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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가 사과했다 칩시다, 상황 종료일까요?

이 시점에서 부담스러운 문제제기를 해 봅니다. “아베가 사과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마음까지야 불가하겠지만 우리가 기대하는 깔끔하고 정확한 문장으로 사과를 표명하며 동시에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도 전향적인 태도를 취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러면 상황 종료일까요? 우리의 외교적 승리일까요?

결코 아닙니다. 작금의 상황은 이미 이 수준을 지나쳤습니다. 물론 위안부 문제는 중요합니다. 별도 사안이고 이 문제가 가지고 있는 특수성을 존중해야 합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아베 총리 혹은 아베로 대표되는 일본의 변화는 위안부 문제에 국한해서 접근하거나 과거사 사과 문제 정도로 판단할 성질이 아닙니다. 감정적 사안은 더더구나 아닙니다.

상황이 너무 바뀌었습니다. 아베 총리가 이끄는 일본은 이미 충분히 우경화 되어가고 있습니다. 너무 잘 알려진 사실이지요. 그렇다면 반대로 묻겠습니다. 일본의 우경화는 어떤 여파를 미칠까요? ‘군국주의 망령의 부활이다’식의 주장은 너무나 막연합니다. 감정적인 반응은 상황을 해결하는 데는 너무나 불필요한 부분이구요. 일본의 우경화 과정이란 결국 동아시아 국제관계에 영향을 미칠 문제이고 작게는 대한민국의 국익, 크게는 동아시아의 지속적인 평화 번영에 가늠추가 될 것입니다.

일본의 우경화 과정은 사실 난센스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과거와 같은 군국주의 국가도 아닐뿐더러 과거와 같은 과격한 군사적 업적을 낼만한 국가 수준도 아닙니다. 무엇보다 동아시아 국제 질서가 이것을 불가능하게 하고 있습니다. 세계 최고 수준의 최고령 국가가 가진 근본적인 한계, 중국과 한국의 완전히 달라진 국제적 위상, 또한 중국-한국과의 무역을 통해 얻는 일본의 실질적 이득 등을 고려하면 우경화된 국가 일본이 과연 동아시아 어디에서 전쟁을 벌일 수 있을까요? 우리가 그럴 듯 하게 상상하는 것과는 참으로 다른게 현실입니다.

정치사적이나 역사적으로 기시 노부스케에서 고이즈미, 아베로 이어지는 흐름을 통상 자민당 내 자주파라고 부릅니다. 요시다 계열이 친미주의를 표방, 동아시아 문제에 개입하지 않으며 경제적인 성장만을 추구했던데 비해 기시 노부스케류는 미국의 현실적 권력을 인정하되 일본의 자주성과 아시아에서의 패권 추구를 주장했다는 측면에서 이런 분류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지만 일본의 정치 평론가 마고사키 우케루 같은 경우는 전혀 다른 주장을 펼칩니다. 기시 노부스케류 역시 친미파에 불과하다. 자민당은 계파와 상관없이 결국 친미 종속적 성격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말이 좋아 자주고 우경화지 결국 미국의 패권주의에 영합해서 아시아 내에서 부분적 패권을 추구하는 친미파들에 불과하다는 주장입니다.

상당히 의미 있는 대목입니다. 아베 정권만의 행보를 보면 다양한 각도에서 우경화 주장에 기초한 실질적인 여러 행정 조치들을 취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우경화 행보가 결코 ‘자주화’ 행보는 아닙니다. 오히려 아베 정권은 더욱더 적극적인 친미 행보만을 구가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패권은 인정하겠다 하지만 그 안에서 우리의 역할을 보다 적극적으로 감당하겠다. 우리는 미국의 세계 지배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의 세계 지배를 더욱 공고하게 만드는 아시아 동반자로써의 위상을 확보하는 것이 목표이다. 다소간에 언어적인 오해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결국 정상국가가 되어서 적극적 평화를 이루는 것이 우리의 목표 아닌가. 정확히 이 궤도에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베 정권의 우경화란 ‘자주화’라기보다는 ‘친미 패권주의’라고 부르는 게 정확한 표현일 것입니다.

보다 심각한 측면은 이런 일본의 우경화 경향에 대한 미국의 적극적 반응입니다. 많은 국제 관계 전문가들이 지적하듯 중국은 급격하게 부상하고 있고 헨리 키신저가 설파했듯 미국은 기울어져가고 있습니다. 국방 예산 편성의 한계, 동아시아 패권 유지의 한계, 세계 경찰로써의 한계, 본질적으로 세계 유일 패권국가로써의 한계에 직면한 것이 미국의 상황입니다.

중동에서는 이라크 문제도, 이란 문제도 제대로 처리하고 있지 못합니다. 아프칸 문제 역시 상황은 악화되고 있고 IS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사우디아라비아나 터키 등의 동맹국을 채근하지만 IS가 수니파이고 후세인이 몰락한 이 후 이란을 넘어 이라크까지 시아파가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상태에서 수니파 국가인 사우디나 터키는 미국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어떤 면에서 북한 문제는 미국에게 있어서는 상당히 경미한 사안 혹은 정치적으로 활용도가 높은 사안에 불과합니다.

   
▲ 일본의 아베 총리가 28일(현지 시간) 미국 백악관에서 오바마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진 뒤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일본총리실

그런 미국에게 적어도 아시아에서의 패권을 유지할 수 있는 확고한 동반자는 일본밖에 없습니다. 지형적으로나 전략적으로도 그렇겠지만 역사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가 지적했듯 미국과 일본이 20세기 동안 다투었던 기간은 고작 태평양전쟁 5년 뿐이었습니다.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미국은 일본의 조선 지배를 인정한 카스라-테프트 밀약을 맺었고, 중국 국민당 장제스 정권의 붕괴와 한국전쟁에 대처하기 위해 맥아더는 전범국가가 지녀야 할 모든 억압조치를 해제하고 말았습니다.

베트남전을 계기로 박정희 대통령은 한미군사동맹을 통해 미일동맹의 근간을 와해시키며 아시아 제1의 동맹으로 한미동맹을 만들려고 시도했던 적은 있지만 결코 성공할 수 없었습니다. 가히 맹목적이다 할 정도로 한미동맹을 완벽하게 추종했던 전두한 정권의 외교적 성취는 어떠했나요? 자주성을 표방하며 갈등했었던 박정희 정권에 비해 초라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동아시아가 가진 지정학적, 국제관계적 역학관계 그리고 오랜 기간을 통해 형성된 역사적 과정을 고려한다면 미국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일본의 우경화를 반기는 것은 응당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회의에서 아베는 시진핑을 향해 ‘전쟁에 대한 유감’만을 표시하고 조선 식민지배에 대한 언급만 빼버렸습니다. 중국과의 관계를 개선하되 본인들의 정체성만큼은 분명히 하겠다는 의지입니다. 한미일 외교 차관 회의에서 일본 관료는 과거 50년간의 한일 관계(한일 협정 이 후)는 너무 좋았으니 과거는 잊고 미래로 가자고 주장하였습니다. 현장에 있던 한국 관료는 제대로 된 반박조차 못하였습니다.

과거사 문제에 대한 미국의 입장도 본질적으로 일본과 유사합니다. 백악관에서는 ‘과거사 문제를 해결하고 미래로 가자’라고 정식으로 요청하였습니다. 일부 양식 있는 발언, 몇몇 언론과 의원들이 진정성 있는 요구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입장은 본질적으로 ‘과거는 잊고, 한미일 삼각안보체제를 강화’하는데 전력을 다하자는 입장입니다. 일본은 이 부분에서 전적으로 미국과 이해 관계를 함께하는 형태를 통해 자신들의 입장을 강제로 관철시키고 있습니다.

까짓거 한국 따위야! 이 정도 생각이 아니라면 이렇게 위협적이며 강제적일 수 없습니다. 결국 한국은 미국에 의존해서 사는 나라이고 미국이 압력을 넣으면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나라이다. 그러니 ‘미래로 가자’라는 구호 하에 과거사 문제를 과거로 규정하고 통제하자는 적극적 선택을 하는 거 같습니다.

여전히 냉전식 사고 방식에 익숙하고, 미국의 국익과 한국의 국익을 구분할 줄 모르는 형편에서, 남북관계가 개선되지 않으며, 북한의 위협을 최고의 위협이라고 생각하는 한국적 정서에서, 과거사 문제는 감정적이거나 단지 과거사에 불과한지도 모를 노릇입니다.

‘한일정보공유협정’을 맺으면 반발하지만 ‘한미일정보공유협정’을 맺으면 국민적 저항이 없고, 일본의 거친 발언에는 반발하지만 미국이 뭐라고 하면 대들지 못합니다. 더구나 대단히 교묘한 외교적 언어전술이 구가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대다수 국민들은 돌아가는 현실조차 제대로 가늠하지 못합니다.

오바마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분명히 위안부 문제를 비롯한 과거사 문제에 대해 일본을 공격하는 발언을 했습니다. 중요한건 발언을 했을 뿐이지 구체적인 선언이나 조약, 일본을 제어하고 통제하는 행정 조치들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한국을 방문하기 전에 일본에서 진행된 구체적인 동맹 강화 조치와는 매우 대조되는 행보였죠.

일본의 자위권 행사시 한국의 입장을 존중하겠다고 구두로 합의했지만 일본의 자위권 행사에 관한 미일협정에서 이 부분이 명문화되지 않았습니다. 미국의 행보는 극히 이중적이며, 교묘한 상황입니다. 그리고 하나 분명한 것은 ‘일본이 잘못했다 하지만 화해하라. 과거사는 과거사일 뿐 미래로 가자’입니다. 결국 한미일 삼각안보체제의 강화를 위해 한국이 다소간에 감정적인 불만을 스스로 누그러뜨리고 지금의 현실을 받아들이라는 말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받아들였다고 칩시다. 그러면 결국 아시아에서 미국-일본-한국이라는 위계 서열 하에 종속되고 말아버리지 않습니까? 애초에 미국의 전략이라는 것이 북한을 핑계로 중국을 견제하는 것에서, 아예 미일동맹 강화를 통한 중국 통제로 나아가고 있는 모습인데 이대로 간다면 한국이라는 주권국가의 자주성은 과연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냉정히 따져서 이런 식의 구조 개편을 통해 한국이 얻을 수 있는 이득은 사실상 없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더구나 이런 구조가 강화 되면 문자 그대로 ‘신냉전 구조’가 될 것이며 대규모의 무역 이득을 중국에서 취하고 있는 한국의 경제 상황에는 치명타일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더구나 유라시아 육로로 팽창하고 있는 중국발 경제 성장이나 러시아와의 경제 관계 심화 같은 상당히 구체적인 가능성들은 모두 물거품이 되고 말 것입니다. 더구나 통일은커녕 최소한의 필요에 의한 남북관계 개선도 불가능한 상황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국제 관계의 냉혹한 현실 조차 국내 정치에 유용한 방식대로 이용되고 해석된다는 점입니다. 정치권은 말할 것도 없고 특정 정파의 정치적 이득을 위해 기사를 생산하는 언론의 행태 때문에 사정이 낱낱이 곡해되고, 제대로 된 국민적 합의와 국가적 방향성 설정 자체가 불가능해진다는 점입니다. 국제 관계에서 생존해야 국내 관계도 존속하는 것이고 정치 권력이라는 것도 주권이 있어야 의미가 있고, 힘이라는 것도 먹을 것이 남아돌아야 힘일 것인데 작금의 국내 정치상황이나 언론 지형은 폭주 기관차처럼 마구잡이로 오직 국내 정치만을 위해 질주하고 있을 뿐입니다.

가장 본질적인 문제는 국민들의 무지와 무관심입니다. 관심이 없어도 너무 없고, 문제를 제대로 해독하지도 못하며 오직 독도와 위안부 문제에만 흥분만 할 뿐입니다. 거듭 이야기하지만 중요한 문제입니다. 하지만 냉정히 말해 독도는 동아시아 해역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영토 분쟁 중에 가장 안정적인 이슈입니다. 무력 출동 가능성도 너무나 희박합니다. 위안부 문제는 적어도 국민 의식 속에서는 여전히 감정적인 이슈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국제 관계를 두고 대통령이나 정부가 하는 행동에 대한 국민적 반응은 상당히 둔탁합니다. 국제 이슈가 국내 정치에 영향을 주는 경우도 거의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귀를 즐겁게 하는 소리에만 민감하게 반응하고 좋아할 뿐 실질적인 동아시아 국제 관계에 대한 국민적 인식도, 적정한 수준의 합의도 없습니다. 매번 남북관계는 미치광이 국가 북한과 남한의 정치적 이해관계에서만 소화될 뿐이고, 일본이 어떤 나라인지, 중국이 어떤 나라인지에 대해서는 사실상 지식과 정보가 극단적으로 전무한 수준입니다. 미국과 한국과의 관계는 맹목적 추종만이 가득할 뿐 제대로 된 국익의 구분, 미국에 대한 상대적 인식 같은 것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상황은 참으로 암담한데 세상은 빠르게 변해가고 있습니다. 냉담한 표정이었던 시진핑은 아베를 향해 엷은 미소를 지었고, 타이완은 양안관계를 두고 우리나라처럼 시급한 태도를 취하지 않습니다. 오직 우리만이 우리 스스로를 위해서 결단하고, 설득하며, 적극적으로 나서서 우리의 이득을 쟁취하고 우리의 주권을 수호하며 나아가 동아시아 평화를 지켜낼 수 있을텐데 말입니다. 동아시아 문제, 한일 관계, 한중 관계, 한미 관계, 남북 관계. 이런 것들에 대해 정치적으로 악용하는 습관을 버려야 할 것입니다. 이런 것들에 대해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냉철한 이성적 판단과 의미있는 행동을 해야 할 때입니다. 참으로 그런 때입니다.

심용환/ 역사 강사, 대학생을 위한 인문학 세미나 '깊은 계단' 대표

심용환  lyang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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