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의 역사와 한국의 민주주의

현대 한국 기록의 역사, 어디까지 왔나
2007년 ‘대통령기록물관리법’이 제정된 지 10년을 맞았다. 입법의 취지는 ‘국정운영의 투명성과 책임성을 높이는 것’이었다. 기록을 통해 민주주의를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시키자는 뜻이다. 투명성과 책임성만 본다면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고 본다. 하지만 한국 정치에 심각한 갈등 변수가 하나 더 늘어나는 대가도 치르고 있다.

기록물관리법의 현실적 목적은 어떻게든 대통령 기록을 남기려는 것이었다. 1948-2003년 사이 56년간 대통령 기록물은 33만 건에 불과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재임 12년간 93,569건, 박정희 대통령은 재임 18년간 69,770건에 불과하다. 1999년 ‘공공기록물관리법’이 제정되기 전에는 국무회의 회의록도 제대로 작성되거나 보존되지 않았다. 정권 말이 되면 청와대에서 문서가 대량 파기되거나 퇴임시 개인 소유물로 가지고 갔다. 그래서 대통령기록물법은 대통령기록물의 유출이나 훼손을 엄격히 처벌하는 한편, 지정기록물은 15-30년간 보호하고 전직 대통령과 대리인만 열람토록 해 정치적 불안을 불식시켰다. 그밖의 지정 기록을 보려면, 국회 재적의원 3분의 2 이상 찬성, 또는 관할 고등법원장의 영장 발부, 대통령기록관 직원의 업무수행을 위한 대통령기록관장의 승인이 있을 경우로 엄격히 제한했다. 결과는 대단히 성공적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의 기록은 7,502,724건, 이명박 대통령은 10,879,864에 달했다.


▲ 대통령기록관 홈페이지 메인화면

기록, 축복인가 재앙인가
하지만 기록이 축복만 아니라 판도라의 상자라는 사실도 곧 드러났다. 2008년 이후 대통령 지정 기록을 둘러싼 논란이 세 차례나 발생하여, 대통령 지정기록물이 열람되고, 거센 정치적 태풍이 불었다.

첫 사건은 노무현 대통령의 대통령 기록물 유출 공방이다. 2008년 6월, 새 정부는 노무현 대통령이 퇴임시 청와대 컴퓨터 서버와 하드디스크에 자료를 담아 봉하마을에 가지고 갔다고 발표했다. 대통령기록법에 따르면, 대통령기록물은 국가의 소유이다. 만약 개인이 대통령기록물을 무단 은닉, 유출하거나 손상시키면 7년 이하 징역 또는 2000만 원 이하 벌금형에 처한다. 이에 따라 국가기록원은 관련자 10명을 대통령기록물 불법 유출 혐의로 고발하였다.

이에 대해 노무현 대통령 측은 퇴임 후 기록물을 열람할 수 없기 때문에 원본은 대통령기록관에 이관하고 사본을 가져왔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사본이라 해도 열람 상의 불편을 이유로 대통령기록관 밖으로 유출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결국 노무현 대통령은 사저에 가지고 간 하드디스크와 백업디스크를 반환했다. 노무현 대통령 측은 이를 정치보복으로 인식했다.

두 번째 사건은 쌀 직불금 관련 기록 문제이다. 쌀 직불금은 벼농사를 짓는 농민에게 2005년부터 지급한 보조금이다. 그런데 농사를 짓지 않은 공무원 4만 6천명이 불법으로 보조금을 수령했다. 제도의 허점을 이용한 것이다. 원래는 2008년 이봉화 보건복지부 차관의 부당 수령 의혹을 계기로 문제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감사원은 이미 2007년 노무현 대통령에게 이에 대한 감사 결과를 보고하고,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농수산부가 이를 상세히 조사했다. 그러나 뚜렷한 이유 없이 모든 자료가 폐기되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그 경위와 부당 수령 실태를 밝히기 위해 2008년 12월, 국회는 쌀 직불금 관련 청와대 회의록 및 노무현 대통령의 지정기록물을 열람하기로 의결했다. 노무현 대통령 측은 “대통령 기록문화의 싹을 자르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며 반대했다. 그 과정에서 3개월 간 여야간에 치열한 진실공방이 벌어졌다.

세 번째 사건은 2007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의 내용과 보관을 둘러싼 것이다. 이는 2012년 대통령 선거에도 큰 영향을 미쳤을 뿐 아니라, 이후 거의 1년여 간 한국정치를 마비시켰다. 2012년 10월, 새누리당 정문헌 의원은 노무현 대통령이 2007년 남북정상회담에서 서해북방한계선(NLL) 포기 발언을 했다고 주장하고, 그 내용이 담긴 대화록의 일부를 공개했다. 대통령 선거를 목전에 둔 상황에서 이 발언은 큰 정치적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그런데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은 대통령 지정기록물이기 때문에 이 문서의 열람은 대통령기록물법에 위배된다. 정 의원은 국가정보원의 사본을 열람한 것으로 밝혀졌다. 2013년 7월, 국회는 NLL 포기 발언의 진위를 밝히기 위해 대통령 지정기록물을 열람하기로 의결했다. 열람 결과 뜻밖에도 대통령기록관에 대화록이 없었다. 검찰 조사 결과, 사라진 대화록은 노무현 대통령이 봉하마을에 가져갔던 문서관리시스템에서 그 초본과 완성본이 발견되었다. 관련자의 진술에 따르면, 노무현 대통령이 초본를 삭제하고 완성본을 만들도록 지시했는데, 완성본이 실수로 이관되지 않았다고 한다.

민주적 가치 또는 보존, 무엇이 앞서야 하나
대통령기록물이 이렇게 정치적 태풍의 눈이 되면 어떤 결과가 발생할까? 우선 대통령의 국정운영이 더욱 투명해지고 책임성이 높아질 것이다. 예전처럼 은폐가 불가능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통령기록물법은 어떤 의미에서 국정운영의 투명성이나 국민의 알 권리 같은 민주적 가치보다 기록의 보존에 더 방점을 둔 법이다. 예전처럼 기록이 완전히 없어지는 것보다는 낫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록 유출이나 훼손을 엄중히 처벌하고, 보호 기간을 최고 30년까지 두고, 열람은 최소화시킨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회와 검찰이 각각 벌써 두 차례나 대통령기록물을 열람하는 일이 일어났다. 대립이 심한 한국 국회에서 재적의원 3분의 2의 찬성이란 극히 드문 일이다.

다른 나라도 보호 장치를 둔 것은 같다. 미국은 대통령기록물에 최대 12년의 보호 기간을 두며, 영국은 수상의 기록물을 30년, 프랑스 대통령은 50년간 공개 유예한다. 미국도 업무처리과정에서 필요한 정보가 대통령기록물밖에 없는 경우, 국회, 법원, 행정부는 공공 열람이 제한된 기록물을 열람할 수 있다. 그러나 현직 대통령이 행정부 특권(Executive Privilege)을 발동하여 공개를 막을 수 있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관행이다. 미국은 1981년부터 대통령기록물법(Presidential Records Act)이 시행된 이후 한 차례도 대통령기록물을 열람하지 않았다.

우리의 현재 상황은 입법자들도 예상치 못한 결과이다. 앞으로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에 대한 기록을 남기려면 고뇌가 따를 것이다. 잘못하면 혼난다는 사실이 너무 명백해졌기 때문이다. 2007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이 작성되고, 수정되고, 이관되는 과정을 보면 이미 정치적으로 민감한 기록에 대한 고뇌가 느껴진다. 그것은 아무리 제도가 완비되고 시간이 경과해도 계속될 것이다. 필자처럼 기록의 현장에 서 보면 그런 일이 더욱 생생히 느껴진다. 위험을 느끼면 사람은 누구나 방어적으로 되기 때문에, 개인을 비난할 수는 없다. 그래서 기록이 남기를 바란다면 민주적 가치만 주장해서는 안 된다. 필요하다면 접근, 열람 조건을 지금보다 더 강화해야 한다. 미국처럼 실천적 지혜를 발휘한다면 가장 이상적일 것이다. 미국의 정치가인들 왜 유혹이 없었겠는가? 하지만 민주주의는 이상만 아니라 인내와 절제 같은 미덕도 필요하다. 2013년 민주당 김영환 의원도 국회의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열람을 반대하며 “광기의 시대를 빨리 끝내야 한다. 절제의 미학이 필요하다.”고 주장한 바 있다.

우리 역사에서 배우는 기록의 미덕
한국 기록의 역사에서도 배울 점이 많다. 『조선왕조실록』은 한국인의 역사의식이 만들어낸 기록문화의 백미이다. 조선 태조에서 철종까지 25대, 472년(1392-1863)간 매일 국가에서 일어난 일을 기록했다. 정치를 중심으로 당대에 발생한 모든 내용을 담은 백과사전이다. 총 888책이며, 단일 역사서로는 세계 최대 규모이다.

실록을 만든 것은 사관(史官)이다. 조선인들은 기록을 전담하는 사관을 두어, 왕권을 견제하는 핵심 정치제도로 확립했다. 예문춘추관 봉교(奉敎, 정7품) 2인, 대교(待敎, 정8품) 2인, 검열(檢閱, 정9품) 4인, 총 8인이 전임 사관이다. 사관은 늘 왕 옆에 있었으며, 국가의 모든 중요 회의에 참석했다. 사관 중 좌사(左史)는 왕의 행동을, 우사(右史)는 말을 기록했다. 왕이 단독 면담할 때도 반드시 입시했다. 사관은 왕에게 환영 받지 못하는 존재였다. 태종이 왕이 쉬는 곳인 편전에서 사관을 쫒아내려고 하자, 사관 민인생은 “신이 만일 곧게 쓰지 않는다면 위에 하늘이 있다.”고 경고했다. 오늘날도 조선만큼 철저하게 기록하지는 못한다. 필자도 3년간 대통령실 기록을 담당하면서 대통령 주요 행사에 모두 참석했다. 하지만 대통령의 프라이버시 공간이나 단독 면담 장소까지는 참석하지 못했다. 다른 나라도 대동소이할 것이다. 조선의 사관제도는 인류 역사상 가장 철저한 기록제도로서 평가될 만하다.

이렇게 매일 작성된 기록이 ‘시정기(時政記)’이다. 왕이 죽으면 이를 사초(史草)로 삼아 실록을 편찬했다. 오늘날도 이 전통을 살리면 좋겠다. 사초를 없애거나, 누설하거나, 고친 자는 참수형 이하에 처했다. 왕은 사초나 실록을 열람할 수 없었다. 국정에 필요한 경우는 해당 부분만 등서해서 보았다. 하지만 왕들은 사초나 실록을 보고 싶어 했다. 이성계가 사초를 보려고 하자, 사관들은 그럴 경우 어떤 “사신(史臣)이 감히 사실대로 기록하는 붓을 잡겠는가? 또 역사를 사실대로 기록하지 않으면 어떤 임금과 신하가 두려워하고 자기를 반성하겠는가?”라고 반대했다.

때로는 사초 때문에 사관이 목숨을 잃기도 했다. 연산군 4년(1498) 무오사화(戊午士禍) 때는 사관이 많이 처형당했다. 『성종실록』에 실린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이 조카 단종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세조를 비난하는 글이라는 의혹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의 배후에는 훈구파와 사림파의 정쟁이 깔려 있다. 예나 지금이나 기록이 정쟁의 소재가 되면 비극이 일어난다. 그러나 사관들은 목숨을 걸고 직필을 고수했다. 올바른 기록이 하늘을 대신하는 일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조선 초기 관리 조박은 “임금이 두려워할 것은 하늘과 사필(史筆)”이라고 말한 바 있다. 오늘의 아키비스트들에게도 귀감이 될 기록정신이다.

조선이 500년간 장기 지속된 이유 중 하나도 이처럼 훌륭한 기록 제도와 기록 문화를 가졌기 때문이다. 조선의 역사는 기록이 민주주의만 아니라 국가의 건전성을 유지하려면 언제, 어디서나 필요한 것이라는 사실을 똑똑히 입증하고 있다. 하지만 일제 식민지기를 거치며, 한국의 기록 문화와 제도는 오히려 퇴보했다. 1999년 공공기록물관리법 제정, 그리고 2007년 대통령기록물관리법 제정은 공공기록 관리를 비약적으로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기다림과 절제, 기록을 살리는 길
필자는 3년간 국가 기록의 현장에 있었다. 그때의 경험이 틀리지 않다면, 한국 공공기록의 수준은 믿을 수 있다. 기록에 대한 저항이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극복가능한 수준이다. 이제 누구도 기록의 정당성과 필요성을 부정할 수는 없다. 아키비스트의 전문성도 매우 높고, 기록에의 열정도 뜨겁다. 하지만 국가기록원장이나 대통령기록관장이 아직 관료나 정무직이다. 전문 아키비스트가 맡는 것이 맞다. 정치적 독립성을 강화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공공기관 등에 배치된 기록관과 아키비스트 숫자도 부족하다. 기록의 영역을 시민사회와 소수자로 확대시키고, 기록을 문화콘텐츠의 보고로 거듭나게 하는 것도 필요하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필요한 일은 기록을 정쟁의 도구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원칙이다. ‘기다림’과 ‘절제’가 발휘되지 않는다면 이제 막 자라기 시작하는 기록 제도와 문화는 싹이 잘릴 것이다. 기록은 우리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정치와 문화에 중요하다. 시간이 경과하며 기록이 역사가 되고, 사람의 정체성이 되기 때문이다. 기록은 정치는 물론 사회 민주화에 불가결하며, 성찰적 삶의 초석이다.

필자 소개
김영수는 성균관대학교에서 정치학사를 받고, 서울대학교에서 정치학석사, 박사를 받았다. 현재 영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겸 신문방송사 주간으로 재직 중이며, 한국동양정치사상사학회 회장을 맡고 있다. 대통령실 연설기록비서관(2010-2013)을 역임했다. 연구분야는 한국,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정치사상사이며, 주요 논문은 「근세 도쿠가와 일본의 정치적 아이덴티티: ‘아코우 사건赤穗事件’에 나타난 무사-서민의 정치적 아이덴티티와 주체성을 중심으로」(2004), 「정치와 진리: 이이李珥의 공론정치론」 (2005), 「유배, 혁명, 그리고 ｢파리아pariah의 성리학｣: 우왕대(1375-1388) 정도전의 정치적 시련을 중심으로」 (2006)이 있다. 주요 저서 『건국의 정치: 여말선초 혁명과 문명전환』 (2006)은 2006년 한국정치학회 학술상, 2007년 제32회 월봉저작상을 수상했다.

김영수 kysn@y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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