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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치’를 새 희망으로

오늘이 107번째 국치일(國恥日)이다. 국치일을 상기하는 것이 괴롭다. 그럴 때면 역사를 공부한 것이 원망스럽기조차 하다. 이 날을 맞으면, 국치소식을 듣고 금산 객사에서 목을 맨 군수 홍범식(洪範植)을 떠올리기도 하고, 구례 시골에서 절명시를 남기고 간 매천(梅泉)도 생각난다. 그와는 달리 주권을 일본에 넘긴 대가로 작위에 은사금까지 챙긴 이완용(李完用) 같은 고관대작들도 눈에 어른거린다.

1910년 경술년 국치를 당한 것은 일본이 강화도조약을 맺고 한국에 상륙한 지 34년 되는 해다. 그 기간에 일본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각 방면에서 그들의 기반을 확충해 갔다. 일본 군대가 동학농민혁명을 빌미로 자국의 군대를 파견한 것이 1894년. 그로부터 16년만에 일제는 한국을 강점했다. 청일전쟁(1894년)에 승리한 일본은 러일전쟁(1904)을 빌미로 군대를 불법으로 상륙, 한국의 중립선언을 파기시키고 한일의정서를 통해 한국 안에 일본군의 전략요충지를 강제로 수용했다. 이때 독도도 일본 영토에 강제로 편입했다. 일본 정부가 추천한 메카타(目賀田種太郞) 등 3인의 고문이 한국 정부를 좌지우지하기 시작했다.

1904년 2월 8일, 일본이 인천 앞바다에서 러시아 함정 2척을 격파하면서 러일전쟁이 시작되었다. 미국과 영국이 일본을 도왔다. 여순항 전투와 ‘쓰시마 해전’에서 러시아의 패배(1905.5.27-28일)는 일본을 극동의 강자로 부상시켰다. 7월에는 미국 육군장관 태프트와 일본 수상 가쓰라(桂太郞) 사이에 태프트-가쓰라 밀약이 맺어졌고(29일), 8월에는 제2회 영일동맹이 조인(12일)되었다. 일본의 청탁을 받은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는 일본과 러시아의 강화를 주선했고, 포츠머스에서 러일강화조약이 이뤄졌다(9월 5일). 미국 영국 러시아의 동의를 얻은 일본은 이토(伊藤博文)를 한국에 파견, 을사늑약을 강제(1905년 11월 17일)하여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았다. 황제의 비준을 받지 않은 불법조약이었지만, 일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1906년부터 통감부가 설치되어 초대통감에 이토가 부임했다. 원래 통감부는 외교에 관한 사항만 전적으로 감리하기 위해 설치된 것이지만, 실제로는 한국 정부의 전반을 감독하면서 일제의 한국강점을 위한 정지작업을 수행했다. 1907년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고종(高宗)을 퇴위시키고 정미7조약으로 행정권을 박탈했으며, 한국군을 해산시켰다. 외교권에 국방권 행정권까지 상실되었다. 1909년 일제는 사법권을 장악했고 1910년 5월에는 경찰권마저 접수해 갔다. 1910년 8월 22일 총리대신 이완용과 통감 데라우찌(寺內正毅) 사이에 ‘한일병합조약’이 조인되었고, 그 일주일 후인 8월 29일에 공포되었다. 이로써 1392년에 개창된 조선(대한제국)은 519년만에 망하고 말았다.

나라가 망한 후 이 비극의 날을 희망의 날로 새롭게 해석하려는 노력이 나타났다. 1917년 신규식 박은식 신채호 조소앙 등 독립운동가 14명은 대동단결선언(大同團結宣言)을 발표했다. 이 선언의 일절은 이렇다. “융희(隆熙) 황제가 삼보(三寶: 토지, 인민, 정치)를 포기한 8월 29일은 즉 우리 동지가 삼보를 계승한 8월 29일이니, 그 동안에 한순간도 숨을 멈춘 적이 없음이라. 우리 동지는 완전한 상속자니 저 황제권 소멸의 때가 곧 민권 발생의 때요, 구한국 최후의 날은 곧 신한국 최초의 날이다.” 국치일인 8월 29일을 두고 ‘황제권 소멸의 날’이면서 ‘민권 발생의 날’이라고 새롭게 해석함으로 국민주권론의 기반을 구축했다. 이 선언은 8월 29일이 황제권이 소멸되었다는 점에서는 비극의 날이지만 민권신장이라는 측면에서는 새로운 희망의 날로 간주했던 것이다. 대동단결선언에서 나타난 이 같은 국민주권사상이 3.1운동을 통해 국민주권론에 입각한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을 탄생시켰다.

107번째 맞는 국치일 저녁에 광화문 중앙광장에는 이 날의 의미를 새롭게 승화시키는 모임이 있었다. 몇 몇 교회와 단체들로 조직된 <전쟁반대 평화기도회>였다. 지난 21일, 폭우 속에서도 전쟁반대기자회견을 한 데 이어 오늘 저녁에 다시 평화를 위한 기도회로 모였다. 밤 11시가 넘도록 평화기도회와 평화콘서트 그리고 평화순례가 있었다. 전쟁의 음습한 구름이 한반도를 뒤덮고 있는 이때, 이 나라의 한복판에서 우리는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호소했다. 11시가 넘어 50여명이 마무리를 하면서 강경민 목사는 “우리는 간디나 마르틴 루터킹이 없었지만 평화적인 촛불혁명으로 새로운 정권을 탄생시켰다.”고 하면서, 그 촛불혁명의 정신으로 이 땅에 제국주의적인 전쟁의도를 막고 평화를 가져오는 데에 힘을 모으자고 호소했다. 수치스런 ‘국치의 날’을 영광스런 ‘평화의 날’로 만들자는 몸부림이었다.

29일 밤 기독단체들이 광화문광장에서 개최한 '전쟁반대 평화기도회' 사진: 윤환철님 페이스북
29일 밤 기독단체들이 광화문광장에서 개최한 '전쟁반대 평화기도회' 사진: 윤환철님 페이스북

 

 

이만열/ 숙명여대 명예교수, 전 역사편찬위원장

이만열  mahnyo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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