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의 추억에서 탈출하기

성장에 대한 열망이라는 밈(meme)

빠른 속도로 성장하던 경제가 어느 단계에 이르면 결국 정체하여 일정 수준으로 수렴한다는 것, 애덤 스미스 이래로 수많은 경제학의 대가들이 다듬어 놓았던 이론이다. 식민지 지배와 전쟁을 거쳐 거의 잿더미 상태에서 출발한 한국 경제는 선진국에서는 백여 년 이상 걸렸던 이 과정을 한 세대 남짓한 기간에 압축적으로 통과했다. 말하자면 급격한 오르막길을 롤러코스터를 타고 단숨에 치달려 올라온 셈이다. 그 결과 한국인들에게 있어 성장을 좇는 것은 일종의 문화적 유전자, 즉 리처드 도킨스가 말하는 밈(meme)이 되었다. 연평균 10퍼센트 대의 고도성장을 겪었던 경험은 한국인들의 몸에 새겨졌다. 중간에 외환위기를 겪었음에도 1991년에서 2000년의 십 년 동안 연평균 성장률은 6.2퍼센트였다. 반면 2011년에서 2014년까지의 연평균 성장률은 3퍼센트에 채 못 미치는 수준이다. 그렇지만 이성적 사고도 몸에 새겨진 습속을 끝내 이겨내지는 못한다. 복지국가, 사회안전망, 그 어떤 담론도 성장이라는 주문(呪文) 앞에서는 힘없이 스러진다.

경제성장을 갈망하는 것은 한편으로 그것이 개인의 성장을 보장해준다는 생각,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러하였으리라 상정되는 기억 때문이다. 이로부터 능력주의에 대한 믿음이 생겨났다. 흔히 지적되는 한국인의 강력한 평등주의적 지향은 그 동전의 뒷면과도 같은 것이다. 빠른 속도로 나라 경제가 성장하면 자연스럽게 개인도 성장한다는 것, 아울러 개인의 성장은 자신의 능력과 노력의 결과라는 것, 그것이 대부분의 한국인들, 특히 고도성장기를 살아온 한국인들의 중요한 가치관 중의 하나로 자리 잡았다.

능력주의: 실체 혹은 이데올로기?
2015년 10월 OECD 보고서는 “재벌이라 알려진 기업집단의 대기업이 주도하는 수출은 내수와 고용에 대해 이전과 같은 낙수효과를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진단을 내린 바 있다. 강력한 개발주의적 국가가 주도한 재벌체제 중심의 경제성장이 개인의 성장으로까지 이어진 과정, 그 과정에 대한 설명으로 흔히 받아들여졌던 것이 바로 낙수효과이다. 양동이에 가득 찬 물이 아래로 넘쳐흐른다는 메타포로부터 유래하는 낙수효과는 일종의 사후합리화의 성격이 강하므로 현실에서 명확하게 그 실체를 검증해내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때로는 사물의 실체보다도 그 실체에 대한 믿음이 더 중요한 경우가 있다. 그렇다면 낙수효과는 근대 사회에서 능력주의가 차지하는 것과 비슷한 지위를 갖고 있다. 능력주의가 어느 정도 관철된다고 믿을 때, 혹은 그 오작동(malfunction)이 적어도 참을 만한 수준이라 여겨질 때, 사회는 안정을 유지한다. 모종의 능력주의가 작동했으리라는 믿음은 지금까지 그러하였던 것처럼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라는 믿음을 준다. 이와 같은 믿음이 무너질 때 사회는 흔들린다.

맥킨지 연구소는 2013년도 한국경제에 관한 보고서에서 이미 국민경제의 발전과 국민들의 삶 사이에 탈동조화 현상이 시작되었음을 지적한 바 있다.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에 최종수요에서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이 줄어들면서 내수 중심으로 가는 듯했던 한국경제는 여전히 재벌계 수출대기업 중심의 성장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므로 고용창출효과도 작을 수밖에 없다. 자영업자의 소득을 보정하여 계산한 노동소득분배율은 급격하게 하락하였다. 그러나 경제학자들이나 정책입안자들에 앞서 생활인들은 이미 직관적으로 그 사실을 깨닫는 법이다.

세습중산층의 붕괴
이윤율은 자본생산성과 자본소득분배율의 곱으로 정의된다. 자본생산성의 하락을 자본소득분배율의 증가, 즉 노동소득분배율의 감소로 상쇄할 수 있을 때 수익성은 유지된다. 바로 이것이 외환위기 이후 한국경제의 정형화된 사실이다. 급진적 정치경제학의 언어로 설명하자면, 자본축적의 내재적 한계를 노동자 계급에게 전가함으로써 자본의 수익성을 유지해온 것이다.

1997-8년의 외환위기를 기점으로 고용의 질은 급속하게 악화되었다. <월 스트리트 저널>이 “한국의 프라이드치킨 버블”이라 묘사했던 자영업의 처절한 상황은 좋은 일자리에서 밀려난 과잉인구의 압력 때문이다. 이미 1990년대 중반부터 자영업자의 1인당 소득은 임금노동자의 그것을 밑돌게 되었다. 세계화의 진전과 급속한 기술발전으로 일자리가 불안정해지고 소득격차가 확대되는 것은 글로벌한 현상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그것만으로도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사정이 나빠지고 있다.

토마 피케티가 말한 세습중산층의 붕괴가능성은 한국에서 훨씬 더 빠른 속도로 가시화하고 있다. 압축성장의 오르막길이 가팔랐던 만큼이나 불평등 심화의 내리막길은 가파를지도 모른다. 한국전쟁 이후 처음으로 부모 세대보다 더 많은 교육을 받고도 경제적으로는 더 나빠지는 세대가 등장하고 있다. 세습중산층의 현실과 이념이 무너질 때, 민주주의의 기초마저 위협받는다.

낙수효과나 능력주의가 실체 못지않게 이데올로기로서의 성격이 중요하였던 것처럼, 이 경우에도 양극화의 현실 못지않게 그에 대한 인식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것이다. 지난 두 차례의 대통령 선거에서 경제적 어젠다가 무엇이었는지를 생각해보면, 우리 삶의 현실에 대한 인식(혹은 메타포라 불러도 좋다!)이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엿볼 수 있다. 17대 대선에서 “7% 성장, 1인당 국민소득 4만 달러“라는 “747공약”은 예의 한국인의 문화적 유전자에 호소하는 것이었다. 18대 대선에서 두 명의 유력한 후보는 모두 경제민주화를 주장했다. 성장의 메타포만으로는 감출 수 없는 현실이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경제민주화의 실체는 모호한 것이었다. 때로 그것은 막연한 평등주의적 열망의 표현이기도 했고, 때로는 고도성장의 추억을 잊지 못하는 집단적 몸부림이기도 했다.

"Rat race"를 넘어서
지난 삼 년 동안, 정책당국은 때로는 창조경제를, 때로는 개혁을 주장했다. 정치적 수사를 제거하고 들여다본다면, 결국 경제민주화의 메타포가 성장의 메타포에 자리를 내준 것이다. 야당에서 주장하는 소득주도성장조차도 여전히 성장을 강조한다. 득표극대화를 추구하는 정치인이 성장에 대한 열망이라는 밈을 자극함으로써 손쉽게 표를 얻으려는 유혹을 뿌리치기는 어려울 것이다. “너는 성장을 약속하지 못한다는 거냐?”라는 식의 공격에 맞서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1인당 국민소득이 2만 8천 달러에 이르렀으되, 임금근로자의 절반 가까이가 연봉 2천 4백만 원(약 2만 2천 달러) 미만인 사회에서 거시경제의 성장 그 자체는 더 이상 실제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지금은 어떻게 성장할 것인가라는 물음보다도 무엇을 위한 성장인가라는 물음이 더 중요해지는 순간이다.

부족한 일자리와 소진되어 가는 성장잠재력 속에서 “무의미하고도 격심한 경쟁"(Rat race)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어느 경쟁이건 승자는 있는 법이며, 승자는 항상 성공을 자신의 능력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능력주의의 메타포는 적어도 승자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작동할 것이다. 그러나 대중의 인식과 동떨어진 메타포가 일부에게만 통용될 때 사회는 불안해진다. "개혁"으로 위장한 성장의 메타포는 다시금 경제민주화의 과제를 뒷전으로 밀어 버릴 것이고, 성장의 정체와 결합된 경제적 민주주의의 쇠퇴는 결국 정치적 민주주의의 후퇴로 이어질 것이다. 능력주의 원칙이 참을 수 없는 수준으로 위배될 때, 대중은 정치적 냉소주의에 빠지거나 정치적 선동의 제물이 될 가능성이 크다. 그러므로 빈곤에서 벗어난 과정을 "위대한 탈출"이라 표현한 앵거스 디턴을 비틀자면, 지금은 우리가 성장의 추억으로부터 위대한 탈출을 이뤄내야 할 때다.

---이 기고문의 견해는 필자의 개인 의견이지 동아시아 재단의 공식 입장을 반영하는 것이 아님을 밝힙니다.

필자 소개

류동민(柳東民)은 서울대학교 대학원 경제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충남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고베대학 경제학부 외국인 연구원(2003-2004), 교토대학 경제학부 일한문화교류기금 펠로우(2006), 마운트 홀리요크 대학 방문연구원(2007-2008) 등을 지냈다. 전공분야는 경제학설사 및 정치경제학이며, 주요 저서 및 논문으로는 『우울한 경제학의 귀환』(공저), "Mass Economy Theory and Park Chung Hee’s Capital Accumulation Regime: Contrasting Views on the Role of the State and Democracy" 등이 있다.

류동민 rieudm@c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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