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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트로토피아 시대의 한반도 평화기획

남북한은 서로를 국가로 승인하지 않지만, 현실적으로는 준국가적 외교행위의 대상이다. 하나의 민족이고 통일을 지향하는 특수관계지만 양자의 집합적 정체성과 통일의 지향성은 크게 다르다. 북한이 정상국가화하여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참가하게 되고 남북간에 평화상태가 진행될 경우 다양한 남북관계를 규율하는 법적, 정책적 절차가 현재로는 불충분하다. 남북간 다양한 쟁점과 문제들을 논의하려 할 때 ‘북한은 국가가 아니므로 비준의 대상이 아니다’라는 말로 넘어가거나 ‘남북관계는 특수관계’라는 선언적 구호를 내세워 편의적으로 대응할 수는 없다. 북한 역시 남북간 약속과 합의의 절차적 투명성과 상호성을 존중하기 위한 새로운 대응노력이 필요하다. 남북관계가 통일을 지향하되 분단국으로서의 법적 정체성을 지닌 두 주체간 관계임을 명확히 하면서, 책임과 권리, 약속의 이행, 국민적 동의에 근거한 미래지향적 합의를 이루어가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탈냉전 한반도가 곧 평화와 교류를 보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탈냉전 이후의 체제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새로운 국가주의와 약육강식의 위험이 커질 수도 있다. 불확실성이 커지는 상황에서는 힘에 의존하는 강권주의 사상이 더욱 강화되기도 한다. 최근 중국의 급부상과 미중의 대립, 한국사회 내부의 남남갈등 등은 한반도 탈냉전화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현상들이다. 중국은 한동안 한국의 거대시장으로 값싼 노동력의 공급지로 짝퉁상품의 생산지로 여겨졌고 약간의 우월감을 향유하기도 했다. 하지만 중국의 급속한 경제성장 및 국제정치적 위상 강화, 사드 배치로 인한 한중마찰, 한반도 문제를 둘러싼 미중의 대립과 공조에서 보듯 이제 중국은 한반도 미래에 엄청난 변수로 작용할 가능성이 커졌다. 반면 오랜 성장의 파트너었던 일본과는 상호신뢰와 협력의 수준이 정체되거나 후퇴하고 있다. 미국과의 동맹구조도 냉전형 동맹과는 그 성격이 매우 달라지고 있다. 정치군사적으로 미국에 의존하고 경제적으로는 중국시장의 비중이 압도적인 불균형은 앞으로도 더욱 심해질 가능성이 있으며 이로부터 생기는 긴장은 탈냉전 시대의 새로운 숙제로 다가오고 있다.

박명규 서울대 교수가 20일 저녁 경동교회에서 ‘크리스천 아카데미 평화특강’을 하고 있다. 크리스챤아카데미 제공

문제는 한국사회 역시 이런 퇴행의 가능성이 없지 않다는 점이다. 전쟁은 피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넓고 평화를 향한 기대가 높다는 점에서 과거와 같은 냉전형 안보주의로 회귀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 하지만 북한의 비핵화가 진전되지 않고 북미간의 협상이 큰 성과를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북한의 상투적인 대남정책이 재현될 경우 북한을 향한 우리 사회의 대응방식에도 중요한 변화가 나타날 수 있다. 최근 젊은 세대들이 보여주는 냉정한 북한인식은 미래를 염두에 둘 때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장차 북미간의 관계가 개선되는 가운데 북한 핵문제의 해결이 큰 진전없이 장기간 지속될 경우는 더더욱 불확실한 상태가 초래될 수 있다. 핵문제를 비롯하여 다양한 쟁점과 문제들이 터져나올 것이고 이것을 관리할 능력과 비용을 요구할 것이다. 동시에 저성장의 시대에 접어든 한국사회가 이런 비용을 기꺼이 감당하려는 의지와 여력도 약화될 것이다. 북한개발을 내건 정치세력이 취약계층 복지우선을 요구하는 시민들로부터 외면당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한반도에 항구적 평화체제를 만드는 일은 한반도가 레트로토피아(지그문트 바우만의 책 제목에서 따온 것으로 과거로의 회귀, ‘실패한 낙원의 귀환’을 뜻함. -편집자 주)로 회귀하지 않을 주요한 관건이다. 남북간에 형성된 70년이 분단구조는 상당한 제도적 관성을 지닌 것이어서 나름의 질서를 형성하고 있지만 언제나 갈등과 위기를 만들어내는 속성을 내포하고 있다. 북한의 핵개발이 쟁점으로 부각된 최근에는 한반도가 인류공동체 전체의 염려거리가 되었다. 심화되는 남남갈등에서 보듯 남북간의 적대적 대립은 국내에서도 평화를 가로막는다. 한반도의 평화질서 구축은 다양한 측면을 함께 고려하는 복합적인 접근이 필수적이다.

단지 전쟁위기의 해소를 넘어 적대적 분단구조를 평화공존의 구조로 바꾸는 한반도 분단체제의 전환이 적극 추진되어야 한다. 우선 탑다운식으로 진행되는 세 정치지도자의 의지와 정책공조가 가시적인 정책 프로그램으로 만들어져야 지속가능성이 커진다. 또한 한국정부의 이니셔티브가 국제사회의 협력과 공감을 얻어 국제적인 동력으로 작동할 수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남북경협이라는 실질적 동력이 구동될 환경이 마련되어야 하는데 이것은 국제적 제재가 완화되어야만 가능하다. 따라서 국제적 신뢰를 얻을 북한의 보다 적극적이고 전향적인 노력이 필수적이다. 또 긴장완화라는 즉각적 효과가 항구적 평화체제의 구축이라는 제도적 전환으로 이어지기 위해 필요한 여러 노력들이 포괄적이고 지속적으로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실사구시적이고 결과지향적인 정책이 치밀하게 준비되지 않으면 정책적 가성비가 떨어질 수 있고 의외의 부작용으로 많은 비용을 치루게 될 수 있다. 추상적 구호와 감상적인 기대보다 냉정하고 치밀한 자체평가와 기획력을 지속적으로 점검해 보아야 한다.

국제협력과 남북협력 사이의 동적 균형이 중요하다. 현재의 정전체제의 변화, 평화체제의 구축은 미국을 위시한 국제사회의 협력과 지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이다. 미중의 대립이 심화되는 세계사적 흐름 속에서 한미동맹을 새로운 자산으로 활용하고 평화시대의 국제협력을 제도화하는 큰 구상이 남북관계 개선과 함께 추진되어야 한다. 남북 정상간의 높은 신뢰를 자산 삼아 국제사회의 신뢰를 얻을 비핵화의 실질적 진전을 얻어내고 북한의 정상국가화를 보장할만한 전환을 이끌어내도록 노력해야 한다. 대북제재의 완화라는 목표를 국제사회로부터 얻어내는 외교적 과정 자체가 북한의 신뢰와 진정성을 확보하는 과정이 된다.

특히 정치군사합의와 사회경제교류의 속도와 범위에 대한 균형있는 정책조율도 필수적이다. 현재는 군사적 신뢰구축과 정치적 합의가 사회문화적 교류나 경제협력을 앞서서 진행되고 있다. 이전에 익숙했던 ‘선이후난’ 방식, 즉 기능주의적 접근과는 반대되는 방향이다. 평화를 위해 정치적 신뢰, 군사적 긴장완화가 시급한 것은 틀림없지만 민간의 참여가 동반되는 사회경제적 교류 없이는 평화가 지속가능하기 어렵다. 항구적이고 지속가능한 평화를 위해 정부와 함께 민간이 적극 참여하는 사회경제공동체를 만들어간다는 공통의 목표가 확인되어야 한다. 현재의 남북관계는 평화공존을 향한 전략적 전환을 준비하는 시점이어서 설익은 통일론으로 이어지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 정상간 신뢰가 높아졌다 해도 여전히 민간분야와 제도적 차원에서의 오랜 단절과 이질성은 그대로이다. 민족공동체통일방안의 첫단계, 교류협력단계의 초입부에 위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평화공존의 질서를 어떻게 제도화할 것인지에 대한 깊은 숙고와 준비가 더욱 중요하다. 다만 남북관계의 속도가 빠르게 진행될 경우, 특히 다양한 영역에서의 합의가 빠르게 추진될 가능성을 고려할 때 중간단계의 제도적 틀에 대한 전략적 비전을 구체화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박명규/ 서울대 교수(사회학)

*이 글은 6월 20일 저녁 경동교회에서 열린 크리스챤아카데미 주최 평화통일 아카데미 평화특강을 요약한 것이다. -편집자 주

박명규  ukoreanew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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