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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가의 자부심평양에서의 군생활, 날개를 달다

정찰국으로 소환 예정이었던 나를 잡아두었던 연대장도 내가 평양을 방어하는 부대로 소환되는 데 대해서는 아무런 조건도 걸지 않았다.  수령을 가장 가까이 모시고 복무하게 되었으니 건강해서 군복무를 잘 하라며 오히려 격려하며 나를 보내주었다.  물론 나는 최고사령관 명령으로 소환되었기에 누구도 나를 막을 사람은 없었다. 

평양을 방어하는 부대로 소환되면서 나는 곧 조선노동당에 입당하게 되었고, 중대 초급단체 위원장으로 중사의 계급과 함께 상사 편제의 부소대장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중대 초급단체 위원장은 정치적으로 장교는 아니지만 당의 대단한 신임을 받는 자리이다.  중대 초급단체 위원장은 정치적으로는 중대정치지도원과 상급 사로청 조직의 지도를 받으며 군사적으로는 소속된 단위의 장교에 복종해야한다.  그러나 중대장을 비롯한 직속 소대장 기타 장교들 특무장까지 누구든 중대 초급단체 위원장의 사업상 권위와 사업을 할 수 있는 조건을 철저히 보장해 준다. 

 조선노동당중앙위원회는 갑자기 증강된 부대들의 조속한 전투준비 완성을 위한 검열을 시작했다.  북한에서는 각종 검열이 많은데 군대에서는 제일 무서운 검열이 당중앙위원회 검열과 국가 검열이다.  그런데 당 중앙위원회 검열을 받게 되었으니 한마디로 무시무시하였다. 

 그때 우리 중대가 검열에서 지적받은 것은 전반적인 장비들과 위수구역(접근금지구역)에 대한 위장이 전혀 되어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문제를 지적 받았으면 빨리 해결하는 것이 중요하다.  순간 내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그것은 위장을 잘 못했다고 지적받은 문제를 우리 초급단체 즉, 청년조직에서 해결해보자고 생각했다.  이 일만 잘 되면 당중앙위원회 검열이기에 나는 완전히 스타가 되는 것이다. 사실 지적받은 위장 문제를 중대의 행정절차를 따리 퇴치하려고 한다면, 약 15일 정도는 걸려야 할 수 있는 작업량이었다. 

 나는 시간을 더 끌 수 없다고 판단하고 중대 정치지도원(정치장교)을 찾아가 우리 청년조직에서 당중앙위원회가 지적한 위장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제안했다.  나의 구체적인 계획을 다 들어본 중대 정치지도원은 적극 지지해 주었고 중대장을 비롯한 소대장, 그리고 당원들 모두가 청년들이 앞장서서 지도할 수 있도록 사업을 조직하였다.  즉시 중대 초급단체 총회를 열고 절박한 당의 요구를 청년군인들에게 인식시키고 중대 위장문제 때문에 수령님께서 심려하고 계신다고 호소했다.  그러자 청년군인들은 주먹을 들고 나와 이럴 때 우리 청년들이 앞장서서 수령님의 심려를 덜어 드리고 기쁨을 드리는 것이 수도보위 전사로서 당연히 할 일이라면서 모두가 의기투합했다. 

  그때부터 중대의 모든 군인들은 중대장을 비롯한 장교들의 말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중대 초급단체 위원장인 나의 말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특무장을 찾아가 우리 청년군인들에게 하루에 밥 4끼씩 먹여달라고 부탁했다.   특무장은 그것을 약속하고 절약하였던 비상용 후방물자까지 다 털어 튀김도 해 주었고 어디에서 구해왔는지 돼지도 한마리 잡았다.  

  3일 밤낮을 자지 않고 일했다.  낙오분자도 없었고 중대 환자로 누워있던 군인들도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때 어느 공동체나 모두 한마음으로 뭉치면 태산도 옮길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문제는 자기가 하는 일이 정당한가의 문제이다.  즉 진리인가 비 진리인가 하는 문제가 가장 중요한 것이다.  그때 나는 조선노동당에서 하라고 하는 것이 오직 진리인줄 알았다.  중대를 동원했던 그 방법을 나는 그 후에도 많이 써 먹었고 그때마다 성공했다.  

  이런 일이 있은 후 북한군 육해공군에 소문난 스타가 되었다.  겸열은 결함을 지적하는 데만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지적된 문제가 빨리 퇴치도도록 하는데도 목적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 당중앙위원회 검열성원들은 검열목적이 우리 중대에서 만은 완수된 것이다.  검열서원들은 우리중대의 경험을 널리 소개했고 모든 중대들에서 일반화하도록 하였다.  

  그때부터 나는 교만해지기 시작했고 누구도 내 권위 대해서 도전할 수 없다고까지 착각했다.  그리고 기회를 봐서 빨리 사관학교로 가야한다고 생각했다.  당시에 내가 교만함으로 저지른 일들에 대해서는 창피해서 여기에 다 적을 수가 없을 정도이다.

  하전사 생활을 돌이켜 볼 때 물론 어려운 것도 많았다.  그러나 애당초 '나의 인생은 오직 군대'라고 각오했기에 다른 사람에 비해 빨리 적응했다고 생각한다.  나를 빨리 적응시킨 것은 항일빨찌산 참가자들의 회상기였고 김일성의 1968년 2월8일 김일성군사종합대학에서의 연설과 1968년 10월 만경대혁명학원 원아들에게 한 김일성의 연설이었다.  그리고 손에 잡히는 대로 책, 신눈, 소설, 시, 기타 문학예술 작품들 영화, 계속적인 독서로 인해 정치 사상적으로나 군사 기술적으로 직업적인 혁명가로 성장하고 있음을 나 자신도 인정할 수 있었다. 

  제일 감명 깊었던 것은 항일 빨찌산 참가자들의 회상기 중에서 조도언 동지가 쓴 <그는 끝까지 굴하지 않았다>라는 회상기였다.  항일의녀 투사 백장숙 동지는 일제에게 체포되어 갖은 고문끝에 희생되면서도 21살 어린 나이에 끝까지 굴하지 않은 백절불룰의 혁명정신을 보여주었다.  나는 그 글일 읽으며 마치 내가 그녀와 같은 혁명가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무서운 게 없었다.  그때부터 낙관주의라는 것이 무엇인지 실천현장에서 확실하게 배웠다.  비에 흠뻑 젖은 군복을 체온으로 말리면서도 웃었고, 눈보라 속에서 군무를 서고 들어와 꽝꽝 얼어붙은 총을 녹이면서도 혁명가라는 자부심으로 만족했다.

  강철 같은 규율과 훈련으로 몸을 다지고  혁명적 조직생활과 학습을 통해 정치 사상적으로 자신을 단련하는 과정에서 몸도 마음도 성숙하고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조선혁명과 조국통일이 나 자신의 것으로 확실히 자리매김 되면서 성숙된 혁명가로, 직업적인 혁명가로 한발 더 다가가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이때 나는 20살 이었다.

 하전사 생활을 끝내게 된 것은 바로 군관학교(사관학교)에 가기 위해서였다.  어릴 적부터 직업군인이 되겠다고 다짐했으니 군관학교에 가는 것은 당연하였다.  북한군은 크게 군사 분야의 군관학교 즉, 군종대학들과 각 병종들의 군관학교, 그리고 정치군관학교, 보위부분 군관학교, 후방부분 군관학교로 구분하여 볼 수 있다.  누구나 다 군관학교에 가면 자기가 복부하던 병종의 군관학교에 가게 된다.  그러나 정치군관학교는 군종병종에 관계없이 오직 하나이다.

  나는 사관학교를 놓고 고민이 많았다.  중대 초급단체 위원장을 하면서 군대 안에서 정치가 차지하는 그 지위와 역활을 잘 알고 있었기에 정치사관학교에 가는 것이 합당하지만, 한편 군대에서 전투를 직접 조직하고 지휘하는 것은 작전장교이다.  그래서 장교가 될 바에는 전투를 직접 조직하고 지휘하는 작전장교가 되고 싶기도 하였다.  나름대로 고민하고 있을 때, 대열부(한국으로 말하면 인사과)에서 먼저 면접을 보게 되었다.  대열부에서 면접한다는 것은 제도적으로 볼 때 군사 분야의 군관학교에 가는 것이 너무나 뻔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정치군관학교에 가는 군인들은 대열부에서 면접을 보지 않고 정치간부과에서 면접을 보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면접시 나는 아무런 이의도 제기하지 않았고,  그저 당이 하라는 대로 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력서를 썼다.

  그 후 이, 삼일이 지났을 무렵 정치간부과에서 또 불렀다.  면접 때 나는 사실대로 이야기 했고 솔직히 정치보다 작전을 하고 싶다고 고백했다.  "꿩 잡는 것이 매" 라고 싸움을 하려면 작전장교가 되어야 한다고 기존에 가지고 있던 내 생각을 말한 것이다. 그런데 정치간부과에서는 내말을 들었는지 못들었는지 이력서를 또 쓰라는 것이다.  결국 나는 정치군관학교로 가게 되었다.  대열부에서 나를 작전장교를 시킨다고 먼저 스카웃했지만 역시 북한은 정치 즉 당이 더 파워가 있다.  대열부에서 쓴 이력서를 취소시키고 정치로 돌렸던 것이 바로 당에서 한 일이다.

  내가 정치 군관학교에 간것은 1970년 10월 이었다.  학교는 평안남도 개천군 광도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때 학교명칭을  조선인민군 김책정치군관학교(197군부대)에서 김일성 정치대학으로 승격시키며 평양시 형제산구역 서포로 학교를 옮기라고 명령하였다.  학교는 경사가 났고 평양으로 옮기기 위한 작업이 시작되었다. 

  대학 캠퍼스는 평양으로 나와서, 천막을 치고 공부도 하며 학교 건설도 하였다.  군관학교가 대학이 되었으니 대학의 학제도 달라졌고 캠퍼스 건설도 아주 방대하였다.  학제는 중등반과 대학반으로 하되 중등반은 2년, 대학반은 3년으로 했다.  그때부터 북한의 정치장교들은 우선 김일성 정치대학 중등반 2년을 졸업하면서 소위로 임관하게 되었다.

  그중 부대에 나가 발전 가능성이 있는 정치장교들을 다시 뽑아 김일성정치대학 대학반에 입학시켜 3년을 더 교육한다.  따라서 북한의 정치 장교들은 정식 코스를 밟으며 5년을 공부하게 되어있다.  북한군 총정치국은 그래도 정치장교 수급이 모자라면 혹간 김일성 고급 당 학교에 위탁공부를 시키기도 하고, 김일성종합대학 정치경제학부에 위탁공부를 시키기도 한다.  문제를 김일성 고급당 학교와 김일성종합대학에서 공부를 한 정치장교들은 김일성 고급 당 학교와 김일성 종합대학에서 공부를 한 정치장교들은 김일성정치대학에서 공부한 정치장교들보다 군사작전 지식이 열악하다는 것이 약점이다.  정치장교는 해당 부대의 작전장교들을 군사 작전상 컨드톨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정치적으로나 당적으로 작전장교들을 통제하고 지도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1972년 10월에 김일성정치대학 중등반을 졸업하면서 소위 계급과 함께 임관하게 되었다.  중대 정치지도원으로부터 시작하여 대대급까지의 근무를 마치고, 다시 4년간의 대학공부를 더 했는데 이것이 북한에서의 정치장교로서의 나의 학력이다.  <계속>

심주일 목사의 ‘탈북 일기’는 책 ‘멈출 수 없는 소명’(토기장이) 내용을 출판사의 허락을 얻어 요약, 연재하는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편집자 주

심주일 목사  pik3403@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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