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평화정착인가?

한반도에 공고한 평화를 정착시켜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한국전쟁과 같은 참화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북한이 사실상 핵무기까지 보유하고 있는 상황에서 자칫 핵전쟁으로 비화될 수 있는 전면전의 가능성이 오히려 낮아졌다는 평가도 할 수 있지만, 역설적으로 전면전은 아니더라도 국지적인 분쟁이 발생할 가능성은 높아진 측면도 있다. 일차적으로는 북한이 핵무기를 믿고 공세적인 도발을 감행할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볼 수 있지만, 이에 대한 한미의 대응도 군사적 긴장을 높일 수 있고, 결과적으로 사소한 충돌이 전례 없이 격렬한 국지적 분쟁으로 발전하면서, 한반도에 전쟁의 악몽이 되살아날 수 있다.

둘째, 북한 핵문제 해결을 위해서 한반도와 동북아에서 평화가 정착되어야 한다.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북한은 대내 정치적으로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핵무기 보유를 활용하고 있고, 대외적으로 중국과 같은 대국에 맞서 자주성을 고수하면서 국가 위상을 제고하기 위한 수단으로 핵무기 보유를 추구하기도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한국과 미국의 압도적인 재래식 전력에 맞선 비대칭전력으로서 핵무기 개발을 추진하고 있다. 이는 북한이 핵무기를 포기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즉 북한이 핵무기를 보유할 명분이나 이유를 없애기 위해, 한반도와 동북아에서 군사적 긴장이 해소되고 평화가 정착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셋째, 북한의 개혁개방을 촉진하기 위해 평화정착이 필요하다. 우선 북한 내부 정치적으로 개혁파가 정책을 주도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려면 평화정착이 필요하다. 현재와 같이 군사적 긴장이 높은 상황에서는 정권과 체제보위를 명분으로 선군과 자주, 존엄을 내세우는 보수적, 국수주의적인 세력이 득세할 수밖에 없다. 소위 강경파들이 언제든지 들고 일어날 수 있는 명분과 환경이 지속되는 것이다. 이런 환경에서 개혁개방을 지향하는 온건파들이 세력을 얻기는 매우 어렵다. 나아가 북한의 개혁개방을 촉진할 수 있는 대북교류와 협력이 확대되기 위해서도 평화정착은 긴요하다. 군사적 긴장이 높고 전쟁의 위험성이 상존하는 국가나 지역에서는 적극적인 투자와 협력 확대가 이루어지기를 기대할 수 없다.

넷째, 통일과 이를 위한 교류협력의 안정적 발전을 위해서도 평화정착은 더 이상 미루어질 수 없는 시급한 과제이다. 북한의 정권이나 체제가 완전히 붕괴되어 북한이라는 ‘국가’가 완전히 사라질 가능성이 거의 없는 데다, 실제 북한의 정권이나 체제가 붕괴된다고 해도 중국 등 주변국들이 남한의 북한 흡수에 얼마나 협조할지, 특히 북한 주민들이 남한과의 제도적 통합을 희망할지, 매우 불확실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남한에 의한 흡수통일을 기대하기 어렵다면, 통일은 기본적으로 점진적인 교류와 협력을 통해 실질적인 통합을 높여나가는 ‘과정’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남북이 실질적인 통합을 높여나갈 수 있는 전제 조건은 평화정착일 수밖에 없다. 평화가 정착되어야 통합의 관건인 교류협력이 안정적이고 지속적으로 확대발전해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통일 이전 동서독 관계에서도 확인된다. 서독의 신동방정책은 소련과 미국을 중심으로 한 동유럽과 서유럽 간의 긴장완화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즉 미국을 중심으로 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소련을 중심으로 한 바르샤바조약기구(WTO) 간에 세력균형이 이루어지고, 이를 바탕으로 헬싱키프로세스가 전개되었다. 또한 미소 간에 핵무기를 필두로 군비통제가 이루어졌기에 동독과 서독은 안보문제의 영향에서 벗어나 교류와 협력을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이다.

▲ 2000년 6월 13일 오전 10시 30분경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한 김대중 대통령이 김정일 위원장과 뜨거운 악수를 나누고 있다. 남북 정상이 만난 건 분단 이후 이날이 처음이었다. ⓒ국가기록원

다섯째, 동북아 평화정착을 통해 미래를 열어가려면, 한반도에 평화가 정착되어야 한다. 한반도의 불안정과 긴장고조는 미중의 대립 속에서 동북아의 긴장과 불안정으로 급속히 이어진다. 동북아 지역차원의 평화협력이 필요한 것 이상으로 한반도의 평화정착이 지역의 안정을 위해서도 긴요하다. 아울러 남한이 섬과 같은 위치에서 벗어나 반도국가로서의 지정학적 특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해양뿐 아니라 대륙으로 진출할 때, 선진국으로 도약할 수 있는 출구를 확보할 수 있다. 특히 남한 경제가 잠재성장률과 실질성장률이 하락하는 가운데 ‘조로’(早老)현상을 보이고 있는 점을 고려한다면, 동북아지역차원의 협력을 통해 성장 동력을 확보하게 할 평화정착은 더 없이 중요하다.

박정희에서 노무현까지

한국전쟁 이후 평화를 지키기 위한 노력은 튼튼한 안보나 자주국방이라는 이름으로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이는 역대 모든 정부에서 대북정책 추진을 위한 기본 전제였다. 따라서 역대 특정 정부가 안보를 소홀히 했는지 안 했는지에 대한 논란은 소모적인 정쟁에 불과하다.

평화 지키기를 넘어, 남북이 함께 평화를 만들기 위한 움직임도 비록 단속적이긴 하지만 지속되었다. 한반도에서 평화를 만들기 위한 움직임은 초기 남과 북 사이에서 군사적 긴장완화나 평화정착을 위한 구상들에 대한 합의로 나타났으나, 2000년대 들어 동북아 차원의 안보협력과 동시에 추진되어야 할 과제로 제기되었다. 그 과정에서 재래식 군비통제와 한반도 비핵화, 미국과의 일본의 대북관계 정상화 등이 핵심적인 과제들로 대두되었다.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부터 긴장완화와 우발적인 충돌방지를 위한 노력에 대한 합의가 포함되었다. 1992년 2월 19일 발효된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남북기본합의서)는 남과 북이 군사적 충돌방지를 넘어 평화체제 구축을 위해 노력하기로 한 합의를 담고 있다. 특히 남북기본합의서의 남북화해의 이행과 준수를 위한 부속합의서(1992.9.17. 발효) 18조는 한반도에서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한반도 비핵화가 이루어져야 한다는데 남북이 인식을 같이 했음을 보여준다.

남북뿐 아니라 미북, 북일 그리고 남북미중도 한반도 평화정착을 위한 움직임을 보여주었다. 먼저 1994년 10월에 만들어진 미북 기본합의도 미북 간 관계정상화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실질적인 평화정착의 핵심적인 과제를 담고 있다. 평화정착은 평화협정이라는 하나의 문서로 달성될 수 없고, 전쟁능력에 대한 통제와 함께 전쟁의지 자체의 약화 또는 해소를 위해 군비통제와 더불어 관련국들의 관계정상화를 필요로 한다. 합의된 결과물은 없었지만 1990년대 말 열린 남북미중 4자회담도 한반도에서의 긴장완화와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2002년과 2004년 이루어진 두 차례의 북일정상회담도 일본인 피랍자 문제와 함께 북일관계 정상화에 대한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가장 중요한 이정표는 2005년의 ‘9.19공동성명’에서 만들어졌다. 미북, 북일 관계정상화나 한반도평화체제 구축과 동북아안보협력이 ‘공약 대 공약, 행동 대 행동’ 원칙에 따라 한반도 비핵화(북한의 핵 포기 및 남북 동시 사찰)와 동시병행적으로 추진되어야 할 과제로 명시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2007년 2.13합의를 통해 미북, 일북 관계정상화와 동북아 평화안보체제 문제를 협의할 실무그룹이 만들어지고, 관련 회의가 열리기도 하였다. 이러한 논의들을 바탕으로 2007년 10월 2차 남북정상회담에서 남북정상은 한반도 비핵화와 함께 평화체제 구축을 위해 상호 협력하겠다는 의지를 다시 한 번 확인하고, 당면한 과제로서 3~4자 정상회담을 통한 종전선언을 협력과제로 제기하기도 하였다.

무엇을 할 것인가?

단순히 평화를 지키는 차원을 넘어 평화를 능동적으로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지역적으로는 한반도와 동북아, 핵심현안으로는 미북, 북일 관계정상화와 재래식 군비통제, 비핵화 및 핵통제가 이루어져야 한다. 먼저 한반도 차원에서는 남북주도의 군사관리체계를 만들고 실질적인 군비통제를 모색해야 한다. 한반도에서 재래식 전력에 의한 군사적 충돌가능성이 여전히 낮아지지 않고 특히 이명박 정부 이후에는 북한의 연평도 포격사태 등에서 보듯 오히려 높아지는 경향마저 보이고 있다. 따라서 남북 간에 우선적으로 군사적 신뢰가 구축되어야 하고 우발적인 충돌을 방지할 수 있는 장치들이 만들어져야 한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군사적 긴장을 실질적으로 해소해 나갈 수 있는 군사력의 방어적 후방배치가 모색되어야 하고, 궁극적으로는 군비를 적정 수준으로 감축하기 위한 노력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정전협정에 근거해서 유엔군사령부와 북한군이 정전을 관리하는 현재의 한반도 군사관리 방식을 남북이 주도적으로 관리하는 방식으로 바꾸어야 한다. 정전협정 대신 평화협정이 체결되어야 하지만, 북한 핵문제 등으로 인해 평화협정체결이 당분간 어렵다면 한국전쟁을 법적으로 종결하고 군사관리방식을 전환할 잠정적이고 단계적인 성격의 종전협정이나 잠정협정 체결도 검토될 수 있다. 핵심 사항은 ‘종전’과 ‘남북(미) 군사관리기구 구성’이다.

동북아 차원에서는 세 가지가 이루어져야 한다. 우선 전통적인 안보문제를 협의할 관련국들 간의 양자 및 다자 간 대화를 활성화하고 이를 지속적인 협의체로 발전시켜야 한다. 중국의 부상과 반접근 전략이 미국의 아시아회귀(pivot to Asia) 전략과 부딪히고 이를 보통국가화와 군사력 강화의 기회로 활용하는 일본의 움직임까지 결합되어 동북아에서는 군비경쟁이 가속되고 특히 군사적 충돌가능성도 높아지고 있다. 따라서 미래에 발생할 수도 있는 충돌을 예방하고, 군비경쟁의 악순환에서 벗어나 협력적인 안보질서를 만들기 위해서는 양자 및 다자 간 안보대화가 더욱 긴요해진다.

한편 동북아에서 군사적 긴장을 고조시키는 직간접적인 계기나 명분을 제공하고 있는 북한의 핵개발을 막고 한반도에서의 비핵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동북아 차원에서 핵무기에 대한 통제체제가 만들어져야 한다. 핵무기보유국인 미중러와 핵무기를 보유하지 않은 한국과 일본이 동북아 차원의 비핵무기지대(Nuclear Weapon Free Zone) 구축을 적극적으로 검토하고 북한도 비핵국가로서 여기에 합류시킬 수 있는 구상을 발전시켜야 한다.

마지막으로 평화체제의 핵심적인 요소로서 미북, 북일 관계정상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북한이 핵무기 개발과 보유를 포기해야 할 뿐 아니라 양자차원에서 미사일문제나 인권문제, 피랍자문제 등이 해결되어야 한다.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은 단계적일 수밖에 없기에, 연락사무소나 이익대표부와 같은 낮은 수준의 관계구축에서부터 대사급수교까지 점진적으로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과제들을 해결해 나가기 위해서는 우선 다자 차원에서 6자회담을 재개되어야 한다. 6자회담은 한반도 비핵화와 함께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정착과 동북아의 평화와 안보협력을 동시에 논의해 나갈 수 있는 틀이다. 비핵화와 함께 미북, 북일 관계정상화 및 동북아평화안보체제 논의를 재개하고 특히 한반도평화체제를 논의할 별도의 포럼을 동시병행 방식으로 가동해야 한다.

남북간 관련 대화도 동시에 모색되어야 한다. 핵문제에 대한 협의와 남북 간 군사적 긴장완화 및 평화문제에 대한 협의 가운데 어느 것이 먼저인가에 대한 논란은 불필요하다. 어느 쪽이든 먼저 논의하되 구체적인 조치를 이행하는 과정에서 상호 선순환할 수 있는 구조로 적절히 연계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북한이 최근 제기하고 있는 군사적 긴장완화 문제도 활용의 여지가 없는지 보다 면밀하게 검토되어야 한다. 이산가족상봉과 같이 상대적으로 쉽다고 여겨지는 것부터 시작해서 군사안보 문제와 같이 어려운 것으로 협의나 협력을 진전시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지난날의 남북관계가 이를 보여준다. 그래서 쉬운 것과 어려운 것이 동시에, 다차원적으로 추진되어야 하는 것이다.

장용석/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선임연구원

장용석  cyskkj@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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