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의 회복적 정의, 을의 행복추구권

지금 대형서점 한켠에서는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이 화제를 일으키며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다. 그의 주장은 사실 그간 학계에서 논의되던 담론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그가 다시 주목받는 것은 세계금융위기 이후의 장기적 경기침체와 관련이 있다. 며칠 전 국내에선 어느 고용계약이 해지된 경비원이 아파트에서 투신자살해 충격을 주었고, 영화관에서는 과거 이랜드 사태를 다룬 ‘카트’가 상영되며 관객들에게 호응을 얻고 있다. 이러한 풍경들은 무한경쟁을 통한 성장 지상주의와 신자유주의가 낳은 또 다른 ‘팍스 로마시대’의 재현이다. 경쟁에 익숙지 않았던 ‘을’들은 어느덧 거대한 자본의 위협 앞에 스스로의 존재가치를 굴복시키고 만다.


▲ 이랜드 내 비정규직 문제를 다룬 영화 '카트'의 한 장면

오늘날 한국사회가 암울하다고 말하는 이유 중 하나는 시장만능의 경쟁사회에서 패배하고 퇴보한 을들이 행복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이들은 측정화, 계량화되어 스스로의 가치를 숫자로 평가받고 있다. 다시 이들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자본이 노동을 지배하고 돈이 돈을 먹는 세상이 떠나가고 땀 흘린 만큼의 보상체계가 이뤄지고 노동의 가치가 창의적으로 물질 속으로 체현되는 정의롭고 공평한 세상이 조성되어야만 할 것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본다면 최근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일자리의 문제인 것 같다. 우울한 한국 현대사회의 지표를 말해주는 저출산, 이혼, 낙태, 자살, 우울증, 왕따 등 여러 사회병리현상들의 근저에는 경쟁에서 패배한 을들의 처절한 울부짖음에 공감치 못한 집단적 조급증과 무기력증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을들의 행복추구에 있어 가장 걸림돌이 되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 경제수단인 노동과 일자리 문제이고 이것이 한국사회에서는 ‘비정규직’의 문제로 나타나고 있다.

비정규직은 IMF 이후 기업들이 고용구조의 유연화를 내세우면서 더욱 고착화되어 왔다. 구조조정과정을 거치면서 나온 퇴직자들은 영세형 창업으로 이어져 우리나라의 산업구조를 생산성이 높은 산업에서 식당, 유통업 등 비생산적 산업으로의 재편으로 나타났고 이는 비정규직 일자리를 양산하는 결과로 나타나게 되었다. 어느덧 한국의 노동시장은 정규직이 아닌 비정규직 중심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비정규직의 처우는 정규직에 비해 너무나도 터무니없었다. 상위 10%와 하위 10%의 임금격차가 4.5배나 되는 임금체계 만큼이나 복지수준에도 현격한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물론 노동시장의 유연성 차원에서 비정규직은 반드시 필요하다. 정규직과 비정규직간의 생산성이 다르다는 점도 분명히 존재한다. 문제는 그간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원칙에 묶여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과도한 차별적 요소를 철폐하지 못한 데에 있을 것이다.

정부는 공공영역에서의 일자리 창출을 위해 많은 재정과 예산을 쏟아 부었다. 그러나 이는 경제지표 향상과 실업률을 낮춰주는 한시적 효과만 보았을 뿐 궁극적으로 비정규직의 문제를 해결해 주진 못했다. 또한 그렇다 하더라도 정규직들에게 상생을 위한 결단과 무한한 자기희생만을 요구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혜택을 주는 정책과는 달리 개인에게 의무를 부과하는 정책에는 엄격한 제한과 비용부담이 따르기 때문이다. 반대로 비정규직을 없애자는 것도 너무 낭만적인 이야기일 수 있다. 시장을 숙명처럼 받아들여야 하는 기업의 입장에서는 시장상황에 따라 변화하는 노동의 유연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비정규직 중엔 자발적 취업자도 상당수이고 여성, 고령자들의 비정규직 취업도 고용정책상 바람직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복잡 난해한 비정규직 문제 해결의 해법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을 철폐하는 것에 중점이 있다고 본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조사결과 한국은 비정규직의 22.4%만 정규직으로의 신분상승이 이뤄진다고 한다. 이러한 차별적 임금불평등과 비대칭성은 OECD 국가 중에서도 매우 심각한 수준이며 빈부격차로 악명이 높은 미국보다도 높은 수치라고 한다. 또 다른 OECD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은 정규직에 대한 고용보호가 너무 높아서 비정규직이 늘어날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지적한다.

역사가들은 같은 민족을 노예로 삼는 현상이 바로 일국멸망의 전조라 지적한다. 현재 우리사회 내에서 가장 심각한 사회문제 중 하나가 바로 비정규직 문제라는 점에서 추후 이것이 사회통합을 저해하는 가장 큰 위협요인이 될 수 있다. 영화 ‘카트’의 마지막 장면처럼 이젠 을의 행복추구를 위해 갑의 양보와 협조도 필요한 시점이다. “노동자여 단결하라!” 라고 외친 마르크스의 외침은 오늘날 한국사회 내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문제, 갑과 을의 논쟁을 넘어 또 다른 화두가 될 가능성이 커졌다. 인간의 존엄과 가치, 을의 행복추구를 여지없이 무너뜨리는 ‘수퍼갑’의 횡포, 탐욕적 자본 축적의 욕망이라는 바벨탑을 누가, 어떻게 무너뜨릴 수 있을 것인가.

이장한/ 통일미래사회연구소 연구원

이장한 janghan3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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