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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중·일·러 조선 동포들 모여 풍물 한판 놀아볼래요”[인터뷰] 둥닝조선족소학교 풍물패 지도한 김한나 변호사

중국 조선족의 위기는 어제오늘 얘기는 아니다. 모국(중국 조선족에게 조국은 중국이고 모국은 한국 또는 북한이다)인 한국의 자본주의가 순수한 조선족 공동체를 망가뜨렸다는 자책도 그런 위기의 큰 원인 중 하나라는 데서 나오는 것이다. 더 멀리는 197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중국의 개혁·개방이 사람들을 대도시로 몰아낸 것에서도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이 영향으로 동북3성의 조선족들도 칭다오나 광저우 등 남쪽 공업도시로 일자리를 찾아 떠났다.

그 결과는 곧 조선족 사회의 위기로 나타났던 것이다. 가정이 깨지고, 자녀나 젊은층은 줄어들고, 이러다 중국 내 여느 소수민족들처럼 조선족 사회도 씨가 마를 것이라는 우려가 커져왔던 것이다. (사)뉴코리아(상임대표 윤은주)가 2012년부터 중국 동북3성에서도 가장 변방이라고 할 수 있는 헤이룽장성 둥닝(东宁)현 삼차구에 위치한 둥닝조선족학교를 주목하기 시작했던 것도 그래서다.

뉴코리아가 선택한 방법은 문화였다. 조선민족 고유의 한글과 풍물이 그것이다. 한글을 잘 하는 학생에게 장학금을 줬고, 징과 꾕과리, 장구를 공수해 가서 풍물을 가르쳤다. 한글 장학금은 한글에 대한 자부심을, 풍물은 놀이와 신바람을 조선족에게 제공했다.

둥닝조선족소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풍물 전수를 주도했던 이는 김한나 변호사(법무법인 금성, 사단법인 뉴코리아 감사). 대학생 때 풍물 동아리에서 상쇠(꽹과리 치는 사람으로 풍물의 지휘자)를 했던 경험을 살렸던 것이다. 풍물 전수는 2012년부터 시작해 거의 매년 이어졌다.

둥닝조선족소학교에서 김미성 교장선생과 풍물 제자들인 졸업생들 사진을 보며 얘기를 나누고 있는 김한나 변호사. ⓒ유코리아뉴스

지난 4일 둥닝조선족중학교 70주년 대회(2019. 8. 7일자 기사 ‘중국 흑룡강성 한 조선족학교의 70년 다짐’ 참조)에서 선보인 사물놀이는 그때 배웠던 학생들이 중학생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주축이 됐다.

70주년 대회가 끝난 뒤 김 변호사에게 2012년 그때를 물으니 할 얘기가 많다고 했다. 학교 시설은 벽촌마을 딱 그대로였다. 재래식의 화장실에다가 뭐 하나 변변한 게 없었다. 물론 지금은 국내 어느 초등학교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 멋진 시설을 자랑하고 있다. 그럼에도 아이들은 아침 8시부터 오후 3시까지 이어지는 강훈련을 거뜬히 소화해 냈다. 그뿐만 아니다. 아이들은 새벽이면 몰려와서 아직 잠자고 있는 김 변호사를 비롯한 풍물 선생님 주변을 괜히 서성이기도 했다. 그만큼 풍물이 좋았고, 선생님들이 좋았던 것이다.

풍물의 파급효과는 컸다. 아이들은 이듬해 소수민족 장기자랑대회에 출전해 상도 탔다. 거기서 끝난 게 아니다. 아이들이 공연을 하다 보니 마을 어른들도 참여하게 되면서 발표회는 곧 마을 잔치로 바뀌게 되었다는 것이다. 김 변호사는 “마지막 날 아이들이 그동안 배운 풍물을 발표하는 날이면 많은 조선족 어른들이 함께 마당에 모여 같이 춤도 추고 놀고 떡도 돌리면서 놀았다”며 “그러다보니 나중엔 운동회나 마을 행사 때도 풍물이 들어가게 되고 자연스럽게 동네 잔치로 이어졌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고 했다.

귀국하는 날이면 아이들이 울고불고 좇아와 떼어놓는 데 애를 먹기도 했다. 그런 아이들을 보며 풍물 선생님들도 눈물의 이별식을 해야 했다. 어쩌면 그렇게 다져진 정이 이어져 지금의 굳건한 끈으로 자리잡았는지도 모르겠다. 이제 제자들은 어느덧 자랐고 학교에서도 더 이상 한국의 풍물 선생님을 원하지 않는 눈치다. 그래도 김 변호사는 꿈을 꾼다.

“남북한, 일본 조선인, 중국 조선족, 그리고 러시아 고려인이 풍물로 크게 한 판 놀아보는 꿈을 꾸고 있어요.” 이러한 꿈은 그가 감사로 있는 뉴코리아에서 한반도 평화를 위한 디아스포라 지원을 위해 일본, 중국, 러시아 교포를 만나면서 자연스럽게 싹트게 됐다. 김 변호사는 “만약 다 함께 만나는 판은 못 만든다고 하더라도 이 학생들이 어느 날은 북한에 가고 어느 날은 남한에 가고, 어느 날은 일본에 가서 풍물로서 같이 호흡하고 함께 춤을 추면서 우리가 한민족임을 느낄 수 있는 그런 시간이 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다음은 김 변호사와의 인터뷰 전문.

-70주년 행사에서 제자들의 연주를 본 소감은?

2012년에 처음 왔을 때 당시 아이들은 초등학생들이었다. 이제는 70주년 행사에 연주자로 나올 만큼 자라고 참여하는 게 굉장히 감동적이었다. 더군다나 피날레처럼 마지막 부문에 공연을 했는데 자랑스러웠다. 뿌듯함을 느꼈다.

 

-동닝조선족소학교 김미성 교장선생님과는 각별한 사이인 것 같던데?

2012년부터 지금까지 교장선생님을 하고 계시니까. 그 전에는 백의화 교장선생님이셨는데 조선족 아이들에게 민족성을 가르치려고 고민을 많이 하셨다. 역사를 가르치기는 부담이 되니까 그런 점에서 악기를 가르친다는 게 조선족 지도자들한테는 너무나 좋은 아이디어였던 것 같다. 아무도 가르쳐줄 사람이 없기 때문에 너무 슬프다고 하는 얘기를 듣고 지원이 시작된 것이다. 그때 쇠(꾕과리)를 직접 배운 분이 김미성 선생님이다. 김 선생님은 그 다음해에 교장선생님으로 오셨다. 그래서 더 친했던 것 같다. 그리고 윤은주 뉴코리아 대표님과 저, 김 교장선생님 이렇게 세 명이 의자매를 맺게 됐다. 우리가 각각 중국, 한국에 살고 있지만 한 동포로써 한 마음으로 꿈을 키워나가자, 이런 마음에서다.

둥닝조선족소학교에서. 김한나 변호사(왼쪽 두번째), 윤은주 뉴코리아 대표(오른쪽 두번째), 둥닝조선족소학교 김미성 교장(오른쪽)은 2014년에 의자매를 맺었다. ⓒ유코리아뉴스

-2012년엔 어떤 계기로 풍물 전수에 참여하게 됐나?

그 전년도 그러니까 2011년에 평화한국의 동북아평화발걸음의 일환으로 옌벤 지역을 비전트립 갔었는데 그때 가이드가 조선족 목사님이셨다. 목사님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요즘 조선족들은 어떻게 지내는지 물었더니 마침 조선족 브라스밴드 얘기를 하셨다. ‘왜 풍물은 없냐?’고 물었더니 ‘사실 조선족 분들이 굉장히 배우고 싶은데 선생이 없다’고 했다. 한국에 돌아가면 풍물 가르칠 선생님을 보내주면 좋겠다고 하셨다. 한국에 와서 기도하면서 방법을 찾다가 뉴코리아 최은상 목사님이 ‘그러면 우리가 하자’ 해서 사업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초창기엔 어떤 분들이 풍물 교사로 참여했나?

그때는 사단법인 뉴코리아가 막 만들어지던 때였는데 같이 아이디어를 내고 같이 시도해보는 분위기였다. 당장은 풍물 전문가를 모시기는 어려워서 뉴코리아에 참여하려는 몇몇 청년들이 모여서 3일 정도 풍물을 배운 다음에 중국 삼차구를 가게 됐다.

 

-김 변호사는 원래 풍물을 했었나?

대학교 때 풍물패를 했었다. 이화여대 풍물패에서 상쇠를 했다. 그렇다 보니 다른 악기도 다 다룰 줄 알았다.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풍물에 대한 흥, 리듬을 갖고 있지 않나. 그러니까 누구나 다 쉽게 배웠던 것이고 그 분들을 선생님으로 해서 멤버를 꾸려서 삼차구로 가게 됐다.

2013년 둥닝조선족소학교에서 조선족 어린이들에게 풍물을 가르치고 있는 선생님들. 맨 앞이 김한나 변호사다. 뉴코리아 제공

-언제 언제 간 것인가?

2012년, 13년, 14년 그리고 2016년이다.

 

-2017년부터는 왜 못갔나?

사드(THAAD) 문제 때문에 약간 눈치를 보는 상황이라 못갔다. 그 대신에 뉴코리아는 장학금을 지급했다. 그게 그냥 장학금이 아니라 조선어 장학금이었다.

 

-한국말 잘하면 주는 장학금이란 건가?

그렇다. 금액은 얼마 안 되어도 학생들에게 ‘내가 조선어를 잘하니까 상도 받는구나’ 하는 자부심을 갖게 해준 것이다.

 

-어떻게 조선어 장학금을 생각하게 됐나?

뉴코리아에서 최은상 목사님과 같이 논의를 하다가 ‘이런 장학금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제안을 해서 시작된 것이다. 그 전에 풍물을 매개로 우정이 싹텄고 신뢰가 있으니까 그런 이름의 장학금에 대해서 조선족학교에서 좋다고 받아들였던 것이다.

 

-전문 풍물패도 조선족중학교에 갔었다고 들었다.

그렇다. 특별히 2016년에는 전문 풍물패들이랑 같이 갔다. 뉴코리아가 삼차구의 조선족중학교와 MOU를 맺고 전북 고창에 있는 풍물 선생님들을 모시고 갔다. 시간이 흐르면서 조선족중학교에서도 자체적으로 연구하고 연습을 하다 보니까 수준이 꽤 높아졌다. 어느 정도 수준 있는 선생님을 원해서 그렇게 가게 된 것이다.

 

-변호사 일만으로도 바빴을 텐데 중국 다니는 게 부담스럽지는 않았나?

나의 궁극적인 사명이 남북통일과 디아스포라 한인들을 통한 민족의 아픔을 헤아리고 함께 평화 공동체를 만드는 일이다 보니까 별로 힘들거나 부담되지 않았다.

 

-언제부터 그런 꿈을 가지셨나?

2000년도부터 꿈꿨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과 관련해서는 내가 시간을 내고 돈을 들여서라도 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변호사로서 그 꿈과 관련해서 지금 하고 있는 일은?

변호사 단체인 사단법인 통일법정책연구회에서 연구 활동을 하고 있다. 탈북자나 조선적(일본 내의 조선인) 등 법률적 구조를 받아야 하는 사람들에게 변호사로서 조언도 하고 구조도 하는 일을 돕고 있다.

 

-그렇게 해서 실제 도와준 사례가 있나?

그렇다. 탈북 과정에서 조선족 국적(호구)을 허구로 취득한 탈북자가 있다. 그렇다 보니 한국 왔을 때 ‘너는 조선족이지 탈북자가 아니다’고 해서 지원금 반환 통보를 받았다. 조선족으로서 오래 한국에 있으면 추방당할 위험이 있기에 무효 처분과 형사고발에 대해 무죄 주장을 하는 공익 소송을 진행하고 있다.

 

-이번에 훈춘이랑 도문 등 러시아, 북한 접경 도시도 둘러보셨는데 소감은?

처음에 제가 이곳에 왔을 때는 경제적으로 너무나 어려웠다. 그래서 한스러움 같은 게 느껴졌었다. 한반도에서 이주해온 1세대는 살기 힘든 농민들이었을 거고 일제 시대 때는 독립운동을 위해 오셨을 텐데 ‘아직도 조선족들이 이렇게 힘들게 살고 있구나’ 라는 현실에 마음이 아팠었다. 그랬는데 이제는 달라지고 있는 것 같다.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왜 이런 사람들을 여기에 뒀을까?’ 생각했다. 신앙적으로 보자면 하나님께서 통일의 가교를 만들 수 있는 사람들로 이 사람들을 두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남북 관계가 개선되고 나면 조선족들이 더 많은 일들을 할 수 있겠다고 기대하게 됐다.

북한, 중국, 러시아 접경지역인 방천 전망대에서. ⓒ유코리아뉴스

-조선족학교에서 명예교사로 임명받은 걸로 아는데?

2012년부터 중국 갈 때마다 명예교사 자격으로 가고 있다. 삼차구의 조선족소학교는 중국 공산당이 인정한 기관인데 그 기관의 명예교사로서 우리를 초빙한 것 아닌가. 그런 것 자체에 자부심을 느꼈다.

 

-풍물을 가르치던 초창기 얘기 좀 들려 달라.

아이들이 방학인데도 어디 놀러가지 않고 전교생의 반 이상이 학교에 미리 와 기다리고 있었다. 그 아이들이 매일 아침 8시에 모여서 수업을 받았다. 오후 3시까지 특수훈련을 받은 거다. 처음 2012년 갔을 때는 학교 화장실도 재래식인데다가 약간 소외된 지역이다 보니 국가지원금도 거의 못받는 상황이었다. 풍물을 배우면서 아이들이 매우 즐거워했던 것뿐만 아니라 그 다음해에는 소수민족 장기자랑대회에 나가서 상도 받았다. 소수민족으로서의 자부심과 함께 학교도 알려지게 됐다. 거기서 끝난 게 아니다. 아이들을 매개로 공연을 하다 보니 마을 잔치가 됐다. 많은 조선족 어르신들이 같이 춤도 추고 놀고 떡도 돌리고 풍물 공연도 같이 즐겼다. 이렇게 마을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일 수 있는 장이 됐던 게 굉장히 좋았다. 그 다음해에 갔을 때는 풍물 수준이 좀더 높아져 있었다. 그렇다 보니 운동회나 마을 행사 등 뭘 해도 풍물을 매개로 할 수 있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런 것들이 자부심을 느끼게 했다.

 

-학교 운동회는 그 전부터 있었던 건가?

있기는 했는데 좀 보여주기식이었던 것 같다. 풍물의 매력은 그런 거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같이 참여하고 같이 노는 것 말이다. 나는 사물놀이를 가르친 게 아니라 풍물을 가르쳤다. 사물놀이는 무대 위에 앉아서 하는 놀이다. 그렇다 보니 다른 사람들이 끼어들기가 어렵다. 그렇지만 풍물은 다르다. 다른 사람들이 중간에 끼어들기도 하고 ‘잘한다’ 소리도 지르고, 끈이 풀리면 와서 묶어주기도 하고, 목마른 아이들 있으면 어른들이 물도 갖다주고, 힘들어 보이면 중간에 쉬었다 하기도 하고, 그래서 이런 대동의 장을 만들 수 있었던 것 같다. 그것이 풍물이 가진 장기다.

 

-그 밖에 에피소드가 있다면?

3년 쯤 지났을 때는 이런 일도 있었다. 뉴코리아에서 가는 곳은 중국만이 아니다. 일본 조선적도 찾아가고 러시아 고려인에게도 가는데, 러시아에서도 일본에서도 하나같이 풍물을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아, 우리가 나중엔 풍물을 매개로 크게 한 판을 벌일 수 있겠구나’ 하는 상상을 할 수 있었다. 만약 우리가 그런 판을 못 만든다고 하더라도 이 학생들이 어느 날은 북한에 가고 어느 날은 남한에 가고, 어느 날은 일본에 가서 풍물로서 함께 호흡하고 함께 춤을 추면서 우리가 한민족임을 느낄 수 있는 그런 시간이 오면 좋겠다는 상상을 했다.

 

-실제 구성해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사실 이번 광복절 기념으로 해보려고 했는데 사드 문제가 있었고 올해는 한일 무역 분쟁도 있고 해서 안 됐다. 어쨌든 문화를 매개로 하나되는 자리를 마련하는 일은 언젠가 꼭 해보고 싶다.

 

-중요할 것 같다.

그리고 아이들에 대한 투자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것들을 통해 우리는 느끼고 있지만 다음세대들이 자신들이 통일을 해야 할 필요성, 어머니의 국가(모국)가 어떤 것인지 느끼게 해주는 끈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끝>

김성원 기자  ukoreanew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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