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교회에서 보았던 문구 중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라는 구절이 있었다. 당시 어린 마음에 직접적인 실명으로 거론된 본디오 빌라도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유일무이한 ‘죄인’으로 각인되었다. 물론 시간이 흘러 알게 된 사실은 본디오 빌라도는 예수를 죽이자는 유대 군중에게 "이 사람(예수)에게서 죄를 찾지 못했다"며 그 뜻을 담아 손을 씻는 등 나름 예수를 살리려고 노력했던 거 같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결정을 내린 건 총독 본디오 빌라도였다. 그의 진심이 어찌되었건, 그의 생각이 어찌되었건 그는 최종결정권자였고 책임자였으며 통치권자로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고 2000년이 넘도록 역사의 죄인으로 남게 되었다.

남북관계 개선의 “골든타임” 이대로 지나가나?
박근혜 정부에서 남북관계 개선의 ‘골든타임’이 지나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정권 차원의 의지와 노력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지난 6월 15일, 북한은 ‘정부 성명’을 통해 남북 대화를 제의해 왔었다. 우리 정부가 오랫동안 북한에 대화제의를 요구해온 만큼 남북대화를 이어나갈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나 우리 정부는 북한의 전제조건에 이의를 제기하며 북한의 대화제의를 일축했다. 경실련통일협회 등 시민단체들은 남북대화를 통해 북한의 요구사항들을 슬기롭게 풀어나가는 전략을 발휘하지 못한 점에 유감을 표명했다. 우리 정부는 겉으로 대화를 이야기 하면서 뒷받침되는 실천은 부재한 셈이다. 그리고 25일, 북한은 끝끝내 남북관계 단절을 선언했다(북한, 남북관계 단절 선언…무력충돌도 시사).

연초만 하더라도 남북관계는 살릴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다. 북한 역시 정상회담도 가능하다며 호의적이었다. 무엇보다 6.15 공동선언 15주년과 광복 70주년이라는 의미 있는 기회도 있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남북관계 개선의 기회는 물거품이 되었다. 민간차원에서 논의되던 6.15선언 15주년 기념 남북공동행사는 무산되었고, 지난 23일 북한인권사무소가 서울에 개소하자 북한은 광주U대회 불참에 이어 억류된 우리 국민들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8월은 을지프리덤가디언 한미 군사훈련까지 예정되어 있어, 이제 광복 70주년인 8월 15일까지 남북관계 개선의 접점을 마련하기란 사실상 어려운 상황이다. 이렇게 광복 70주년, 분단 70년의 시대적 소명이라는 평화와 통일은 또 다시 멀어지는 듯싶다.

▲ 박근혜 대통령이 25일 오전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국회법 개정안과 관련해 국회와 여야를 강도높게 비판하고 있다. ⓒ청와대

본디오 빌라도처럼 결국 대통령의 책임이 될 것
물론 박 대통령으로서는 억울할 수도 있다. 대통령에 당선되자마자 북한은 3차 핵실험을 강행하면서 남북관계는 출발부터 꼬였다. 뿐만 아니라 MB정부 이후 악화될 때로 악화된 남북관계의 신뢰는 이미 무너져 내려 있었다. 이로 인해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를 실질적으로 구현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성과가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통일은 대박이다.” 라며 통일준비위원회를 만들고 우리 사회 통일담론을 확대시켰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남북관계 개선의 기회를 놓치고, 남북관계를 대립과 갈등의 악화일로로 만든 건 박근혜 대통령 본인의 결정이다. 본디오 빌라도와 마찬가지로 박 대통령의 진심이 어찌되었건, 생각이 어찌되었건 최종결정권자이자 통치권자로서 박 대통령은 남북관계를 악화시켰고, 이에 대한 책임은 역사의 기록으로 남을 것이다. 또한 박 대통령은 겉치레에 불과한 ‘격’을 이유로 7년 만에 개최될 수 있었던 고위급접촉을 무산시켰고, 북한 아시안게임 실세 3인의 방남으로 열린 남북관계 개선의 길마저 대북전단 살포에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하면서 막아버렸다. 심지어 개성공단 잠정중단으로 2013년에는 남북교류협력이 완전 중단되기도 했었다. 공약으로 내세웠던 DMZ 세계평화공원, 이산가족 상봉 정례화, 유라시아 이니셔티브 등도 요원해 보인다. 이 모든 것이 남북의 갈등과 대립의 대못을 박은 박 대통령 본인의 결정한 산물들이다.

문제는 남북의 신뢰, 신뢰의 출발은 ‘대화’
이제 광복 70주년인 8.15까지 두 달도 채 남지 않았다. 남북관계의 마지막 ‘골든타임’을 살리기 위한 과감한 결단과 유연함이 필요하다. 지난 15일 북한이 대화의 전제조건으로 제시한 내용들을 꼼꼼히 따져보면 우리 정부가 대부분 수용할 수 있는 수준의 요구들이다. 우선 통일문제의 자주적 해결, 흡수통일 정책 포기, 상호 비방·중상 중지 등은 이미 남북의 기존합의에서 수차례 합의한 바 있다. 재확인 수준에서 합의하면 된다. 5.24조치에 대해서도 우리 정부는 남북 대화 재개시 협상할 수 있다는 전향적인 입장을 밝힌 바 있다. 당장 5.24조치 해제가 어렵다면 나진-하산 프로젝트처럼 5.24조치의 예외조치를 확대하는 것도 하나의 방편이다. 한미군사훈련의 경우 작년 2월 남북 고위급접촉 당시 키 리졸브 훈련 기간에 이산가족 상봉행사를 개최했던 것처럼 유연하게 적용하면 된다. 이외에도 금강산관광 재개가 어렵다면 개성관광부터 풀 수도 있고, 상호 비방 중단을 위해 대북전단 살포를 강력히 제재하거나, 8월 열리는 을지훈련의 규모를 축소하는 등 다각적인 해법을 모색할 수 있다. 문제는 남북 당국의 의지뿐이다.

우리가 세월호 참사와 메르스 사태에서 배운 한 가지 교훈은 위기 상황에서 결코 ‘골든타임’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광복 70주년인 올해 남북관계 개선의 골든타임마저 이대로 이렇게 보낼 수 없다. 박 대통령은 시대적 소명과 과제인 평화·통일의 골든타임마저 놓쳐 본디오 빌라도처럼 역사에 실패한 대통령으로 남을 것인가? 남북간 신뢰회복은 오로지 만남을 통한 “대화”로 가능하다. 공개·비공개도 상관없다. 정부 차원의 특사파견이나 민간 차원에서 대화의 접점을 마련하는 것도 상관없다. 70년간 이어진 이 기형적 분단 구조를 끝내고, 왜곡된 한반도 평화를 위해 남북관계를 어떻게든 “살려야 한다.”

홍명근/ 경실련통일협회 간사

홍명근  lolen86@ccej.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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