정체성을 갖게 된다”고 답했다. 그럼에도 최근 커지는 유럽 내 갈등으로 유럽 공동체의 연대는 시험대에 오른 것이 분명해 보였다.

점심을 먹은 후, 일요일로 예정돼 있던 세미나를 앞당겨서 했다. 이 시간에는 엘리자베스 슈미츠 박사가 우리들의 못다 한 질문을 받아 답해주었다. 짧은 시간에도 다채로운 질문이 쏟아졌다. “유럽연합은 롤모델까진 아니어도 국가적 연합이 가져오는 긍정적 영향에 대한 예시가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국가가 연합할 때, 큰 국가들이 먼저 권리를 양도해야 한다는 점이다.”

슈미츠 박사는 유럽연합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독일 통일에 대해선 “과정에 문제가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성공했다고 평가한다” 정도로 답했다. 그러면서 “독일 통일은 서독 기업이 동독에 투자를 시작하면서 빠르게 진행됐다. (한반도 통합 과정에서) 남한 기업이 북한 시장에 뛰어들 때 그것을 제어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물음을 던졌다. 남북 경협을 상상하면서 놓치는 부분이 무엇일지 생각하게 하는 질문이었다.

 

솅겐협약(1985년 6월 14일)이 맺어진 룩셈부르크 솅겐의 모젤강변에 전시된 실제 협약 사진. 당시 500명이 살던 작은 마을에는 협약장소로 마땅한 건물이 없는데다 이동의 자유를 상징하는 의미에서 배 위에서 협약이 맺어졌다. ⓒ유코리아뉴스

유럽연합의 시작이자 위기가 된 솅겐협약

금요일, 우리는 오첸하우젠에서 1시간여 떨어진 룩셈부르크 솅겐으로 갔다. 유럽 내 경계를 허문 솅겐협약(1985년)이 체결된 곳이다.

“솅겐협약은 유럽 정치사에서 가장 큰 논란을 일으킨 아이디어, 즉 사람들이 자유롭게 이동하자는 구상에서 시작된 것이다. 처음엔 프랑스, 서독,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다섯 개 국가가 참여했는데, 이동의 자유를 상징하기 위해 강에 띄운 배 안에서 협약을 맺었다. 하지만 당시에도 진짜 이것이 가능할까 하는 의구심이 있었다. 그래서 나중에 파기할 수 있다는 조건부 사인을 했다.”

가이드는 또 “과거 솅겐지역 사람들은 지갑을 세 개 들고 다녔다. 치즈는 프랑스에서, 고기는 독일에서, 나머지는 룩셈부르크에서 사야 했기 때문”이라는 재밌는 일화도 소개했다. 여권도, 환전도 필요 없는 요즘 세대에겐 상상하기 어려운 불편이리라. 하지만 안타깝게도 최근 난민 문제로 유럽 내 갈등이 격화되면서 솅겐협약이 위기에 처한 것도 사실. 유럽 공동체는 앞으로 어떤 길을 가게 될까. 

협약이 맺어진 모젤강은 본래 와인루트로 유명한 곳. 우리는 가까운 트리어에 잠시 들러 마르크스 탄생 200주년 기념 축제를 즐기고, 다시 모젤 지역의 한 와이너리를 찾아 화기애애한 저녁 시간을 보냈다.

 

프러시아와 프랑스 간 전쟁이 치열했던 스피셰렌(Spicherer)에는 프랑스와 독일, 미국, 유럽연합이 세운 기념비들이 곳곳이 있다. ⓒ유코리아뉴스

전쟁을 멈춘 ‘하나 된 유럽’이라는 꿈

토요일, 다들 모처럼 느지막이 일어나 오전시간을 여유롭게 보냈다. 더러는 산책을 하고, 더러는 근처 마트에서 쇼핑을 했다. 그리곤 10시에 자르브뤼켄으로 출발해 1시간 후쯤 1870년 프러시아와 프랑스의 옛 전투지(Spicherer Höhen)에 도착했다.

“이 전투에서 프러시아 군인 4,600명이 전사했다. 하지만 프러시아 군대가 더 몰려오는 게 두려웠던 프랑스가 후퇴하면서 결과적으로 프러시아의 승리로 끝났다. 이 전쟁에서 승리한 후 프러시아가 독일제국을 건설했으니, 어찌 보면 1차 대전의 요인이 된 전쟁이기도 하다.”

길고 치열했던 프러시아와 프랑스 간의 전쟁. 하지만 전쟁은 끝났고, 하나 된 유럽을 상징하는 유럽연합의 기념비가 그곳에 세워져 있었다. “유럽연합을 통해 경계를 넘는지도 모르고 경계를 넘은 역사적 진보에 자긍심을 느낀다”던 가이드의 말도 인상 깊었다.

이어 우리는 자르브뤼켄의 구도심인 루드비히로 가서 버그힐쯔 목사와 재회했다. 그곳에서 바로크 양식의 루드비히크 교회를 둘러보는 것으로 유럽 아카데미 오첸하우젠에서의 공식 외부 일정을 마무리했다.

 

독일 오첸하우젠에서 시작한 유럽 아카데미 연수는 프랑스 파리에서 끝이 났다. 사진은 몽마르뜨 언덕의 사크레쾨르성당 ⓒ유코리아뉴스

예술도시 파리에서 마무리한 유럽 연수

다음날, 일행 중 세 사람이 한국으로 돌아가고, 나머지는 버스를 타고 프랑스 파리로 이동했다. 오첸하우젠에서 머리로 배웠다면 파리에선 몸으로 배운 시간이었다. 대중교통을 타고 길게는 1시간씩 걸으며 예술도시 파리를 감상한 것. 밤에는 센강에서 야경을 바라보며, 낮에는 오르세미술관, 노트르담성당, 에펠탑 등에서 파리의 낭만을 체험했다. “자유로운 국경 이동과 유로를 통해선 유럽 공동체의 연대를 느끼고, 두 국가의 각기 다른 풍경을 통해선 유럽연합이 추구하는 다양성을 느꼈다”라고 하면 과장일까. 

7월 4일, 모든 일정을 마치고 한국으로 떠나면서 김소연(30, 대학원생) 씨에게 소감을 물었다. 그녀는 “프랑스와 독일이 지난 역사 속에서 수차례 뼈아픈 전쟁을 겪었음에도 평화에 힘써 지금의 유럽연합(EU)을 이룬 것에 감탄한다”며 “남북 관계도 아픈 역사를 넘어 평화로 나아가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이 말 속에 우리가 유럽연합 현장을 다녀온 이유가 담겨 있으리라. 

정지연 기자  ukoreanew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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