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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와 보수는 양자택일 아닌 상호보완적”‘편집위원들이 간다’①박종화 평화통일연대 이사장(하)
  • 김성원·정지연 기자
  • 승인 2020.07.01 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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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위원들이 간다’ 박종화 목사 편 두 번째이자 마지막은 한국사회 내 오랜 갈등인 진보와 보수의 대결, 냉전의 청산 문제다. 어떤 사회학자나 정치학자도 쉽게 해법을 제시할 수 없는, 해법을 내놔도 제대로 실현될 수 없는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할까?

박 목사는 진보신학의 요람인 기장 출신으로 한신대 교수와 기장 총무, 기장의 상징인 경동교회 담임목사를 역임했다. 하지만 인터뷰에서는 ‘경건주의’라는 말을 많이 사용했다. 아버지는 진보적인 기장 목사였지만 어머니는 기도, 방언을 하는 분이었다. 그야말로 보수 경건주의의 전형이라고 할 만 했다. 박 목사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가 공존하고, 정당이 공존하는 독일에서 10년을 살았다. 하지만 그의 내면과 삶 속에 자리하는 진보와 보수의 공존, 신앙과 신학의 균형은 배워서가 아닌 어릴 적부터 체득되어진 것이라는 게 이번 인터뷰의 결론이다.

박 목사는 그런 자신의 경험에 대해 “내겐 어릴 적부터 간직해온 아주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신앙, 그리고 첨단 진보 신학 이 두 가지가 몸에 배어 있었고 지금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신앙적 보수와 신학적 진보, 이 두 가지는 양자택일이 아니라 상호보완적인 것이다. 그것이 나의 신앙적 배경”이라고 덧붙였다. 박 목사는 “진실한 경건과 신학적 자유는 통한다”며 “경건주의와 신학적 진보가 만났을 때 가장 아름다워 보인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1970년대 중반 독일교회 초청으로 독일 유학을 갔던 그는 독일교회를 다니면서 반유신운동을 벌였다. 하지만 윤이상, 송두율 같은 소위 말하는 ‘친북 그룹’과는 달리 ‘반북, 반공’을 표방했다. 자칫 친북운동으로 비쳐져 역풍을 맞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당시 상황에 대해 박 목사는 독일교회의 오해 등을 언급하며 “당시 나는 전략상 반공이었지 이념상 반공은 아니었다”며 “이게 굉장히 어려운 문제였다”고 토로했다.

한국사회의 반공주의를 극복 방법과 관련해서는 “거죽으로 싸인 이념적 틀 때문에 한국사회 내 분열이 너무 많다. 이걸 빨리 헐어야 한다”고 밝혔다. 용어 사용에서부터 대립적 이데올로기와 관련된 말은 자제하자는 것이다. 특히 한국교회와 관련해 박 목사는 “기독교가 외국으로부터 배우고 유입된 껍데기 이념에 대해 너무 치우쳐 있다”며 “이제는 이걸 벗겨버릴 수 있을 만큼 내적으로 많이 성숙했다”고 강조했다. 북한에 대해, 스스로에 대해 충분히 자신감을 가질 만큼 우리 사회가 발전했다는 걸 이제는 인지할 때가 됐다는 것이다.

이번 ‘편집위원이 간다’에는 김영식 유코리아뉴스 대표를 비롯해 편집위원인 이태형 기록문화연구소 소장, 윤은주 뉴코리아 대표, 박예영 통일코리아협동조합 이사장, 김성원 평화통일연대 사무총장이 함께했다. 

다음은 인터뷰 전문.

박종화 목사 사무실 서재엔 지금도 '에큐메니칼' 관련 서적들이 빼곡히 꽂혀 있다. ⓒ유코리아뉴스

유코리아뉴스 : 요즘 젊은 사람들 방식으로 자기소개를 부탁드린다.

내가 태어난 곳은 충남 보령군이다. 보령이란 동네가 원래 기독교감리회 세가 강한 곳인데 그 중에서도 내가 자란 곳은 순복음이나 예장합동보다 더 보수적인 곳이었다. 아버지가 우리 집안 최초 목사인데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 소속이셨다. 아버지는 원래 면 서기셨는데 같은 동네 여자랑 결혼했다. 어머니 신앙이 깊으셨던 것 같다. 어머니는 동네에서 가장 부잣집 딸이었고 아버지는 가장 가난했다. 두 사람이 교회에서 만난 것이다. 아버지 형제가 다섯 명인데 모두 목사가 됐다. 내 동생도 목사고, 아들도 목사다.

어머니한테서는 어릴 적부터 신앙의 열성, 기도 이런 걸 배웠고, 아버지는 상당히 진보적인 분이셨는데 자연스럽게 나도 한신대를 진학하게 됐다. 그런데 신학교에 가니까 내가 익숙했던 방언 같은 것보다는 김재준, 강원룡 같은 분들의 영향이 컸다. 내 경험과는 전혀 다른 곳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그게 너무 재밌었다. 그래서 열심히 공부했던 것 같다. 하지만 속은 늘 순수한 신앙을 간직했다. 그러니까 내겐 어릴 적부터 간직해온 아주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신앙, 그리고 첨단 진보 신학 이 두 가지가 몸에 배어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내가 교회연합운동을 해왔지만 이 두 가지가 나한테는 하나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신앙적 보수와 신학적 진보, 이 두 가지는 양자택일이 아니라 상호보완적인 것이다. 그것이 나의 신앙적 배경이라고 할 수 있다.

내고향 보령과 한신대에서 체득하고 배우고 익힌 것이기에 내게는 전혀 갈등이 되지 않았다. 나는 당시 이 두 개가 서로 통합하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두 개를 갈라놓으면 우습다고 생각한다.

-유코리아뉴스: 1970년대에 독일 유학을 가셨는데 거기서는 어땠나?

독일엔 세계선교를 위한 팀이 있었는데 주로 독일에서 세계선교사로 갔다가 귀국한 사람들을 팀을 이뤄 전국을 다니며 선교 보고를 하는 것이었다. 한국에는 독일 선교사가 없었기 때문에 한국에서 사람을 뽑아갔다. 그런데 최초로 내가 뽑힌 것이다. 독일에 갔는데 완전 ‘한신’ 분위기였다. 거기서 독일인 교회 목회를 하게 됐다. 목회 바탕은 경건주의, 신학은 진보적인 에큐메니칼 신학이었다. 내고향 보령과 한신대에서 체득하고 배우고 익힌 것이기에 내게는 전혀 갈등이 되지 않았다. 나는 당시 이 두 개가 서로 통합하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두 개를 갈라놓으면 우습다고 생각한다.

한국교회는 신앙적 보수나 신학적 진보와 대화가 잘 되지 않는데 깊이 들여다보면 기장이나 예장합동이나 50%는 신앙적 보수로서 똑같다. 경건주의가 바탕이다. 진보 교단이나 보수 교단이나 개인 경건은 다 비슷하다는 얘기다. 차이는 사회참여 문제인데 사회적 참여, 사회적 공공성에 대해 보수는 ‘그건 개인경건에 속하는 것이지 우리 영역이 아니다’라고 생각하는 반면 한신 같은 진보 교단은 공공구원을 강조한다. 그 차이 외엔 신앙적으로 별 다른 점이 없다. 그것이 세계적인 에큐메니칼 진영과 에반젤리칼 진영의 차이인데 그 둘은 갈등이 아니라 상호보완적인 것이다. 마치 저울추가 왔다갔다하는 것과 같다. 그게 내가 생각하는 보수신앙과 진보신학의 차이점과 공통점이다.

 

-유코리아뉴스: 언제 목사가 되기로 하신 건가?

내 뜻이 아닌 아버지의 뜻이었다(웃음). 아버지는 첫아들을 낳으면 목사로 바쳐야겠다고 다짐하셨다. 그래서 나는 나면서부터 목사다. 어쩌면 그렇게 분위기를 몰아가서 목사가 된 것인지도 모른다. 내 형제들 이름이 다 ‘화’자 돌림인데 ‘화’자가 평화 화(和)자다. 아버지는 ‘화’자를 좋아하셨다. 특별히 나한테는 종교 일을 하라고 마루 종(宗)자를 붙이셨다. 그래서 나는 어릴 적부터 ‘목사 될 놈’이라고 불렸는데 반발도 많이 했었다. 그런데 자라면서 보니까 자연스럽게 목사의 길을 가고 있었다. 다만 보수신앙이되 은사 중심이 아닌 생활 속 신앙을 어머니한테 배우며 자랐다. 나는 방언이나 예언을 할 줄 모른다. 은사는 하나도 할 줄 아는 게 없다. 그냥 생활 속에서 경건의 중요성을 알고 살아가고 있다.

 

-유코리아뉴스: 그렇다면 진보신학자, 진보목회자로 알려진 박종화 목사의 뼛속엔 보수신앙이 뿌리 깊이 박혀 있다고 봐야 하나?

그렇다. 나는 지금도 신앙생활은 경건한 보수가 좋다는 입장이다. 진보적 신앙생활은 어딘지 다른 종교와 차별성이 없어 보인다. 진보적 신학을 가진 사람과 대화해 보면 어딘지 신앙 냄새가 안 난다. 하지만 신학은 학문이다. 학문을 신앙의 이름으로 재단한다? 그러면 신학대학이 필요가 없다. 신학, 즉 하나님의 학문은 너무 넓어서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다. 신학적 재능도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다. 경건도 하나님 선물이다. 하나님 선물을 인간이 재단하면 안 된다. 나는 보수신학을 개인적으로 인정은 하나 내가 취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다. 그건 학문의 영역이다. 하나님 입장에선 아마도 ‘나는 무한대로 높으니까 제발 좀 마음놓고 나를 공부해 봐라. 추구해 봐라’ 그렇게 말씀하시지 ‘이건 안 된다, 저건 안 된다’ 그렇게 말씀하시진 않을 것 같다. 삼위일체 신학이란 근간 안에서 모든 게 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제 신학은 진보적이다. 경건과 신학이 같이 가야 한다. 그게 바로 김재준과 장준하의 신학과 신앙에서 온 것이다. 그런데 한쪽만 보니까 진보적으로 보이는 것이다.

경건한 신앙과 진보적 신학의 조화. 박종화 목사가 어릴 적부터 부모들로부터 체득한 자신의 '균형잡힌' 신앙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유코리아뉴스

-유코리아뉴스: 신앙은 보수, 신학은 진보를 말씀하셨는데 한국교회를 어떻게 보시는지 궁금하다.

내가 한국교회를 보는 관점도 마찬가지다. 나한테 그 두 개는 별개가 아니라 상보적인 것이다. 그런 면에서 통합적이다. 사회참여 할 때 보니까 신앙이 투철한 사람이 사회참여도 진심으로 한다. 그렇게 진심으로 뛰어들지 않는 사람은 전략적으로 하는 사람이다. 그렇게 하면 기독교와 비기독교 차이가 별로 없다. 문익환 목사 같은 분은 대북관계에서 상당히 ‘진보적’이라고 하지만, 그 분의 신앙의 핏속엔 엄청난 경건이 흐른다. 안 그러면 절대 그렇게 할 수가 없다. 하다가 적당히 그만두고 만다. 진실한 경건과 신학적 자유는 통한다. 그 예가 바로 유럽의 모라비안 교회다. 모라비안 교회가 굉장한 경건주의인데, 신학은 굉장히 진보적이다. 진보적이기보다 에큐메니컬 신학이다. 경건주의와 신학적 진보가 만났을 때 가장 아름다워 보인다. 경건주의에서 신학적 진보성을 뺀 게 신경건주의다. 신경건주의가 미국으로 건너가서 이상한 근본주의로 변질되기도 했다. 근본주의는 경건주의에서 신학을 뺀 것이다. 신학이 없는 근본주의는 좌가 됐든 우가 됐든 안 된다고 생각한다. 에큐메니칼 신학이 뭐냐고 누가 묻는다면 진취적 신학에 경건적 신앙생활을 겸비한 것이라고 말하겠다. 그것이 나의 고백이다.

 

-유코리아뉴스: 박종화 목사님 하면 위르겐 몰트만 교수를 빼놓을 수 없는데 어떻게 만나게 되셨나?

내가 독일에서 공부할 때 배운 선생이 몰트만 교수다. 몰트만은 첨단 진보신학자인데 그 분은 신학 전공하기 전에 목회를 했다. 원래는 물리학을 공부하려고 했었다. 함부르크 출신인데 2차 대전 때 친구 하고 길을 가다가 친구가 갑자기 벼락을 맞고 죽었다. 루터의 경험과 똑같다. 몰트만은 친구의 갑작스런 죽음 앞에 ‘하나님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 라고 고백했다. 그리고 나중에 포로로 잡혔다가 영국으로 갔는데 화란의 선교사가 건네준 성경책을 읽고 회심을 하게 됐다. 예수님이 숨을 거두시면서 하신 말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게 마음에 박혀서 ‘예수님이 날 위해 죽었다’는 걸 받아들이고 물리학에서 신학으로 진로를 바꾼 것이다. 자신이 아무리 진보신학을 배우고 사용해도 목회 현장과 결부되지 않은 신학은 자신의 과목이 아니라는 게 그 분의 고백이다. 다른 진보신학자들과 몰트만의 차이가 바로 그것이다. 몰트만은 목회적 배려가 있는 분이다. 그는 특히 한국 사람을 좋아한다. 요즘도 나한테 자주 전화한다. 어제도 전화를 해서 한국 코로나 상황이 어떠냐고 물어보고, 북한이 연락사무소를 폭파했는데 남북관계는 어떠냐고 물어봤다. 이분은 독일이 제1고향, 한국이 제2의 고향이다. 그 분의 고백이다.

 

-유코리아뉴스: 몰트만 하면 조용기 목사와의 교제로도 유명하다. 박 목사님께서 두 분을 연결하신 걸로 알려져 있는데?

몰트만은 1970년대부터 한국의 민주화, 인권 운동에 매료돼 있었다. 내가 독일에서 공부할 때 몰트만과 같이 했던 일이 있다. 내가 한국의 민중신학을 번역하고 몰트만이 편집자가 되고 그 제자 한 명이 협력해서 ‘독일식 민중신학’을 추구한 것이다. 몰트만은 ‘민주화 운동을 하는 한국 교인들의 뿌리에는 엄청난 성령의 경험이 있을 것이다’ 라고 생각했다. 이분이 어느 날 나 보고 “조용기 목사 좀 만나게 해줄 수 있냐?”고 물었다. 당시 조 목사는 조 목사대로 <희망의 신학>(몰트만의 대표저서)을 읽으면서 ‘희망은 성령 안에 있는 것인데 어떻게 신학 안에 있다는 것이지?’라면서 몰트만에 대해 궁금해 하고 있었다. 당시 마침 내가 한신대 교수로 있다가 그만두고 기장 총무를 하고 있었다. 내 과목이 에큐메니칼 신학인데 선교신학 과목이다. 이 신학은 세계를 누벼봐야 알 수 있는 것인데 청년들이 그걸 어떻게 알겠나. 이건 성인들에게 가르칠 것이지 청년들을 대상으로 할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교수직 자체는 좋았지만 내용은 아니었다.

나는 현장에서 신학을 실천해야겠다고 생각하고 교단 총무로 나서서 당선됐다. 당시 사람들이 나보고 미쳤다고 했다. 왜 교수를 그만두고 총무로 나오냐는 거다. 나는 교수도 목사, 총무도 목사, 목회도 목사인데 교수는 그저 보직이라 생각했다. 교단 총무가 되고 나서 그 다음 첫 총회 즉, 1995년 총회 때 내가 몰트만을 총회 주 강사로 초청했다. 그러면서 두 사람에게 만남을 제안했다. 둘 다 좋다고 했다. 총회를 개회한 다음 날 아침 일찍 63빌딩 54층에서 만났다. 사회는 내가 보고 아무 전제 없이 둘이 만나서 대화했다. 조 목사의 나중 고백이 ‘몰트만을 만나는 게 너무 흥분되어서 몰트만 저서를 몇 주 전에 다 읽었다’고 했다. 대화는 영어로 했는데 내가 진행했다. ‘조 목사도 몰트만도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됐는지 경험을 얘기하고 얘기하라’고 했더니 조 목사는 폐병에 걸려 죽었다가 살아난 얘기를 했다. 몰트만도 친구랑 가다가 친구가 죽고 포로수용소에 갇혔던 얘기를 했다. 조 목사는 개인적 성령 경험을, 몰트만은 사회적 성령 경험에 대해 얘기한 셈이다. 주거니 받거니 한참 얘기하다가 나중에는 둘 다 ‘우리가 각자 성령의 한 부분을 경험했다. 우리 둘이 합쳐야 온전한 성령 경험이 된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게 그 날 대화의 핵심이다. 상층권에서는 다 만나게 되어 있는 것 같다. 언젠가 조 목사가 몰트만에게 편지를 썼는데 ‘내가 우주적 구원을 설교의 주제로 했다’고 썼다. 몰트만은 ‘당신은 개인영혼구원인데 무슨 사회, 우주의 구원이냐?’고 했다. 나중에 몰트만이 ‘나도 개인구원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았다’라고 고백했다. 서로 통하게 된 것이다.

2012년 5월 몰트만 교수와 조용기 목사가 세 번째 만남을 갖고 있다. 왼쪽부터 박종화 목사, 몰트만 교수, 조용기 목사, 이영훈 목사, 독일 튀빙겐대 출신의 유석성 전 서울신대 총장. 순복음가족신문 제공

-유코리아뉴스: 몰트만과 조용기의 만남을 통해 경건과 신학, 보수와 진보가 통한다는 걸 증명해 보인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경건과 신학은 분리가 아니라 상호관계다. 통일 담론들도 서로 엄청나게 차이가 많다. 차이가 많은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다양성 속에서 공통분모를 찾아 가는 게 중요하다. 다른 건 놔두고 공통의 영역을 넓혀가는 게 나는 ‘민주’라고 생각한다. 한국은 두 종류가 있는데 민주라는 이름하에 틀린 것을 자꾸 찾아가는 것, 이건 분석적 결합이다. 그게 필요하다. 또 하나는 공감대를 찾아가는 노력이다. 이건 통합적 방식이다. 서유럽은 분석적 결합이 보편화되어 있다. 그래서 코로나19 때도 개인자유의 속박을 반대한다. 반면 한국은 같이 살아야 한다는 통합적 사고가 중요하다. 유럽도 통합적 사고가 있긴 하지만 중요한 건 개인적 자유다.

공감대를 찾고 공통의 영역을 넓혀가는 것도 중요한 에큐메니칼 영역이다. 이것이 나의 에큐메니칼 논점이다. 반대로 분석을 해서 다른 걸 자꾸 찾아내는 분석 운동도 있다. 그건 아마 신학에서 가능한 얘기고 현실에서는 공통영역을 찾는 게 더 중요하다고 본다. 지금 한국은 공감대를 넓혀가는 게 더 중요하다고 본다. 한국은 깃발 드는 걸 잘 한다. 하지만 깃발을 모아서 뭘 만들 때 보면 잘 못 만든다. 10개 중에서 5개만 같으면 거기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정치로 말하면 난 협치주의를 강조한다. 단독정부보다 협치가 낫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사자성어 중에 성서적이라고 생각하는 게 있다. ‘和而不同(화이부동)’이다. 인간에게 동(同)은 안 된다. 부부끼리도 동은 안 된다. 하지만 화(和)는 가능하다. 나 스스로도 동이 안 되는데 다른 사람과 어떻게 동이 되겠나. 성경에 보면 이 ‘화’자가 ‘화해’ 화 자다. 하나님이 인간과 화해하셨다. 그렇다고 내가 하나님이 되지는 않는다. 하나님이 나를 받아주신 것이다. 내가 하나님이 되면 사이비 종교다. 신이 된 인간이 있다면 독재자다. 그게 아니라 ‘화’인 것이다.

독일교회가 우리에게 하는 말이 ‘1970년대 유신체제 반대 인권운동이 마치 히틀러 치하의 고백교회 운동과 흡사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독일교회가 보수, 진보 할 것 없이 우리를 엄청 지원했다. 어느 정도였나 하면 당시 인권운동 지원금 전체액의 3분의 2를 독일교회가 부담했다. 

-유코리아뉴스: 본질적인, 너무나 중요한 말씀들을 해주셨는데, 우리의 고민은 현실이다. 현실적으로 누가 얼마나 양보하면서 공감대를 형성해 가느냐인데 독일교회 맥락과 한국교회 맥락은 전혀 다르다. 한국교회는 특히 반공주의라는 뇌관이 있는데 이걸 잘 해체해야 통합도, 화도 가능할 텐데 어떻게 해야 할까?

내가 1970년대에 독일을 갔는데 당시 한국은 유신체제였기 때문에 유신체제에 대한 저항운동, 거기에 독일교회 전체가 돕고자 나섰다. 내가 그 일을 중개했다. 하지만 우여곡절이 있었다. 내가 독일로 가려고 하는데 안기부에서 1년 동안 출국을 시켜주지 않았다. 반체제 인사라는 것이다. 아내와 자녀들은 처가가 캐나다에 있어서 미리 캐나다에 가서 거기서 만나 독일로 같이 가기로 했다. 그렇게 한 달 전 미리 캐나다로 갔고 나는 한 달 후에 공항에 갔더니 출국금지 상태였다. 그때 안기부가 나한테 하는 말이 ‘둘이 헤어져라. 이제 못나가고 못 들어온다’는 거였다. 그런데 1년 뒤에 출국금지가 풀렸다. 이유를 알아보니 독일 정부에서 난리가 났다. ‘우리가 초청한 선교사인데 왜 막느냐?’는 것이었다. 독일 대통령이 편지를 보내고 하는 등 정치적 사건으로 비화되었다. 그렇게 해서 1년 뒤에 풀려 출국할 수 있었다. 그 1년 동안 있었던 일은 지금 말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독일교회가 우리에게 하는 말이 ‘1970년대 유신체제 반대 인권운동이 마치 히틀러 치하의 고백교회 운동과 흡사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독일교회가 보수, 진보 할 것 없이 우리를 엄청 지원했다. 어느 정도였나 하면 당시 인권운동 지원금 전체액의 3분의 2를 독일교회가 부담했다. 미국은 정치로 돕고 있었다. 히틀러 치하에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해도 잡혀가고 저렇게 말해도 잡혀가는 상황이었는데 본회퍼의 기도의 영성, 행동의(정의의) 영성을 합해서 고백교회 운동을 벌였다. 그러면서 한국교회 운동을 너무 좋아했는데 그 중심에 NCC가 있었고 기장이 있었다. 내가 독일 교회에 가서 한국의 상황을 설명하고 강연을 하는데 한국은 새벽기도를 어떻게 하고 인권운동을 어떻게 하고 있고 이런 얘기만 해도 엄청난 박수와 함께 후원금을 내놨다. 자신들이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교감이 되는 것이다.

 

-유코리아뉴스: 끔찍했던 히틀러 체제를 경험한 독일교회로서는 박정희의 유신독재 치하의 한국교회에 대해 공감이 많았을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워 보이는데 막상 독일에 가서 한국상황을 얘기하고 다닌다는 게 쉽지는 않았을 것 같다.

그렇다. 내가 독일교회를 다니면서 박정희 유신체제를 비판하면 사람들이 질문하는 게 있다. ‘그러면 너희의 대안은 북한체제냐?’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아니다. 나는 반북, 반공’이라고 했다. 그러면 독일 사람들이 ‘왜 하필 반북, 반공이냐?’고 따졌다. 남북한 대치라고 하는 특수 상황을 잘 이해를 못하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다시 장황하게 설명을 해야 했다. 히틀러는 극단의 우파이지만 김일성은 극단의 좌파다. 극단이다. 한국의 인권운동을 전개하는 데 있어서 ‘반공’이란 말을 하지 않으면 오해 때문에 일을 못한다. 그 당시 독일에서 ‘친북 그룹’이라고 하면 윤이상, 송두율 같은 사람들인데 내가 그 사람들을 잘 알지만 나는 그 사람들과 반대 쪽에서 활동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친북, 반 유신운동을 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게 얼마나 어려웠는지 모른다. 당시 나는 전략상 반공이었지 이념상 반공은 아니었다. 그런데 서울에서는 반공이 독재의 방편으로 쓰였다. 그게 고민이었다. 그렇다고 난 친 독재도 아니고 하나님 편이라고 했다. 이게 굉장히 어려운 문제였다. 한국을 떠나서 미국 같은 데서도 똑같은 문제였다. 미국에서 공부한 사람들은 자본주의 영향이 너무 강해서 반공이 되고, 유럽은 사회민주주의 성향이 강해서 반공은 반공이지만 이념적 반공이 아닌 정책상 반공이 된다. 그 차이가 여전히 있다.

남북 사이의 대치가 묘해서 북한은 자본주의를 받을 역량이 없고 남한은 북을 받을 여지가 없다. 사회주의의 ‘사’자만 되도 문제가 되기에 쉽지 않다. 지금은 남한이 상당히 선진화되면서 이념의 폭이 넓어졌다. 이젠 이 문제는 한국의 정황상 특별한 시기에 빨리 극복해야 자유롭게 통일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민당을 했던 사람들이 상당수 용공으로 몰린 적이 있다. 난 이 문제는 이념의 문제라기보다는 우리의 특정한 지정학적 상황의 문제라고 본다.

나는 독일에서 10년을 살았다. 나처럼 유럽에서 생활해본 사람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대화, 막스주의와 기독교의 대화 이런 것들이 자기 것을 지키면서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공산주의에 대한 두려움 같은 건 전혀 없다.

-유코리아뉴스: 그 밖에 독일로부터 우리가 본받아야 할 점이 있다면?

내가 독일에서 본 것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공존이었다. 동독과 서독이 공존하고, 유럽의 모든 나라가 사회민주당과 보수당이 공존하고 있었다. 우리는 사회주의 하면 공산주의와 동일시하는데 거기는 사회주의와 민주주의가 합해서 ‘사회민주당’, 자본주의 중심은 자유민주당, 기독교민주당 이게 너무 자연스럽게 공존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독일에서 10년을 살았다. 나처럼 유럽에서 생활해본 사람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대화, 막스주의와 기독교의 대화 이런 것들이 자기 것을 지키면서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공산주의에 대한 두려움 같은 건 전혀 없다. 예를 들어 소련식 사회주의가 서구 자유주의에 졌는데 그 이유는 사회주의 정책을 사회주의권보다 더 잘 한 데가 바로 유럽이기 때문이다. 동유럽은 사회주의 이념만 내놓고 사회주의 내실이 없었다. 정치가 독재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럽은 사회주의 이념을 민주주의 방식으로 풀었다. 그래서 사회민주주의 또는 민주사회주의다. 동유럽은 사회민주주의가 없다. 소비에트식 사회주의다. 서유럽 사람들이 어떻게 복지 등에서 사회주의적 공감대를 갖고 기독교 신앙으로 뭉칠 수 있었을까? 이것이 나의 관심이었다.

독일은 당이 크게 두 개가 있다. 기독교민주당(기민당), 사회민주당(사민당)이다. 기독교민주당은 뿌리가 가톨릭이고, 사회민주당은 뿌리가 개신교다. 개신교 경건주의다. 자유민주당도 있지만 순수 세속 정당이다. 기독교 목사만 되면 다 사민당 당원이다. 신부들을 만나면 다 기민당 당원이다. 100%는 아닌데 큰 흐름이 그렇다. 선거 때 되면 최대 쟁점이 복지다. 무슨 복지를 펼칠 것인가를 놓고 싸운다. 통일 문제도 사민당이 시작했지만 기민당이 완성했다. 유럽 자체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가 적대적으로 출발한 게 아니라 나라를 세우는 일에 쭉 같이 해왔다. 그것은 어느 정당 하나에서 나온 게 아니라 여러 정당이 연립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다. 정치 구조, 사회 구조, 교회 구조가 그렇게 되어 있다.

 

-유코리아뉴스: 끝으로 한국사회에는 여전히 이념, 반공 문제가 내재해 있다. 이것이 선거와 같은 이슈 때만 되면 사회 전체를 흔들어 놓는데 이 문제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안병무 박사(‘민중신학’의 저자-편집자 주)가 독일에 와서 몰트만 교수와 토론하면서 한 질문이 있다. “한국에서 보니까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는 막스주의가 다 갖고 갔다. 그걸 되찾아와야겠는데 그게 바로 ‘민중신학’이다. 그런데 ‘반공’이라는 이름으로 민중신학을 할 수밖에 없는 정치적 어려움이 있다.” 독일 사람들이 이걸 이해를 못하는 것이다. 반공을 왜 해야 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반공을 안 하면 신학이든 모든 게 용공이 되는 것을 모른다. 그런 어려운 상황이 지금도 일부 남아 있다. 반공이라는 이데올로기를 비신화화, 즉 완전히 떨쳐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이념 싸움은 한국사회에 여전히 남아 있다. 특히 교회에 많다. 반공이라는 이데올로기가 가진 흑막을 떨쳐 버려야 한다. 이념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이념을 말하게 된 사회적 동기와 정치적 콘텍스트가 빨리 벗겨졌으면 좋겠다. 그러려면 남북간 긴장 상태를 극복해야 한다.

우선 이념적 용어가 아니라 중성적 용어를 쓰는 것부터 시작하자. 복지가 그렇다. 우리나라 건강보험이 전세계 어느 사회보험보다 훨씬 좋다. 그래서 서양 사람이 ‘사회주의적 이상을 한국이 완전히 실현했다’고 할 정도다. 우리는 사회주의라고 하지 않는다. 복지라고 한다. 말을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흔히 쓰는 이념적 틀이나 정치적 수사를 사람들에게 말할 때 비신화화, 비정치화, 비이념화, 탈이념화시켜서 엑기스만 가지고 재창출하는 것 이것이 중요하다. 이념이나 용어 때문에 오해 받으면 아무것도 못한다. 내가 쓴 글에는 그런 오해받을 만한 내용은 삭제를 한다. 내용 가지고 승부를 해야 한다. 내가 보수 교회엘 가도 용공이란 말 쓰는 사람이 없다. 거죽으로 싸인 이념적 틀 때문에 한국사회 내 분열이 너무 많다. 그러니까 빨리 이걸 헐어야 한다. 이 정도로 사회가 발전하니까 이제 헐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지금 우리 사회는 많이 발전했다. 옛날에는 이런 말도 못했다. 한 마디만 잘못 말해도 용공이라고 했다. 용어 때문에 피해를 너무 많이 봤다. 가능하면 대립적 이데올로기 용어는 우리 언행에서 좀 없애자. 지금 사회주의라는 말도 워낙 다양해서 차라리 소비에트식 사회주의라고 하든지 마오식 사회주의라고 하든지 서구식 사회주의라고 해야지 ‘사’자만 들어가면 다 난리인 상황이다. 기독교 안에는 외국으로부터 배우고 유입된 껍데기 이념에 대해 너무 치우쳐 있다. 이제는 이걸 벗겨버릴 수 있을 만큼 내적으로 많이 성숙했다. 북한 하고 얘기할 때도, 통일 담론을 말할 때도 그렇고 이 점이 굉장히 중요하다.(끝)

김성원·정지연 기자  ukoreanew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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