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국가를 위한 한국민주주의의 재편

한국사회가 안고 있는 수많은 현안 가운데 메르스 사태보다 더 심각한 것은 한국정치의 혼란상일 것이다. 한국정치는 무한히 계속되고 반복되는 대립과 갈등으로 국민을 짜증나게 만들고 있다. 최근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여야의 대치뿐만 아니라 여야 각 당 내부의 분열과 대립 양상도 이에 못지않게 심각하다.

민주화 이후 역대 모든 정권이 시차를 두고 통치능력이 급격히 떨어지는 이른바 레임덕 현상을 겪고 있는데 최근에 올수록 레임덕의 조기화가 발생하고 있다. 이런 민주주의의 혼란상은 대통령 개인의 자질과 소양 문제와 아울러 한국 민주주의의 구조적 문제점에서 발생한다.

보수 양당제의 한계
일반적으로 정치에서 다양한 요구와 가치가 허용되는 관용의 폭이 클 때에 이를 선진화된 정치 혹은 다원주의적 민주주의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헌법은 다원주의적 민주주의를 원칙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정치현실에서 국민과 유권자를 대의하는 정당의 폭은 좁으며 의회는 실질적으로 양당 독점체제에 의하여 운영되고 있다.

이러한 양당제는 약간의 예외를 제외하고 건국 이래의 정치전통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분단과 남북대치 상황 하에서 반공정당만이 존립할 수 있었던 이승만, 박정희 정권하에서 강요된 상황이었다. 이승만 정권하에서의 대안정당인 진보당은 정치탄압에 의해서, 4월혁명 이후의 혁신계는 5.16 군사정변으로 소멸되었다. 그러나 87년 민주화 이후에도 민주 대 반민주 구도와 호남대 영남이라는 지역주의 구도가 결합하면서 이 상황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또한 민중당 등 진보정당의 좌절과 헌재에 의한 통진당 해산결정은 50년대 이래의 이념적 지형 역시 크게 변화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이런 맥락에서 현재 한국정치를 지배하는 양대 정당은 모두 보수정당이며, 더욱이 이들 중 누구도 국가와 사회의 미래에 관한 철학과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세계에서 칭송받는 한국민주화가 가져온 가장 구체적인 성과는 주기적이고 공정하게 치러지는 선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의 선거와 대의민주주의는 외적으로는 성공적이나 실질적으로는 심각한 문제점을 안고 있다. 그것은 무엇보다 대선에서의 단순다수제와 총선에서의 소선거구제로 인하여 표의 등가성과 대의성이 심각하게 훼손되고 있는 점이다. 1987년의 대선에서 노태우 후보는 36.6%의 득표로, 즉 현격한 소수파의 지지로 당선된 바 있으며, 2008년 총선에서 한나라당은 영남에서 45.8%의 득표율로 67.6%의 의석수를 차지했고, 호남에서는 반대로 통합민주당이 65.2%의 득표율로 80.6%의 의석을 차지했다(박명림). 이런 현재의 선거제도는 특정 지역에 기반한 지역주의적 양당제를 만들고 사회적 가치에 기반한 다당제의 가능성을 위축시켜 다원주의적 가치를 억압하는 비민주성을 지니고 있다. 이로 인하여 오늘날 날로 심화되는 사회경제적 양극화, 사회적 약자에 대한 사회권 보호, 사회의 지속가능성이라는 본질적 문제가 정치와 행정의 중심에 자리잡지 못하고 정치와 행정이 국민의 실생활과 유리되며 시대 발전에 뒤쳐지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지역주의 정치구도의 폐해
또 다른 문제점은 지역주의적 정치구도이다. 지역주의 정당하에서의 정치권과 정치인은 여야 할 것 없이 이른바 지역정서와 이에 따른 정치적 유불리가 걸린 일에 대하여는 무엇 하나 주저하지 않는다. 수천억을 낭비하고 재정파탄을 야기한 인천 아시안게임이나 현재 평창에서 수조 원을 들여 환경파괴, 낭비올림픽을 준비하는 일 등이 버젓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 그 예라 할 수 있다. 이명박 정부하에서 24조 원을 들여 재정낭비와 생태재앙을 야기한 4대강 사업이 지역 토건주의에 영합한 지역주의 정치세력에 의하여 추진된 것 역시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민주화 이후 한국의 시민사회와 재야운동의 가장 절실한 정치적 목표는 지역주의의 벽을 뚫고 역사상 최초의 선거에 의한 정권교체를 이루는 것이었다. 이러한 대의명분하에서 진보정당의 독자화는 민주진영의 분열을 초래한다는 비판에 직면한 적도 있었다. 김대중 정권의 출현으로 정권교체에 관한 민주진영의 오랜 바람은 이루어졌다. 그러나 김대중 정권의 출현은 지역주의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진 것이지 지역주의가 종식된 상황에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97년의 대선은 진보진영의 승리라는 성격과 아울러 충청-호남 지역연합의 승리라는 측면이 있다. 김대중 정권과 이후 노무현 정권은 다 같이 지역주의 정치의 종식을 꿈꾸었으나 이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정치개혁에 관한 노무현의 좌절은 이후 보수정권의 재등장과 결국 그의 죽음으로 이어졌다.

지역주의의 극복은 지역주의를 비판하는 것으로만 이루어지지는 않으며 결국 스스로가 탈지역주의화 함으로써만 가능하다고 하겠다. 정당의 경우에 이는 곧 진정한 의미의 정책정당, 바람직한 가치를 설정하고 이를 구현하고자 하는 가치정당으로 자신을 바꾸는 것이다.

권위주의 정치문화의 극복
한국민주화는 정치권력을 탈권위주의화 하고 나아가 정치적으로 수동적 시민이 능동적 시민으로 전화하는 길을 열어놓았다. 그러나 이른바 ‘3김 정치’라는 말이 표현하듯이 민주화 이후의 주요정당은 카리스마적 개인의 권위에 의지하였으며 민주화 시대에 당내 민주주의의 발전은 지극히 제한적이었다. 더구나 ‘3김’이 정치무대에서 사라진 이후 한국정당은 지도력의 취약함에 시달리고 있다. 현재 여당의 원내대표를 둘러싼 분란이나 야당의 혁신 움직임은 다 같이 지도력이 부재한 권위주의적 정당 구조와 문화에서 연원한다. 이런 구태로 인해 청년들이나 개혁적 지식인들이 정당과 정치를 점점 멀리하게 되었다.

과거 고등학생을 비롯한 청년들의 정치참여에 대한 열정은 당시 한국 정치, 사회 현실의 부정, 부패, 부조리 등에 대한 이들의 정의감과 순수성의 발로로서 이는 정치, 사회발전의 주요한 동력을 이루었다. 그러나 다원화된 사회속의 치열한 경쟁구도하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오늘의 개별화된 청년들에게는 앞으로 10년, 20년 이후의 자신과 사회를 보는 시각이 과거와는 다르다. 기성세대의 비논리적 비합리적 싸움은 더 이상 흥미꺼리도 아니며 ‘나’와 ‘사회’ 사이의 연결고리를 더 이상 찾지 못하고 있다. 쉽게 표현해 정치와 정당 활동은 현재의 청년들에게 흥미와 감동을 전혀 불러일으키지 못하고 있다.

권위주위 정치문화의 극복을 위해서는 탈권위주의적인 새로운 정당을 만들어 보려는 담대한 시도가 필요하다. 바람직한 정당정치의 모범으로 흔히 일컬어지는 독일이나 스웨덴의 대표적 정당들의 역사는 19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이렇게 정당정치가 안정적인 국가에서도 80년대 이후의 사회변화를 반영한 녹색당, 여성당, 해적당 등의 신생정당이 출현하고 있으며 이들은 다 같이 기존정차의 틀 밖에 있었던 청년층에 의하여 주도되었다. 한국은 급격한 산업화 속에서 근본적인 사회변동을 경험하였으며 그 결과 과거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세대, 사회집단이 등장하였다. 민주화와 통일 혹은 성장이라는 70년대의 의제에만 머물러 있는 정당의 틀로서는 이들을 결코 담을 수 없었으며 그 결과 사회의 탈정치화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사회경제적 의제의 정치화
2012년 총·대선에서 야권은 민주화 이후의 변화된 사회적 상황과 지형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 채 주로 야권연대와 후보단일화 전술에 의지하여 총·대선 승리를 추구하였다. 2012년 총· 대선은 모처럼 보편적 복지, 경제민주화 등 사회적 의제가 지배한 선거였다. 그러나 다 알다시피 결과는 ‘태산명동서일필(泰山鳴動鼠一匹)’, 태산(泰山)이 떠나갈 듯 요동쳤으나 튀어나온 것은 오직 쥐 한 마리뿐이었다. 다른 한편 뚜렷한 정책적 우위를 점하지 못하고 후보단일화 전술에만 의지한 야권은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2016년 총선 역시 경제적 저성장, 사회적 불평등과 양극화의 심화, 고용, 복지를 둘러싼 경제, 사회적 의제가 가장 주된 쟁점을 이룰 것으로 전망되며 이런 면에서 야권은 2012년 선거를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더욱이 16년 선거는 한국경제가 이미 불황국면에 진입하였고 고용, 재정 등 정책환경이 더욱 어려워지는 상황에서 치러지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한국의 수출 위주 대기업은 통신기기, 자동차, 철강, 조선, 석유화학 등 주력상품이 다 같이 실적부진, 수익률 저하라는 불황의 덫에 걸려 있으며 이들 산하의 하청, 재하청, 3차 하청을 담당하는 중소기업의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이에 따라 신규취업, 취업자의 고용불안과 불완전 취업의 문제는 더욱 어려워지고 있으며 불안한 세계경제에서 예기치 못한 상황이 발생할 가능성은 매우 높다. 지금은 모든 정당이 경제, 사회적 비상사태를 상정한 정책적·정치적 대응책을 마련할 때이다. 사회경제적 의제의 정치화에 성공하는 정당만이 결국 승리의 전망을 갖게 될 것이다.

복지국가를 위한 가치정당
기존의 보수 양당은 위에서 열거한 이런 심각한 사회경제적 의제를 두고 고민하거나 경쟁하기 보다는 권력정치에만 몰두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고 정치인들은 계파나 실력자에 기대어 선출직 공직자로서의 특권과 권력을 유지하는 일이 다른 모든 것보다 더 중요한 듯하다. 결국 새누리당이나 새정치연합 모두 정책에서 국민과 괴리되었을 뿐 아니라 국민 위에 군림하는 집단으로 전락하고 있다. 이들의 끊임없는 갈등과 반목 속에서 국민은 정치와 정당을 외면할 수밖에 없으며, 특히 청년층의 탈정치화는 자연스러운 상황이 되고 있다.

한국정치는 이제 뚜렷한 국가적 미래상을 제시하는 정당을 필요로 한다. 경제적 저성장과 사회적 불평등이 심화하는 상황에서 유일한 출구는 선진적 복지국가로 나아가는 길이다. 한국의 정치는 형식적 민주주의에 머물지 말고 사회적 내용을 적극적으로 채워 선진적 복지국가를 미래의 지표로 삼아야 한다. 한국정치가 표류하는 근본원인은 시대에 적합한 목표를 제시하는 정치세력이 없다는 데서 비롯한다. 박정희 시대의 회고와 향수가 지속되는 것은 빈곤의 60년대에 성장과 근대화라는 나름대로 시대정신을 반영한 화두를 제시하였기 때문이다.

최근 10여년에 걸친 현실정치의 무기력과 무능력에 관한 국민들의 정치 불신은 민주주의에 대한 실망으로 이어지고 있다. 반복하건대 작금의 한국사회는 경제사회적 위기와 아울러 민주주의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이런 이중의 위기를 벗어나는 길은 국민에게 유력한 정치적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며 그것은 새로운 대안정당의 출현이다.

이를 통해서만 낡은 지역주의 양당 독점체제에 균열을 내고, 나아가 이 신생 대안정당이 이들 정당에 대한 유력한 경쟁자로서 정당정치의 발전을 이끌 수 있다. 이것이 성공한다면 다음 단계로 사회적 가치를 두고 경쟁하는 다당제적, 합의주의적 선진민주주의로의 도약이 가능하다고 하겠다.

현재의 여야 양당이 비례대표 정수의 확대 등 선거제도개혁이나 정치개혁의 가시적 성과를 보이지 못하는 상황에서, 이제는 제2의 민주화운동으로서의 민주주의와 복지국가를 지향하는 가치정당운동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이제는 가치를 중심으로 하는 정당이 출현해야 하고, 실제로 정책을 만들고 추진할 수 있는 전문적 능력을 갖춘 신진 정치인들이 정치권에 진출해야 한다.

새로운 가치정당이 보수 독점의 정치현실에서 성공하기 위하여서는 일면으로는, 현실 정책사안 특히 사회경제적 사안에 관하여 합리적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추어야 하며, 노동, 청년, 여성, 지역사회 등 사회 저변의 각 부문과 소통하여 이들의 지지를 조직해 낼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사회저변에 뿌리를 내린 유능한 정책정당의 출현을 소리없는 국민 다수는 바라고 있다. 3년 전 ‘안철수 현상’은 다름아닌 이런 바람의 표현이었다. 이제 국민의 삶을 중심에 둔 복지국가 건설과 이를 위한 가치정당의 출현은 한국민주주의의 재편을 위한 시대의 절박한 요청이다.

이종오/ 전 명지대 교수, 전 청와대 정책기획위원장

지난 7월 15일 '난파된 한국정치 어디로 갈 것인가' 토론회 발제문입니다.

*이 글은 복지국가소사이어티 홈페이지에도 게재됐습니다.

이종오 21welfare@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