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점에서 간첩조작 같은 일이 대한민국에서 다시는 반복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 가족처럼 이런 불행한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기를 간곡히 부탁드린다.”

25일 ‘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 항소심 판결 직후 유우성씨가 밝힌 소감이다.

서울고법 제7형사부(재판장 김흥준 부장판사)는 25일 오전 10시 30분 서울고법 대법정에서 열린 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 항소심 선고에서 우성씨의 간첩 등 국가보안법 위반혐의에 대해서는 1심에 이어 무죄를, 검찰이 공소장 변경을 통해 추가한 사기 혐의 등에 대해서는 유죄를 각각 선고했다. 하지만 유죄 부분도 정상을 참작해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 추징금 2500여만원을 선고했다. 1심에 이은 2심에서도 법원은 우성씨 손을 번쩍 들어준 것이다.

▲ 항소심 선고 직후 유우성씨가 취재진에게 둘러싸인 채 질문에 답하고 있다. ⓒ유코리아뉴스

재판부는 검찰 공소사실의 절대적 증거가 되었던 피고 유우성씨의 여동생 유가려의 중앙합동신문센터(합신센터) 진술을 “증거능력이 없다”고 봤다. 재판부가 유가려의 합신센터 진술을 증거능력이 없다고 본 근거는 유가려가 사실상 피의자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국정원이 형사소송법 244조 3항(진술거부권 등의 고지)이 규정한 피의자의 진술거부권, 변호사선임권 등을 고지할 의무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1심 재판부도 이 때문에 유가려의 진술을 증거능력이 없다고 봤었다.

1심 재판부가 인정하지 않았던 ‘임의성’ 부분도 항소심 재판부는 인정했다. 현행 형사소송법 제317조(진술의 임의성)는 “피고인 또는 피고인 아닌 자의 진술이 임의로 된 것이 아닌 것”이나 “(진술서의) 작성 또는 내용인 진술이 임의로 되었다는 것이 증명된 것이 아니면 증거로 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유가려가 합신센터에서 국정원 수사관들에게 자신이 화교라고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국정원장은 임시보호조치(불법 입국 외국인이 임시 거주하는 처소에 머물게 하는 것 등)에 취하지 않고 합신센터에서 6개월 가까이 조사를 한 것은 재량권을 넘어선 것으로써 유가려의 신체자유, 거주이전의 자유를 부당하게 제한했다는 것이다.

이밖에 재판부가 유가려의 진술을 임의성이 없다고 본 이유는 다음과 같다. ▲합신센터 수사기간에 국정원이 영장 청구를 할 수 있었음에도 영장 없이 수사를 진행한 점 ▲합신센터 독방에 갇혀 사실상 구금상태에서 진술한 점 ▲변호인 접견권 등에 대한 충분한 이해 없이 여러 차례 변호인 접견 권리를 침해당한 점 ▲합신센터 내에서 심리적 위축과 회유에 넘어가 진술한 점 등이다.

재판부는 또 지난해 3월 4일 검찰의 요청으로 안산지방법원에서 열린 증인 유가려에 대한 증거보전절차의 비공개와 관련해 “공개재판 권리를 침해한 것으로써 증거능력이 없다는 게 판례”라고 밝혔다. 명확한 비공개 사유를 기재하지 않은 채 비공개 재판을 한 것은 증거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당시 증거보전 절차에서 증인심문만 아니라 증거보전 전체가 비공개로 됐기에 피고의 이의 제기를 위해서도 마땅히 ‘비공개’가 명확하게 기재됐어야 하는데 그 사유가 빠져 있고, 따라서 증거보전절차도 증거능력이 부여될 수 없다고 판시한 것이다.

검찰의 공소사실 하나하나에 대해서도 법원은 증거능력, 정황 등을 조목조목 따졌다. 우선 2006년 5월 어머니 장례식을 치르러 입북하고 나와서 다시 입북해 북한 보위부에 체포돼 간첩으로 인입됐다는 공소사실(특수잠입 등). 이와 관련 검찰은 유우성씨의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 맹원증을 증거로 제시했다. 이에 대해 재판부는 1995년(피고가 10대 때)에 맹원증을 받았다고 하는데 맹원증엔 피고인의 전문대학 재학시절 사진이 실린 점, 북한식 이름인 유가강이 아닌 남한식 이름 유광일로 된 점, 2010년 4월 유가려도 북한이탈주민으로 인정받기 위해 맹원증을 쉽게 위조할 수 있었던 점 등을 들어 “이 맹원증은 정상적으로 발급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며 “북한 보위부가 불순한 목적으로 활동하게 하려 했다면 우리 수사기관이 간파할 수 없도록 정교해야 해야 했음에도 이 맹원증은 그렇지 않다”고 밝혔다.

항소심 재판에서 검찰 측 증인으로 출석했던 탈북자 김모씨의 진술 관련. 김씨는 법정에서 “2010년경 피고 아버지와 동거 중 아버지가 ‘아들(피고)이 회령시 보위부에서 일하고 있다’고 말했다‘는 취지의 증인 진술을 했다. 이에 대해 재판부는 “김씨는 피고와 아버지가 보위부 일을 많이 했다고 하는데 김씨가 말하는 보위부 일이라고 하는 것은 보위부에 인입된 걸 의미하는지 알기 어렵고 대북송금사업을 하면서 보위부가 뒤를 봐주면서 한 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2006년 5월 우성씨의 중국-북한 출입경 기록(‘출입입입’으로 돼 있다)과 관련해 검찰은 “세 번째 ‘입(경)’은 ‘출(경)’이 오기(誤記)된 것”이라며 이와 관련해 “업그레이드 과정에서 오기 발생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증인 진술도 법정에 제출한 바 있다. 하지만 재판부는 “피고는 을증 통행증으로 북한에 출입했는데 그것은 30일 내에 1회 왕복만 가능하다. 피고와 함께 북한에 다녀온 (외삼촌) 국상걸의 기록도 마찬가지고 3, 4번(입, 입) 기록은 실제 존재하지 않는 기록임이 분명하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 검찰은 항소심 재판이 진행중이던 지난해 11월 1일 “새로운 증거”라며 화룡시공안국의 ‘출입경기록조회결과’, 삼합변방검사참의 ‘유가강(유우성)의 출입경기록에 대한 회신’, 화룡시공안국이 심양 주재 대한민국총영사관에 발송한 공문 등 3건을 법원에 제출한 바 있다. 이후 법원은 중국 측에 해당 문서의 위조 여부 확인을 공식 요청했고 지난 2월 13일 중국대사관 측이 “모두 위조된 것”이라는 공식 답변서를 제출하면서 거센 역풍을 맞았고 결국 검찰은 스스로 증거를 철회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재판부는 이밖에 2007년 8월경 피고가 두만강을 도강해 북한으로 탈출했다는 공소사실(탈출)과 피고를 회령에서 목격했다는 탈북자의 진술(증거)에 대해서는 “그 짧은 시간에 본 것을 몇 년이 지나서 기억한다는 건 신빙하기 어렵다”고 봤고, 2012년 1월 23일경 미리 입북한 아버지와 함께 회령시 보위부 반탐부부장과 회합해 추가지령과 표창을 받았다는 공소사실(특수탈출 및 회합)에 대해서도 “회령에서 검은색 점퍼를 입은 피고를 봤다는 탈북자 증언이 있었지만 피고의 아버지는 이미 2011년 7월 최모씨에게 집을 팔고 중국에 거주하고 있었고 북한 집에는 최모씨의 언니가 살고 있었다”며 “거기서 피고를 봤다는 증거는 희박하다”고 밝혔다.

▲ 25일 오전 유우성씨(오른쪽 두번째)가 긴장된 표정으로 변호인, 법원 경위들과 함께 서울고등법원에 들어서고 있다. ⓒ유코리아뉴스

2006년 8월경 피고가 외당숙 국상걸을 통해 북한 보위부에 중고 노트북을 전달했다는 공소사실(편의제공)에 대해서도 재판부는 국상걸의 진술서가 반대심문권이 부여되지 않은 상태에서 한 진술이기에 증명력이 부여되기 어렵다는 점, 노트북이 국가안위에 실질적이고 명백한 위험이 있는지 의문이 드는 점, 피고가 그린 노트북 그림에 부합하는 노트북이 존재하는지 확인이 안된 점, 노트북과 함께 배터리, 가방 등의 무게를 합하면 공소사실에 기재된 무게보다 무거웠을 것이라는 점 등을 들어 “증거능력이 부족하다”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검찰이 제기한 국가보안법 위반과 관련한 공소사실 9가지(특수잠입, 편의제공, 탈출, 국가기밀 탐지 및 수집, 회합 통신, 특수탈출 및 회합, 특수잠입 등) 모두에 대해 “검찰 항소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밝혔다. 1심과 마찬가지로 무죄로 판단한 것이다.

다만 피고가 화교임에도 불구하고 북한이탈주민으로 가장해 8500여만원의 재산상 이익을 취한 점, 대한민국 국적과 함께 중국인 행세 등 이중행태를 보인 점, 2004년 입국 후 탈북자로써 성공적인 정착을 위해 노력해 온 점, 법정에서도 대한민국에 기여하고 싶다며 나름대로 애국심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되는 점, 피고인 스스로 북한이탈주민으로 착각했을 수도 있다는 점, 피고가 이미 국보법 위반 혐의로 7개월 가까이 구치소에 유치됐던 점 등을 들어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 추징금 2500여만을 판결했다.

재판부가 검찰 공소사실의 증명력 등을 조목조목 따져나가며 선고까지 걸린 시간은 1시간 40분. 원래 예정됐던 1시간을 훌쩍 넘겼다. 재판정도 일반 법정이 아닌 대법정으로 했다. 그만큼 국민적 관심이 많다고 봤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날 재판엔 세월호 참사로 대부분 사건팀 기자들이 진도에 몰려 있음에도 이날 내외신 기자 등 수십 명이 몰렸다.

항상 긴장한 표정이었던 우성씨의 얼굴에도 모처럼 환한 미소가 번졌다. 우성씨는 “민변 변호사님들이 1년 4개월 동안 무료 변호해 줬다. 신부님, 목사님, 교수님, 대학교 지인 등이 없었다면 나는 이 자리에 없었다”며 “사실을 왜곡하지 않은 언론과 기자님들께도 감사드린다”고 밝혔다. 사기죄 등 일부 유죄로 판결난 점에 대해서는 “제가 북한에 태어나고 싶어 태어난 것도 아니고 제가 선택해서 가정에서 태어난 것도 아닌데...”라며 “이 부분에 대해서는 죄송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 1심에 이어 항소심에서도 유우성씨의 간첩죄 사건 무죄를 이끌어낸 변호사들과 유우성씨가 환한 표정으로 법정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유코리아뉴스

천낙붕 변호사는 항소심 판결과 관련 “2012년 11월 5일 합신센터에서 여동생 가려씨가 화교신분임이 밝혀졌음에도 170여일이 불법 구금이었다는 걸 법원 판결로 확인한 게 가장 중요하다”며 “그 불법 구금 기간에 유가려가 감금상태에 있었고, 안에서 열 수 없는 시건장치, 하루종일 감시하는 CCTV, 수사기관의 기망행위, 한국에서 잘 살게 해주겠다는 거짓 약속 등 이 모든 게 사실로써 법원에서 판결로 확인한 게 중요한 의미”라고 밝혔다. 최장 6개월간 변호인 접견도 불허한 채 탈북자들을 상대로 사실상 ‘수사’를 하고 있는 합신센터의 불법성을 지적한 것이다. 이번 판결로 합신센터 내 탈북자들의 인권 문제는 물론, 합신센터 진술이 절대적 증거로 채태돼 대부분 유죄 판결을 받았던 탈북자 간첩 문제도 재조명되는 게 게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항소심 판결은 재판 과정에서 불거졌던 검찰의 증거조작 사건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김용민 변호사는 “검찰의 기존 입장은 ‘유우성이 간첩이라고 믿었다’였는데 항소심 판단은 간첩 증거가 아무것도 없다는 걸로 나왔기에 검찰 수사에 당연히 영향을 미쳐야 한다고 본다”고 밝혔다.

김성원 기자  ukoreanew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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