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이다. 서울시공무원간첩사건의 항소심 공판이 지지부진 사람들의 뇌리에 잊혀지는가 싶더니 느닷없이 '증거조작' 사건이 터졌다. 파장은 컸다. ‘만만디’ 체질로 좀체 움직이지 않을 것이란 편견을 깨고 중국 정부(주한 중국대사관)가 공식 입장을 비교적 신속하게 밝혀왔기 때문이다.

이에 앞서 지난해 11월 1일 검찰은 화룡시공안국의 ‘출입경기록조회결과’, 삼합변방검사참의 ‘유가강(유우성)의 출입경기록에 대한 회신’, 화룡시공안국이 심양 주재 대한민국총영사관에 발송한 공문 등 3건을 피고 유우성씨의 간첩혐의를 입증할 유력한 증거자료로 법원에 제출했다. 변호인단은 연변조선족자치주 공안국이 발급한 ‘출입경기록조회결과’와 삼합변방검사참으로부터 발급받은 ‘정황설명서’를 각각 제출했다.

그로부터 한 달 쯤 지난 12월 6일 뉴스타파는 화룡시 공안국 현지 취재를 통해 “검찰 증거물은 위조됐다”는 담당자의 답변을 단독 보도했다(남매간첩사건 관련 검찰의 사실조회서도 조작의혹 제기돼). 그러자 변호인단은 12월 23일 법원의 허락을 받아 검찰과 변호인단이 각각 법원에 제출한 증거자료 관련 사실조회 요청 공문을 중국대사관에 발송했다. 중국대사관은 약 50일만인 지난 2월 13일 서울고등법원 앞으로 보낸 공문에서 검찰 측이 제출한 증거자료에 대해서는 “모두 위조된 것”이라며 “형사범죄로써 중국은 법에 따라 수사를 진행할 것이므로 위조 문서의 상세한 출처를 제출해 달라”고 요청했다. 반면 변호인단이 제출한 증거자료와 관련해서는 “모두 사실이며 합법적인 정식 서류”라고 밝혔다(‘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 검찰 증거도 조작).

증거 위조 사건이 터진 것이다. 침묵하거나 우성씨를 간첩혐의자로 의심해오던 보수 언론도 발칵 뒤집혔다. 아니 뒤집힐 수밖에 없었다. 법원에서 증거는 유무죄를 판단하는 절대적 근거다. 증거조작은 따라서 사법부, 그러니까 헌법기관의 근간을 흔드는 국기문란사건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있어서는 안될 일이 발생했던 것이다.

▲ 지난해 8월 22일 서울중앙지법으로부터 무죄 판결을 받고 서울구치소를 나온 유우성씨가 호주 친구와 얼싸 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고 있다. ⓒ유코리아뉴스DB

유우성씨 사건이 발생한 지 1년이 다 되도록 꿈쩍도 않던 야당도 비로소 국정원을 항의 방문하고 중국 출장을 다녀오는 등 부산을 떨었다. 잦아들었던 ‘국정원 개혁’ 요구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마침내 김진태 검찰총장, 황교안 법무부장관, 남재준 국정원장, 박근혜 대통령까지 유감 표명 내지는 사과를 해야 했다.

언론은 온통 '증거조작'을 한 검찰, 국정원 책임의 불가피성을 연일 질타하는 듯 했다. 그러면서 거대 언론들의 이상한 논조는 그대로였다. 증거 조작이지 간첩 조작은 아니라는 것이다. 검찰 셀프수사팀의 발표도 그랬다. 우성씨 사건을 담당한 검사들은 우성씨가 간첩임을 확신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만약 간첩이 아니란 걸 알고서 증거를 조작했다면 국가보안법상 날조죄로 중형을 받게 돼 있었다. 셀프수사팀은 엉뚱한 논리로 제 식구를 감싼 것이다.

증거조작 사건은 이렇게 일파만파 커졌고 검찰은 거짓 증거를 철회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신 사기죄를 추가해 공소장을 변경했다. 우성씨가 대한민국에 입국할 때 자신의 화교 신분을 속이고 탈북자 행세를 하며 지원금 등을 가로챘다는 것이다. 간첩 유죄는 이미 물건너갔고 딴에는 사기죄라도 적용해볼 요량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항소심 재판부는 1심 재판부보다 더 합리적이었다. 1심 재판부는 증인이 변호인 접견권 등을 고지받지 못한 점 등을 지적하면서도 ‘임의성 없음’이 아닌 ‘신빙성 없음’이라고 판시했다(유우성 사건, 그것은 한 편의 법정드라마였다). 이 때문에 1심 재판부 판단은 앞뒤가 안맞는 논리라는 지적이 많았다. 반면 항소심 재판부는 증인진술의 임의성 없음을 들어 무죄를 선고한 것이다. 임의성 없음은 곧 중앙합동신문센터에서 국정원 수사관들에 의한 폭력, 회유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항소심 재판부는 변호인 접견권을 미리 알리지 않았고, 실제적인 감금상태였고, 회유와 협박도 있었다는 것 등을 임의성 없음의 증거로 들었다. 임의성이 없었기에 (사실과 부합하지 않을 뿐더러) 증거능력이 없는 것이고, 따라서 유죄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조작이란 말만 빠진 것이지 사실상 간첩 조작 사건이었음을 법원이 판결해준 것이다(항소심 재판부가 밝힌 ‘서울시 공무원 간첩(조작)사건’ 무죄 이유). 

이번 사건은 증거조작이 아니라 간첩조작이 맞다. 정확하게는 증거조작을 통한 간첩조작사건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간첩조작은 증거조작을 통해 이뤄진다. 증거조작은 간첩조작의 수단일 뿐이다. 사람을 간첩으로 조작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만약 그게 가능하다면 ‘간첩 개조’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그 사람의 진술, 그 사람에 대한 증언, 그 사람의 행적에 대한 증명을 조작하는 것 아닌가. 끔찍했던 고문도, 회유도 이 땅에서 그토록 많았던 이유가 아닌가.

지난 25일 항소심의 무죄 판결 직후 우성씨는 울먹이며 취재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번 판결을 계기로 간첩조작 같은 일이 대한민국에서 다시는 반복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 가족처럼 이런 불행한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기를 간곡히 부탁드린다.”

‘간첩 조작’은 왠지 군사독재 때 중앙정보부나 안기부에서나 어울릴 법할 것이다. 21세기 대한민국 국가정보원에서 간첩 조작을 한다? 필자를 비롯한 대부분 사람들이 믿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성씨 사건은 21세기 대한민국 국가정보원에서도 버젓이 간첩 조작을 하고 있다는 걸 증명하고 있다.

▲ 지난해 4월 27일 유우성씨의 여동생이 긴급기자회견을 열어 "중앙합동신문센터에서 했던 진술은 폭력과 회유에 의해 모두 거짓이었다"고 폭로하고 있다. ⓒ유코리아뉴스DB

많은 사람들이 세월호 침몰 사건을 보며 대한민국 침몰을 연상한다. 그만큼 대한민국은 총체적으로 위기에 놓여 있었던 것이고, 그 중심에 국정원이 있었다. 그리고 국민들은 국정원의 직속 상관으로 국정원을 감독하고 책임을 물어야 할 대통령이 오히려 국정원의 행태를 방기하고 조장하는 모습에 더욱 좌절하고 분노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만간 침몰한 세월호는 건져질 것이고, 그 참상은 낱낱이 밝혀질 것이다. 그와 함께 국정원이 저질렀던 민주주의 파괴, 국기 문란 행위도 낱낱이 밝혀야 한다. 그것이 침몰한 대한민국을 다시 세우는 가장 시급하고 초보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김성원 기자  ukoreanews@gmail.com

<저작권자 © 유코리아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