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연말이었다. 서울 마포동 서울유에스에이선교회(대표 에릭 폴리) 강당에서는 특별한 연극 발표회가 있었다. 성서에 나오듯 출산을 앞둔 마리아․요셉 커플이 베들레헴 시내를 헤매다가 결국 말구유에서 아기 예수를 출산하고 천사들의 경배를 받는다는 내용을 각색한 거였다. 이 연극이 남달랐던 점은 탈북민들이 연출하고, 탈북민들이 출연하고, 강당을 꽉 메운 방청객도 대부분 탈북민이었다는 점이다. 대사를 까먹어 버벅대거나 구수한 북한 사투리가 나올 때면 강당은 까르르 웃음바다가 됐고, 출산 장소를 찾느라 고생하며 헤매는 장면에서는 여기저기서 눈물을 훔치는 모습도 보였다.

서울유에스에이선교회에서 탈북민들이 성극을 선보인 건 이번이 처음이다. 선교회는 10년 가까이 탈북민들을 양육하는 사역을 해오고 있다. 간증이나 성경 등 기독교적인 방법을 통해서다. 하지만 변화는 더뎠다. 이것은 탈북민 사역을 하는 국내 대부분 기관이 공통적으로 겪고 있는 어려움이기도 하다. 주체사상 대신 기독교 복음만 심어주면 북한 선교는 간단할 거라고 봤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고민하던 선교회 실무자들이 고안해낸 게 바로 ‘문화’였다.

이번 연극 출연자 중엔 탈북 도중 태국에서 뇌출혈로 쓰러졌던 탈북민도 있다. 평소 같았으면 약을 먹고 쓰러져 누워 있어야 하지만 연극이 끝난 뒤에도 그는 흥분을 주체할 줄 몰랐다. 보고 참여하는 이로 하여금 극중 주인공과 동화되게 하는 것, 그래서 이념과 가치관의 벽을 뚫고 그 너머의 세계를 보고 누릴 수 있게 하는 것. 선교회의 이 같은 예상은 그대로 적중했던 것이다.

북한에서 문화․예술이란
사회주의 체제의 문화예술은 체제의 선전․교육을 위한 도구로서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적대 체제인 자본주의의 모순을 폭로하고, 인민대중을 결집시키고자 하는 것이 바로 사회주의 체제에서의 문화예술이고, 이는 북한에서도 마찬가지다. 김일성, 김정일이 연설이나 저작 등을 통해 문화예술의 역할을 끊임없이 강조했던 것도 그런 이유다. 특히 ‘영화광’이란 별칭을 얻었던 김정일은 탁월한 영화평론을 썼을 만큼 영화에 조예가 깊었다. 문화나 예술 자체에 대한 매력보다는 문화예술을 통한 체제강화 효과를 기대했기 때문이리라.

얼마 전 한 탈북자 단체의 소개로 ‘오늘을 추억하리’란 연극을 본 적이 있다. 2011년 7월 북한 국립연극단에 의해 첫 공연을 한 작품이다. 장마철 송전탑 건설을 완성하기까지 여성 위원장을 중심으로 일치·단결하는 모습을 감동적으로 그렸다. 여성 위원장의 딸마저 굶주려 죽어가는, 고난의 행군을 이어가는 북한의 속사정이 그대로 드러나지만 그럼에도 삭제 없이 공연하라는 김정일의 지시가 있었을 정도로 수작이었다는 평가다.

연극을 보고 나니 그렇게 배가 고픈데도 북한 주민들이 탈북하지 않고 체제 전복에 나서지 않는 이유를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견줄 만한 역사적 사례를 찾기 힘든 주체사상, 3대 세습을 가능하게 하는 무시무시한 힘, 그것은 우리가 오해하듯 강압적이고 반복적인 주체사상 세뇌교육 때문이라기보다는 문화예술 작품에서 나오고 있었다. 소설, 연극, 영화를 접하며 가랑비에 옷 젖듯 자신도 모르게 북한체제에 대한 자부심, 고난 극복에 대한 의지에 불타게 되는 것이다.

북한에서 연극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남한에서처럼 취미나 흥밋거리 정도가 아니라 그걸 통해 체제(집단)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어 연극의 주인공처럼 되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곧 만난(萬難)을 무릅쓰게 하는 힘이 되는 것이다. 무너질 듯 무너질 듯 보이는 북한 체제가 저렇게 견고하게 버티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럴진대 문화예술에 대한 이해 없이 북한을 이해한다는 것, 가당키나 할까. 남북 당국간 회담을 하고, 물자가 오간다고 북한을 변화시키고 통일을 이룰 수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까. 문화예술에 담긴 그들의 땀과 눈물, 정서를 모르고서 북한을 제대로 안다고, 그들을 안을 수 있다고 하는 건 우리만의 오해이거나 자만이지 않을까. 진정한 남북간 통일은 문화예술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남북간 교류가 꽁꽁 얼어붙고 경제 교류마저 위태로운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흔히 남북한을 비교할 때 같은 점보다는 차이점을 많이 이야기한다. 그도 그럴 것이 체제, 이념, 가치관, 경제 등등 남북한은 달라도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화 쪽을 보면 얘기는 달라진다. 남북한은 5000년 동안이나 한 뿌리, 한 나라였다. 분단은 고작 60년에 불과하다. 이런 길고 거대한 공통점에 비춰봤을 때 체제나 가치관의 차이, 경제의 격차가 비록 커 보이긴 하지만 극복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체제와 이념은 달라도 문화는 같다
분단 60년 동안 이미 마음으로는 통일을 이룬 적도 여러 번이다. 체육 분야에서는 1991년 제6회 세계청소년축구대회, 1991년 제41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 남북 단일팀을 구성한 적이 있다. 그 세계탁구선수권대회는 ‘코리아’란 영화로도 만들어져 하나 된 남북이 얼마나 큰 감동일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 바 있다. 2000 시드니올림픽 단일 입장, 2002 부산아시안게임 동시 입장, 2003 대구유니버시아드 동시입장을 통해서도 국내뿐 아니라 전세계에 남북의 하나 됨을 보여줬다. 이 같은 감동의 역사는 올해 9월 인천에서 다시 한 번 펼쳐질 가능성이 높다. 아시안게임에 예정대로 북한이 참여한다면 말이다.

그뿐만 아니다. 1999년, 2000년에 각각 개봉한 영화 ‘쉬리’ ‘공동경비구역 JSA’는 분단의 아픔과 통일(화해)의 감격을 모두 느끼게 했다. 2003년 5월 11일엔 전국노래자랑 평양편이 송해와 북한 아나운서 전성희의 사회로 대동강변에서 열리기도 했다. 2005년 8월엔 조용필 평양공연도 성사됐다. 2005년 가수 이효리는 북한 무용수 조명애와 삼성 애니콜 광고에 동반 출연했다. 남북한 작가들도 2005년엔 ‘통일문학’이란 잡지를 공동 발간했었다. 남북 정상이 손을 맞잡는 일이 비범한 통일이라면 이 같은 문화의 교류와 하나 됨은 평범한 통일이라고 정의할 수 있겠다. 비범한 통일은 특정한 사람에게 아주 가끔 있는 일이지만 평범한 통일은 많은 사람들에게 자주 있는 일이다. 그 영향력이란 비교하나마나일 것이다.

▲ 남북간 화해와 통일을 주제로 한 영화 '코리아'(2012)와 '공동경비구역 JSA'(2000)

남북 관계가 단절된 지금도 문화계에서는 통일준비를 착착 진행하고 있다. 기독교 관련 노래와 집회를 이끌고 있는 부흥한국(대표 고형원)의 ‘United Korea 4 the World’ 단체는 최근 ‘광야’ ‘두만강’ ‘보리라’ 등 일반인에게도 친숙한 단어들로 이뤄진 노래를 선보였. 민족의 암울한 현실을 고형원 대표가 직접 노래로 만든 것이다. 올 여름에는 고 대표가 곡을 쓰고 대중가수가 부르는, 새로운 통일 노래도 선보일 예정이다. 고 대표는 “민족적으로 혼란하고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종교를 초월해 사랑과 평화의 방향으로 나아갔으면 하는 바람을 노래에 담았다”고 말했다. 음악을 통해 북한과 소통하는 삶을 살고 싶다는 게 고 대표의 바람이다.

북한에 부는 한류 바람, 그렇다면 남한에는?
탈북자 출신 김철웅 피아니스트는 공연 때마다 북한의 가곡, 남한의 가요를 함께 소개한다. 남북한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노래라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1970년대부터 90년대 초반까지 남한에서 유행했던 노래들은 북한에서도 사적인 자리에서 많이 불릴 만큼 깊은 공감을 얻고 있다.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 김현식의 ‘내 사랑 내 곁에’ 등이다. ‘아리랑’도 마찬가지다. 이런 것들이 바로 남북을 하나 되게 하는 문화적 코드라는 것이다.

국내 100명의 탈북자를 심층 면접한 조사보고서인 『한류 통일의 바람』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비디오나 노래 이거 들을 때는 김정일을 찬양하는 노래만 듣다가, 사랑하는 노래 들으면 마음이 그렇죠. 움직이죠. 문화에서 많이 움직이죠.” 함경북도에 살다가 2004년 탈북한 30대 여성의 말이다. 매일 김정일 찬양 노래만 듣다가 남한의 사랑을 담은 가사와 애잔한 곡조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탈북민들이 북한에서 주로 접했던 노래는 나훈아, 설운도의 ‘갈무리’, ‘다함께 차차차’ 등 트로트를 비롯해 김범룡의 ‘바람 바람 바람’, 유리상자의 ‘사랑해도 될까요’, 안치환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등이었다. 많이 시청한 드라마는 ‘천국의 계단’, ‘올인’, ‘가을동화’, ‘대장금’, 최근에는 ‘신사의 품격’도 있었고, 영화로는 ‘약속’, ‘남자의 향기’, ‘구미호’ 등이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북한 전역에 퍼진 한류(韓流)가 남한에 대한 동경을 낳고, 이것이 탈북을 결정하는 데 있어 하나의 동기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책의 저자인 강동완·박정란 박사는 “남북한 통합을 위해서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간극을 좁히는 것이 중요하고, 그래서 문화를 통한 남북한 통합의 길을 찾고 있다”며 “한반도 통일시 남북한 주민간 통합을 위해서는 문화적 접근에 기반을 둔 상호이해 증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반면, 남한에서 북한 문화를 확산하기 위한 움직임도 있다. 탈북민 출신 오테레사(본명 박예영, New Korea Builders 대표) 대표는 통일은 서로 배우면서 적응해가는 과정인데 북한에 부는 한류바람에 비해 남한의 북한 이해도가 너무 낮다는 문제점을 지적했다. 그녀가 매월 ‘통일을 살자’ 기도회를 통해 ‘속도전 떡 시식회’, ‘북한 노래 퀴즈대회’를 열고 있는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다.

통일은 결혼에 곧잘 비유되곤 한다. 특히 남북한 통일은 재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랫동안 이혼과 마찬가지로 별거하던 두 남녀가 다시 합치려는 것이다. 그런데 과정이 간단치가 않다. 묵은 불신, 자존심이 상존해 있고 그러다 보니 결혼 자체보다는 결혼 방법, 결혼 비용, 결혼 이후의 주도권에 대한 상대방의 의도를 놓고 팽팽한 긴장감이 감돈다. 복잡하게 같이 사느니 차라리 그냥 별거하는 게 더 나아보이기까지 한다. 불가능해 보이는 두 사람을 무엇이 이을 수 있을까. 결국 마음 아닐까. 과거에 함께했던 추억, 서로가 알고, 서로가 공유하고 있는 미움과 사랑 등의 애틋한 감정이 결국 모든 장애물을 극복하고 서로를 잇게 하는 접착제 같은 게 아닐까. 그것을 문화라고 보는 것이다.

독일의 노벨상 수상작가인 귄터 그라스는 2002년 중앙대 한독문화연구소 초청 강연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문화는 분단의 과정에서 가장 저항력이 있는 것으로 증명되었다. 경제라든지 군사라든가 이데올로기라든가, 이런 것들은 모두 분단되었다. 자본주의 사회로, 공산주의 사회로, 모든 것이 나뉘었지만 문화만은 분단에 저항했다. 한반도에서도 문화는 남과 북에서 언제나 분단되지 않았다. 식민지 시대에도 미군과 소련군이 주둔한 후에도 전쟁을 겪은 후에도 남북의 문화는 분단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이 분단되지 않은 문화가 남북 대화의 초석이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김성원 기자  ukoreanew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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