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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을 하나로 묶는 스포츠 교류를 기대한다남북단일팀 ‘코리아’..선수단가는 ‘아리랑’..AGAIN 1991


스포츠를 정치 선전의 도구로 가장 교묘하게 활용했던 인물은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다. 히틀러는 게르만 민족의 우월성을 보이기 위해 독일의 복싱선수 막스 슈멜링을 이용했으며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을 통해 전체주의 나찌 독일의 위상을 대외적으로 알리기도 했다. 우리에겐 손기정 선수의 마라톤 금메달로 식민의 설움을 조금이나마 달래주었던 베를린 올림픽이었지만 세계는 병영화 된 독일의 모습을 보며 우려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결국 베를린 올림픽 이후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올림픽은 12년간 열리지 못했다.


 스포츠는 체제 대결의 장(場)

스포츠는 정치적 대리전의 역할을 한다. 냉전 시절 미국과 소련(현재 러시아)의 스포츠 대결은 한마디로 이데올로기의 대리전이기도 했다. 특히 국제대회 결승전에서 미국과 소련이 맞붙을 경우 전 세계의 이목의 집중 되었으며 양국은 피할 수 없는 자존심 대결을 벌여야 했다. 또한 중요한 정치군사적인 사건이 발생 될 때마다 스포츠는 그 의견을 표명하는 장이기도 했다. 1979년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직후 미국, 영국 등 서방 세계는 1980년 소련 모스크바 올림픽에 불참했으며 서방세계의 불참에 대한 보복으로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 국가들은 1984년 미국 LA올림픽에 불참하기도 했다.

이념의 스포츠 대결은 남북한 사이에서도 동일하게 일어났다. 1980년대 후반 사회주의권이 붕괴되기 전까지 남북은 체제의 우월성을 나타내기 위한 각축을 벌였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면에서 상대방을 압도하기 위해 열을 올렸다. 특히, 국민들의 관심이 높은 스포츠 부분에서 보이지 않는 전쟁을 치러야 했다. 북한은 1966년 런던에서 열린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8강에 진출하며 세계를 놀라게 했지만 남한은 북한 축구가 두려워 아예 잉글랜드 월드컵 아시아 예선전에 참가하지도 않았다. 북한에 패배하는 것 자체가 용납되지 않던 시절이었다.

이때부터 남한은 북한이 나오는 대회는 아예 기피했다. 19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에서는 북한과의 대진을 피하려고 다른 나라와의 경기에서 일부러 진일도 있었다. 남쪽의 박정희 유신체제와 북쪽의 김일성 유일체제 사이에 적대적 경쟁과 긴장이 최고조에 이르렀던 그 시절 남북의 축구시합은 한마디로 ‘총성 없는 전쟁’이었다. 스포츠에는 국경이 없다고 하지만 분명 스포츠에는 이념의 장벽이 있었다. 열려있는 그라운드에서 남북한의 선수들은 서로에 대한 마음을 닫고 이기기 위한 투쟁을 해야 했다.


스포츠로 화합의 장을 만들다

국제무대에서 체제 대결의 긴장감 속에 치렀던 축구 남북 대결은 사회주의권이 붕괴된 1990년 가을 처음으로 평양과 서울을 오가며 친선경기를 치르게 된다. 긴장감 속에서 체제의 우월성을 알리기 위해 이겨야 한다는 부담감을 던져버리고 선수들도 이 때 만큼은 재미있게 즐기는 경기를 했으며 관중들 역시 경기 결과 보다는 남북 선수들이 함께 그라운드를 누비는 모습에 감동했고 응원을 통해 하나가 되는 모습을 만들어 냈다.

남북 스포츠 교류의 하이라이트는 1991년 일본 지바에서 열린 제41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 참가한 남북단일팀 ‘코리아’다.

분단국가인 독일이 통일 되고 동구 사회주의가 붕괴된 직후 만들어진 남북탁구단일팀은 구성단계에서부터 국내외적으로 많은 관심을 받았다. 역사적인 남북단일팀의 합의서는 다음 세가지 사항으로 구성 되었다.

“첫째 선수단의 호칭은 우리말로 ‘코리아’로, 영어로는 ‘KOREA’로 한다. 둘째, 선수단기는 흰색 바탕에 하늘색 우리나라 지도를 그려놓고 제주도를 제외한 섬은 생략한다. 셋째, 선수단가는 1920년대에 우리나라에서 부르던 ‘아리랑’으로 한다.”

출전 선수들 중 가장 주목을 받은 선수는 남북한의 여자 에이스인 현정화(남한), 리분희(북한)였다. 이들은 환상적인 호흡으로 만나는 팀들을 모두 격파하고 결승전에서 세계 최강 중국을 물리치며 정상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여자복식 경기에서 남북단일 코리아팀의 우승이 확정되는 순간 3백여명의 응원단이 한꺼번에 관중석 스탠드를 내려와 선수단과 얼싸않고 눈물을 흘렸다. 시상식에서는 남북이 합의한 대로 남한과 북한의 ‘애국가’ 대신 ‘아리랑’이 울려 퍼졌다. 이 자리에 모인 남북한 해외동포 모두가 아리랑을 따라 불렀고 아리랑의 선율에 하나가 되었다. 이데올로기도, 과거에 전쟁을 치루었다는 것도, 치열한 체제 경쟁을 벌이고 있다는 것도 이날 이 순간만큼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한반도가 땀을 흘렸다. 한반도가 갈증을 풀었다.”

1991년 4월 29일 오후 6시 43분 일본 지바의 닛폰컨벤션 센터,
손에 땀을 쥐게 하는 4시간여 동안의 경기가 끝나고
코리아 단일팀 우승이 확정된 순간,
흰색 바탕에 청색 한반도 지도를 가슴에 품었던
리분희·현정화 선수의 온몸은,
7천만 겨레의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습니다.
분단 46년 만에 첫 남북한 단일 탁구팀 -
그 오랜 숙원 만큼이나 풀리지 않았던 겨레의 갈증을
이제 우리가 풀기 시작했습니다.
스포츠로 시작된 민족화합이 정치, 경제, 문화 교류로 이어지고
통일로 향한 염원이 보람의 땀방울로 맺힐 때
‘게토레이’가 다시 한 번 7천만 겨레의 갈증을 풀고 싶습니다.


남북단일팀 ‘코리아’가 1991년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한 이후 스포츠 음료 ‘게토레이’는 위와 같은 광고를 일간 신문에 내보냈다. 게토레이는 브랜드가 갖고 있는 ‘갈증 해소 음료’의 컨셉에 맞추어 남북한 탁구단일팀의 선전을 남북으로 갈린 겨레의 갈증의 풀리기 시작했다고 표현했다. 게토레이의 광고처럼 우리는 그 순간 갈증이 풀렸고 더 이상의 목마름은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이후 남북 관계는 롤러코스터와 같이 부침을 반복했다. 스포츠 역시 크고 작은 남북 교류 이벤트가 있기도 했고 오랜 소강상태를 보인 적도 있었다.

우리는 아직 풀리지 않은 통일에 대한 갈증을 갖고 있다. 20여년전 일본 지바에서 남북이 한팀을 이루어 세계를 제패하며 잠시나마 겨레의 갈증을 풀어주었던 것처럼 스포츠를 통해 화합을 이루고 세계로 나가는 그러한 노력이 필요하다. 비록 남북관계가 경색 되어 있다 할지라도 시도조차 안한다면 우리가 바라는 그 시간은 더 지체될 수밖에 없다.


전병길 예스이노베이션 경영컨설팅 대표. 저서로 '코즈 마케팅' '새로운 자본주의에 도전하라' '통일한국 브랜딩' 등이 있다. 

 

전병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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