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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단상

4.19혁명 60주년을 맞는다. 매년 이 날에는 수유리 4.19묘지를 찾아 그곳에 누워 있는 앞서 간 열사들을 그 묘석에서 그 이름이라도 확인해 왔다. 그러나 올해는 그렇게 하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러기에 ‘4.19’를 맞는 소회를 간단하게 몇 자 떠올림으로 수유리 국립묘지 방문을 대신한다.

1960년 4월 19일 새벽, 나는 청량리역에서 춘천행 열차를 탔다. 그 날이 휴가를 마치고 귀대하는 날이었다. 당시 군에 입대한 지 2년차 되는 병사로서, 나는 소속부대인 6사단 공병대대원과 함께 군부대 안에 설치된 투표소에서 ‘3.15’ 대통령 선거에 임했다. 대통령 선거 후 휴가를 얻어 4월 19일에 귀대하게 되었다. 고향에서 휴가의 대부분을 보내고 귀대하기 며칠 전에 서울에 올라와 친구들을 만났다. 그 때문에 4월 18일 고대생들의 시위가 있음을 알았다. 서울 시민들은 종로-청계천 4가에서 고대생들이 폭력배들로부터 습격당하는 광경을 라디오로 생생하게 들을 수 있었다. ‘이정재‧유지광’이라는 이름은 그로부터 한동안 재판과정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귀대한 후 며칠 동안 군에 있으면서 라디오를 통해 시위의 진행과정을 들을 수 있었다. 군 생활을 하면서 더구나 전방에서 라디오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은 지금 생각해도 무슨 특권같이 느껴진다. 4월 26일, 교수들이 종로5가를 중심으로, ‘학생들의 피에 보답하자’는 플래카드를 앞세워 시위에 나섰다는 것을 들으면서 혁명이 막바지에 이르렀구나 하고 느꼈다. 나는 그 해 9월에 학적보유자에게 주는 단축된 복무기간 1년6개월을 마치고 제대하여 학교로 왔으나 등록기일이 며칠 늦어 등록하지 못한 채 친구들과 어울리며 때로는 청강을 하면서 그 이듬해 복학을 준비했다.

‘4.19’가 일어났을 때 대학교 4학년이었던 내 동기들은 그 혁명에 참가했다. 학교에 복학했을 때는 동기들이 대부분 졸업한 상태였지만, 가끔 그들로부터 효자동을 거쳐 청와대 앞까지 진출하여 자칫 생명을 잃을 뻔했다는 ‘4.19’ 때의 무용담을 듣기도 했다. 내가 복학했을 때 대학가는 ‘혁명’의 여파를 몰아 ‘신생활운동’의 열풍을 일으켰다. 양담배와 양주를 퇴출시키고 캬바레 등 유흥장 출입을 제재하는 운동이 벌어졌고, 기름 한 방울 안나는 나라에서 민의의 대변인이라는 국회의원들이 무슨 자가용차를 타고 다니느냐 하는 여론도 일으켰다. 그런 운동에 참여하면서도 ‘4.19’ 때, 마치 피신이라도 하듯, 군에 있으면서 혁명 현장에 동참하지 않았다는 것이 심적인 부담이 되었다. 내가 수유리 4.19묘지를 찾는 데는 아마도 이런 심적 부담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거기에는 내 대학 동기 몇이 누워 있다.

‘4.19 혁명’이 우리 역사에서 어떤 역할을 했으며 어떤 역사적 위치를 점하고 있는가는 3.1운동과 함께 헌법 전문에 언급되어 있다는 것이 웅변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일제의 질곡에서 해방되어 ‘민주공화정’을 기반으로 한 정식 정부를 수립한 지 12년,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을 국권회복과 함께 시행한 지 12년, 그러나 ‘그 권력’이 선거에 의해 창출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합법적인 권력 창출을 근원적으로 틀어막는 부정선거를 자행함으로 민주공화정 자체가 위태롭게 되어 갔다. 이승만 정권은 1950년 대통령 직선제를 시작한 이래 세 번에 걸쳐 선거 때마다 부정선거를 자행했다.

그때 한국 교회가 그 부정 선거에 적극 동조한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이를 보다 못해 학생 청년들이 들고 일어난 것이 4.19혁명이었다. 독재자 이승만과 그를 뒷받침한 자유당 세력이 친일세력과 함께 물러나고 제2공화정이 이뤄지게 되었다. ‘4.19혁명’은 가까이는 3.1운동의 전통을, 멀게는 동학농민혁명의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며, 그 뒤 광주민주화운동, 1987년 ‘6월혁명’과 ‘촛불혁명’으로 계승된다고 할 것이다.

‘4.19혁명’ 60주년을 맞는 이때 우리나라는 4.15총선을 통해 새로운 변화를 기대하게 되었다. 4.15총선을 거치면서, 60년 전 4.19혁명과의 관계를 되돌아보게 되었다. 좀 엉뚱하지만, 1960년 4.19혁명 때 부정선거에 저항하여 혁명의 도화선을 만들었던 곳이 오늘날 어떤 위치에 있는가를 살펴보게 되었다. 그때의 부정부패에 대한 저항 정신을 오늘날 개혁적으로 계승하고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다.

‘4.19혁명’은 그 해 2월 28일 대구에서 일어난 대규모 학생시위로 거슬러 올라간다. 민주당 정부통령 후보 유세가 있던 일요일(26일), 당국의 지시로 대구의 학생들은 강제로 등교했다. 학생들의 반발이 일어났고 그 사흘 뒤(28일)에는 대규모 시위로 발전,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이를 계기로 서울을 비롯하여 부산, 수원, 대전, 충주, 청주, 전주 등 여러 도시에서 학생들의 시위가 이어졌다.

3월 15일, 관권에 의한 대대적인 부정선거가 획책되었다. 그 뒤에 밝혀진 것이지만, 30~40%의 투표지를 투표함에 미리 넣은 경우도 있었고, 3인조 5인조의 투표는 물론 정치깡패를 동원, 유권자와 참관인을 위협했다. 이런 부정선거에 항거하여 맨 처음 맹렬하게 봉기한 곳이 마산이었다. 시위대를 향해 최루탄 등을 쏘며 진압에 나섰으나 시위는 걷잡을 수 없이 격화되었고, 그 뒤 최루탄이 이마에 박힌 채 사망한 김주열의 시신이 마산 앞바다에서 떠오르자 이를 계기로 민중의 저항운동은 4.19혁명으로까지 확대 심화되었다.

4.19혁명을 맞아, 그때를 되돌아보면서, 우연찮게 엊그저께 치른 4.15총선 결과를 들여다보게 되었다. 60년 전 4.19혁명에 원동력을 제공한 대구와 마산은 이번에 어떤 선택을 했는가. 대구 마산의 후예들은 ‘2.28 시위’와 ‘3.15 저항’운동이 4.19의 원동력을 제공했다는 것을 알기나 하며, 거기에 대한 긍지를 갖고 있는가. 중고등학교 6년간 마산에서 공부했고, 처가를 대구 근처에 둔 한 늙은이의 ‘4.19단상’이다.

이만열/ 상지학원 이사장, 전 역사편찬위원장

이만열  mahnyo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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